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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_ 국가 낭만주의 시대를 니체와 함께 건너기
니체를 보라 - 배우는 법마저 가르치는 스승 니체 원한 - 나는 강자인가, 약자인가? 양심의 가책 - 고통에 무력해질 때 무엇이 탄생하는가? 위계 - 가치의 ‘가치’를 물은 적이 있는가? 거짓 - 진리라는 우상을 어떻게 전복할 것인가? 사유 - 무죄를 향한 통찰은 어떻게 가능한가? 위버멘쉬 - 나는 나를 철저하게 지배할 수 있는가? 긍정 - 디오니소스적 변신은 가능한가? 질병 - 병이 없는 삶이 있을까? 공부 - 건강한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비법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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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철학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잘 살기 위한 것, 그리고 잘 살기 위해서라도 남과 적합한 관계를 맺고, 그런 관계를 위해 자신도 적합하게 변화하는 것, 이것이 니체의 철학이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생리학이자 의학이다. --- p.28 「니체를 보라」중에서
강자의 '좋음'은 자기 자신의 고귀함이었다. 반면 약자의'좋음'은 강자에 대한 부정에서 나온 가짜 긍정이었다. 따라서‘좋음’이라는 말이 지칭하는 것도 완전히 다르고, 당연히 선과 악에 대해 말하는 것도 차원이 아주 다르다. 위계의 문제에서는 결코 진리치를 따질 수 없다. 약자는 약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강자는 강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관점은 위계적으로 차이가 난다. 따라서 문제는 어떤 삶을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삶을 지금 내가 살고 있느냐이다. 니체의 표현으로 하면 우리의 생리적 건강성이 강자적인 것인가 아니면 약자적인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 p.162 「위계-가치의 ‘가치’를 물은 적이 있는가?」중에서 병든 자들에게도 의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권력의지가 없는 존재는 없다. 모두 자기 삶을 긍정하고 있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싶고, 자기 삶을 더 고양시키고자 한다. 그런데 금욕주의적 이상 속에서 우월에의 의지라는 그 긍정의 의지는 기묘하게 삶에 대한 부정으로 흐른다. 강력하게 의욕할 수만 있다면 인간은 뭐든 붙잡는다. 비록 그것이 자신을 더 병들게 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원한과 가책의 해석술만큼 인간의 의욕을 북돋워주는 것은 없었다. 감정의 무절제를 이처럼 훌륭하게 자극하는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 p.137 「양심의 가책-고통에 무력해질 때 무엇이 탄생하는가?」중에서 진리만을 원하는 자들은 이런 속임과 기만의 세계를 오류나 외관(비본질)으로 규정해버린다. 그에게 삶은 (진리에 대한) 인식에 대립하고, 이 세계는 저 세계에 대립한다. 속이지 않는 세계는 분명 존재한다는 것, 이것만이 참된 세계이고 진리의 근원이라는 것, 이것이야말로 삶의 이름이 아니라 삶이 아닌 것의 이름 속에서 가능한 믿음이다. 문제는 이런 진리에 대한 믿음이 이 세계를 허황된 외관으로 만들어버리고, 혹은 이 세계에 대한 부정의 의지를 진리라는 이름으로 미화한다는 것이다. --- p.197 「거짓-진리라는 우상을 어떻게 전복할 것인가?」중에서 우리는 이미 허무주의자다. 지금 이 순간의 삶을 미래의 삶을 위한 들러리로 만들 때, 현재의 삶을 도래할 미래에 비해 보잘것 없 고 부정해야 할 것으로 만들 때 우리는‘이미 지금 이 순간’의 무주의자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지금 이 순간, 살아가는 이 순간밖에는 없다. 이 순간을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존재는 이미 삶을 떠난 자이다. 우리는 늘 이런 비전속에서 산다. 선진국이 되지 못한 지금 이 순간은 무가치하며, 소득 7만불이 되지 못한 이 순간은 초라한 것이며, 대학이든 직장이든 원하는 곳에 들어가지 못하는 지금 이 순간은 구차한 것이라고 자조할 때 우리는 모두 허무주의자가 된다. 이럴 때 우리에게 삶은 무엇인가. 부정해야 할 것, 미래에만 도래해야 할 것,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 그리하여 유죄의 삶. 산다는 것을 꼭 이렇게 허무주의적인 것으로만 규정해야 하는가. --- p.243 「사유-무죄를 향한 통찰은 어떻게 가능한가?」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