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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1. 부르심 2. 건축과 이별 후 생긴 일 3. 신학교에서 가회동성당으로 4. 건축기획 5. 건축비 마련 6. 증인들 7. 토목공사 8. 암 수술과 자유로운 영혼 9. 한옥공사 10. 파이프오르간 이야기 11.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사람들-예술인들과 협조자들 12. 건축사용 허가를 받은 날 13. 준공 후 첫 장례식 14. 건축상 15. 방글라데시와 하느님의 역사 정리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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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비 ‘김숙’이 세례받을 때 찍은 사진을 보니 가회동성당의 내부가 틀림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진을 게재했던 경향신문에 의뢰하여 의친왕 서거 때의 기사를 찾아냈습니다. 신문기사(1955년 8월 18일자)를 복사하여 나중에 가회동 교회사전시실에 전시하였고 그 기사내용도 확증해서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교회사의 한 뿌리를 캐내게 되었지요. 뿐만 아니라 고종의 여섯 자녀들 중에서 단명한 두 명을 빼고 자연사한 네 명이 모두 천주교신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으므로 그러한 사실을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건축시작 전부터 전시실을 계획했습니다. 다시 요약하면 박해의 주체인 황실이 박해가 시작된 곳인 가회동성당에서 세례받은 것이고, 가회동성당이 박해의 주체를 그 품에 받아들이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고, 이로써 순교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고 결국 신앙이 승리했다는 이 감격스러운 사실을 세상에 알려야 했습니다.
--- p.37 앞에서 언급한 율리안나 자매님은 삼청동 인근에 ‘스미스가 좋아하는 한옥’이라는 음식점을 열고 저에게 축복을 부탁하셨습니다. 이제 막 문을 열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그 음식점의 한 모퉁이에 유명여배우 송혜교가 앉아 있다고 동행했던 누군가가 말해 줬습니다. 저는 이름은 들었지만 스크린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언뜻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유명한 연예인이 식사를 하고 있더라도 축복식은 해야 했으므로 그분께 양해를 구하기 위해 말을 건넸죠. 그리고 이렇게 말을 더했습니다. “가회동성당이 곧 헐릴 겁니다. 그전에 사진이라도 찍어두세요.” “성당 예쁘던데 왜 헐어요?” “아, 붕괴위험에 있어서요.” “그럼 제가 건축헌금이라도.” “그렇게 안 하셔도 됩니다. 하하하.” 그분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으므로 저는 건축기금을 사양했습니다. 그리고 음식점 축복예식을 마친 다음 제 자리에 돌아와서 식사를 하는데, 매니저로 보이는 분이 제게 찾아와서 봉투를 하나 주면서 말했습니다. “혜교가요, 지금 현재 자기 지갑에 있는 것이 이것밖에 안 돼서, 다 드려도 이것밖에 못 드리니 죄송하대요.” 그분이 평소에 얼마나 지갑에 넣고 다니는지 개인 사생활이 노출될 수 있으므로 여기서 액수를 밝힐 수는 없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지갑의 모든 돈을 다 내놓았다는 것입니다. 신자도 아닌 분이 성당을 짓는다고 하니까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기부했다는 것에 저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지만 그분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하느님이실 것입니다. 이외에도 뜻밖의 기증자가 더 있었지만 기억 속에서 사라진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몇 사례를 든 것은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주시고 많은 분들이 십시일반하여 성전을 지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 pp.67~69 암 수술은 전화위복이 되었지요. 결국 암 수술 덕분에 불필요한 많은 에너지를 쓰지 않고 비교적 편하게 성당을 지은 것과 책도 한 권 쓰게 된 것 외에도 얻은 것이 많지만 생략합니다. 암은 기력이나 체력이 왕성하고 젊을수록 전이속도가 빠르다고 합니다. 당시 50대의 나이였지만 여전히 기력이 왕성하고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암의 전이속도는 빠른 편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조기발견하지 않으면 생명조차 위험할 수 있었으나 다행스럽게 일찍 발견하여 지금은 완치되었지요. 그런데 암 수술 이후부터는 건강관리에 더 많이 신경 쓰게 되어서 오히려 전화위복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모든 것은 다 지나갑니다. 그 당시에는 힘들었던 것도 다 지나갔고,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은총이었습니다. --- p.87 흔히 목수들은 “집(한옥)을 지을 때 나무는 하늘이 내려준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목수들이 그렇게 생각하듯이 필자 역시 하느님께서 내려주셨다고 믿습니다. 생각해 보면 하느님이 주시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좋은 계획을 세워도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야고보서 4장 15절)라고 하신 야고보서의 말씀처럼 그분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외국 소나무를 쓸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국산 소나무를, 그것도 적송을 구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마치 가회동성당의 한옥을 짓기 위해 준비되어 있었던 것처럼, 함수율이 낮은 자연건조상태의 함수율 15% 이하의 재목을 홍천에서 찾아냈다는 것도 “하느님”을 빼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 p.94 수술 후에 요양을 하면서 저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세레나 자매님께서 내가 첫 모금 나가는 날에 맞추어 김제에 가셨는가. 다른 날에 가셨더라면 나를 만날 수가 없었을 텐데. 그리고 조금만 일찍 서울에 도착했었어도 성북동성당에서 미사를 드렸을 텐데 왜 하필 교통체증이 일어나서 혜화동성당으로 오셨는가. 성북동 신자가 헤화동에서 미사를 드렸다는 것, 그래서 하필 그 모금하는 날에 필자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도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상적인 일은 아니었지요. 우연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났던 겁니다. 여기에서 ‘왜’ 또는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라는 질문을 던지면 하느님이 있으셔야 설명될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해서 1년 만에 저는 전 건축위원장과 약속한 10억 원을 모금했습니다. 건축위원 중에 ‘홍보 및 기록 보존’팀장이었던 보나뮤니엘 자매님은 모금이 끝나고 모금 때 찍었던 사진을 정리했습니다. 사진은 기록용이었으니 미사나 강론 때 사진, 약정서에 서명하거나 모금하는 전경사진을 주로 찍었답니다. 그래서 신자들과 필자가 1대1로 인사를 나누는 사진은 단 한 장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 사진에 찍힌 인물은 사진을 찍을 당시만 해도 누구인지 몰랐고, 많은 신자들이 있었으므로 무작위로 찍은 사진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사진정리를 하면서 유일하게 필자와 함께 찍힌 사진 속의 인물이 누구인지를 알아보고 보나뮤니엘 자매님은 화들짝 놀랐고 소름이 돋았다고 합니다. 그 사진 속의 인물이 바로 파이프오르간을 기증해 주신 정영자 세레나 자매님이었기 때문입니다. --- pp.111~112 2014년만 해도 대한민국의 건축가들이 주는 건축문화대상을 포함해 올해의 한옥상, 서울시 건축대상, 서울시 시민 공감상(서울에 있는 건축물들을 인터넷상에 소개하고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투표로 선정)을 수상했고, 필자가 가회동성당을 떠난 후에는 서울시 우수한옥, 가톨릭미술 건축분야 대상 등을 받았다고 합니다. (중략) 이것으로 필자는 자신을 공치사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상을 받은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을 받을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들어주신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다른 우수한 건축물들이 그 당시에 많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더 우수한 건축물이 출품되어 상을 받지 못할 수도 있었지요. 그러나 가회동성당이 건축상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성당이 세상에 알려지고, 이 성당이 어떠한 성당인지, 왜 교회사 안에서 중요한 성당이 되며, 북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세상에 알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상을 받도록 섭리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실제로 그것이 이루어졌을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 유명배우(김태희와 비)가 가회동성당에서 혼배성사를 받아 세상에 더욱 알려지게 되었지요.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섭리로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 pp.148~1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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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산사건의 가해자인 황실을 천주교 신자로 받아들인 가회동성당 이야기
1795년 4월 5일 부활대축일에 최인길 마티아의 집(가회동성당 인근)에서 주문모 신부는 조선 땅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밀고자가 생겨 미사 중에 포졸이 들이닥치자 주문모 신부는 황급히 대피하고, 최인길 마티아가 영대를 메고 주문모 신부의 행세를 했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를 대신해 잡혀가서 곤장 50대를 맞아 즉사했다. 최인길 마티아가 순교한 이후 주문모 신부는 가회동성당 관활 내에 있는 강완숙 골롬바의 집에 피신했는데, 주문모 신부를 못 잡게 되자 박해는 더욱 심해졌고 그는 중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중국으로 돌아가던 중 한양으로 발길을 돌려 자수했다. 자신이 잡히지 않으면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고초를 당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자수한 주문모 신부는 군문효수(화살로 두 귀를 밑에서 위를 향하게 뚫고, 목을 잘라서 그 목을 창에 끼워 높게 매다는 형벌)로 순교했다. 또 강완숙 골롬바도 결국 잡혀서 참수를 당했다. 이와 같이 첫 미사 후에 일어났던 최인길, 주문모, 강완숙 등 순교자들이 치명당한 사건을 ‘북산사건’이라고 부르는데, 이 북산사건 이후 조선 땅에서 본격적으로 박해가 시작되었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리게 되었다. 따라서 북산사건의 중심에 위치한 가회동성당은 한국 천주교의 뿌리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박해의 주체가 박해의 대상을 받아들이는 놀라운 일이 북산사건이 발생한 가회동성당 관할 내에서 일어났다. 북산사건 당시 박해의 주체는 황실이었는데, 황실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친왕과 의친왕비가 가회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의친왕 ‘이강’이 ‘비오’, 의친왕비 ‘김숙’이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받았는데, 조선의 마지막 황실이 가회동성당에서 세례받은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일들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 가회동성당을 새로 건축하는 과정에서 만난 신비로운 하느님 이야기 가회동성당을 건축할 당시에 교적신자 수는 당시 약 1,600명에 불과했다. 송차선 신부는 가회동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한 이후 실거주자를 꼼꼼하게 살펴보니 대략 1,100명이었고 그나마 대부분 고령자였다. 성당을 짓기 위해서는 교적신자들이 적어도 4,000명 이상 되어야 하는데 그 정도의 본당신자들이 자력으로 성당을 짓는 것은 불가능했다. 성당을 짓기 위해 본당신자들로부터 건축기금을 마련해야 했지만, 송차선 신부는 신자들에게 부담감을 주지 않기 위해 두 가지를 약속했다. 하나는 건축헌금을 내라고 절대 강요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른 한 가지는 현금을 80% 이상 확보하지 않으면 건축을 시작도 안 하겠다는 것이었다. 송차선 신부는 건축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네 가지 안을 생각했다. 첫 번째 안은 사후기증자가 기증한 삼청동에 있는 로마나의 집을 매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땅값이 비싸서 130평에 이르는 이 집을 매각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두 번째 안은 로마나의 집을 가회동성당의 맞은편에 있는 벨라뎃다의 집과 맞바꾸어 매각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 안은 모금을 나가면서 큰손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네 번째 안은 미국식 모금방법인데, 건물 각각의 방 입구에 기증자의 이름을 붙여주거나, 아예 기증자의 이름을 방의 이름으로 정해 주어 기금을 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평일 미사를 드리던 어느 날 송차선 신부와 세례명이 같은 송 요한이 가회동성당으로 찾아왔다. 이후 송 요한은 로마나의 집을 매수했고, 가회동성당 신자들의 건축기금과 건축을 위한 2차 헌금, 바자회 수익금 등을 모두 합치니, 송차선 신부가 생각한 첫 번째 안이 이루어지게 되어 건축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회동성당의 부지는 340평 정도밖에 안 되었고, 건폐율도 낮았으며, 고도제한으로 12m 이상 지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주차시설까지 마련해야 했기에 반드시 지하 3층까지 파야 했다. 지하 3층과 지상 3층의 건물을 지으면 유지비도 그만큼 많이 드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회동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도록 해 혼배수입을 얻고자 했다. 그리하여 지하 토목공사를 했는데 그 과정에서 가회동성당의 지반이 궁궐의 주춧돌로 쓰인 암반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모진 박해 속에서도 꿋꿋하게 신앙을 지켜온 순교자들의 모습처럼 가회동성당은 하느님의 섭리로 반석 위에 지어져 어떤 지진이 오더라도 끄떡없이 버텨낼 성당이 될 수 있었다. 이 책은 성당 건축 과정이 그리 만만치 않다는 교훈도 건넨다. 송차선 신부는 건축 과정에서 여러 난관에 부딪치고 암 수술을 받기도 했다. 좋은 한옥을 짓기 위해서는 함수율 15% 이하의 한국산 소나무를 구해야 하는데, 어렵사리 강원도 홍천에서 사찰 건축용으로 채벌했다 계획이 취소되어 임업사업소에서 보관하고 있던 적송을 구할 수 있었다. 국산 소나무를 구하기 쉽지 않은 현실에서 마치 가회동성당의 한옥을 짓기 위해 준비되어 있었던 것처럼 기막힌 적송을 구한 것이다. 흔히 목수들은 “집(한옥)을 지을 때 나무는 하늘이 내려준다”고 말하는데 송차선 신부는 “이 나무를 하느님께서 내려주셨다”고 믿는다. 또 건축비를 제외한 건축부대비용으로 4억 원 이상의 파이프오르간을 포함해 제대, 십자가, 십사처, 예수성심상, 감실, 성물 등을 마련하기 위해 10억 원이 필요했다. 모두가 10억 원을 마련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송차선 신부는 암 수술 이후에도 혜화동성당과 세검정성당에서 각각 1억 원 이상 모금했다. 그리고 신비하게도 혜화동성당에서 정영자 세레나를 만났는데, 이후 파이프오르간 설치비용으로 4억 원을 기증받았다. 정영자 세레나는 원래 성북동성당 신자인데 고향인 김제에 갔다가 교통체증이 심해서 서울에 도착하니 저녁 8시 30분가량이었다. 그 시간이면 이미 성북동성당에서는 미사가 끝나서 오후 9시 미사가 남아 있는 혜화동성당을 찾았고, 그곳에서 송차선 신부의 강론을 들은 것이다. 송차선 신부는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 역시 “하느님을 빼면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책은 성당 건축 과정을 자세히 다루고 있는데, 세상 모든 성당은 하느님이 지으신다는 교훈을 건네고 있다. 송차선 신부는 “하느님이 머무시는 집, 성전은 하느님께서 지어주셔야 한다”고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