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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며
1장 샌드위치 세대, 베이비부머 2장 학교 종이 땡땡땡 3장 “박○○! 넌 회충!” 4장 검정 교복과 모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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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베이비부머들이 날마다 기록한 일기장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 살았으며, 어떤 시대를 보냈는지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과 공감하고 싶었다. 우리가 잊고 살았던 것들을 하나씩 기억에서 끄집어내어 ‘아, 이때는 이랬지~’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리고 우리의 자식 세대에게도 꼭 우리가 살았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현재의 기억은 시간이 조금 지나면 과거의 추억으로 쌓인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흐르면 그 추억을 찾아내기가 어렵다. 그런 분들에게 이 책을 드린다. 이 책을 모든 베이비부머들에게 바친다. - 본문 7쪽에서 어린 시절의 창경원은 동물원과 놀이기구 그리고 벚나무가 가득한 종합 놀이동산이었다. 창경원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비원으로 월담할 때보다 덜 위험했다. 비원과 창경원 사이의 문 밑으로 개구멍 같은 것이 있었는데, 우리는 낮은 포복으로 가뿐히 통과했다. 창경원에는 회전목마 같은 놀이 기구들이 많았지만 초등학생들이 무슨 돈이 있었겠는가? 다만 남들이 재미있게 타는 모습만 봐도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 본문 27쪽에서 초등학교 4학년 겨울에 새우깡을 처음 먹어봤다. 스낵 과자라는 것이 이 땅에 처음으로 명함을 내미는 순간이었다. 당시에 새우깡은 50원 했던 것 같은데 삼양라면 한 봉지가 20원 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꽤 비싼 간식이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먹던 초등학생의 간식은 동네 구멍가게나 학교 앞 문방구에서 주로 사먹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간식은 역시 떡볶이였다. 거친 고추장 양념으로 끓여 낸 작은 흰 가래떡은 정말 맛있었다. 나는 가끔 문방구에서 외상으로 떡볶이를 사먹곤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세상 물정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던 초딩이었던 것 같다. - 본문 69쪽에서 중학교에 입학하던 1974년 아버지와 나는 지금의 압구정동에 갈 일이 있었다. 당시에는 제 3 한강교라고 불리던 한남대교를 건너 지금의 올림픽 대로를 따라 구현대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는데 아파트 건축 공사를 한창 하고 있었다. 주변은 온통 하얀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봄이었던 것 같다. 볼일을 보고 난 아버지께서는 택시를 타고 강북의 집으로 돌아오시면서 한마디 하셨다. “이 동네는 너무 멀구나!” 아마 아버지 세대는 한강을 건너간다는 사실이 미지의 세계에 발을 내딛는 것으로 생각하셨던 것 같다. 영등포나 노량진 같이 오래전부터 사람이 거주하던 곳은 서울로 생각하지만, 강남은 전혀 미답지의 세계로 여기셨던 것 같다. 어쨌든 강남, 아니 당시에는 영동으로 불리던 곳으로 이사를 가려던 계획은 아버지의 세계관에 부딪혀 무산되고 말았다. - 본문 83쪽에서 1960년 후반에서 1970년 초반의 한국, 온 국민은 ‘잘 살아보세’라는 일념으로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이 무렵 일본에서 역도산의 제자 한 명이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이름은 김일(金一). 역도산이 미국 선수를 제압하며 일본인들에게 희망을 주었듯이, 김일 선수는 고국의 형제들에게 통렬한 박치기 한 방으로 가슴 속의 응어리들을 날려 보냈다. 작은 동양 선수가 자신보다 덩치가 훨씬 큰 서양 선수를 제압하는 장면은 힘든 시대를 살고 있던 국민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기에 충분했다. - 본문 103쪽에서 학교에 등교를 하려면 먼저 정문에 양쪽으로 도열해 있는 규율부 터널을 무사히 지나야 한다. 목의 후크는 제대로 채웠는지, 경찰모와 유사한 모자는 잘 눌러 썼는지, 혹시 바지를 나팔바지 모양으로 불법 수선을 하지 않았는지 규율부 형들이 매서운 눈으로 검사를 했다. 그중에서 가장 주의 깊게 본 것은 두발이었다. 머리를 지나치게 기른 학생들이 주로 규율부에게 잡혔다. 학생부 선생님은 이발소에서 사용하는 바리캉으로 아이들의 머리에 시원한 고속도로를 내주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펑크 헤어스타일이 되는 셈이다. 이렇게 우리들의 병영(?) 생활은 시작되었다. - 본문 167쪽에서 연합고사를 통과한 인문계 중학교 3학년은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런데 고교 입시가 폐지된 지 얼마 되지 않던 시기라서 여전히 과거의 명문 고등학교에 자녀들을 보내려는 학부모들이 많았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학군이 서울의 공동학군이다. 고교 입시가 있던 시절 최고 명문이었던 경기 고등학교가 1976년 삼성동으로 이전했지만 대부분의 명문 고등학교들은 사대문 안에 있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안국동에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공동학군에 지원할 수 있었다. 물론 추첨을 해서 공동학군 고등학교를 배정받지 못하면 조금 멀리 떨어진 신설학교에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 본문 181쪽에서 당시 대치동 이남에는 논이 꽤 있었는데 농번기가 되면 학생들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우리 학교도 2학년 중에서 몇 반이 모내기에 동원되었다. 친한 친구가 이과반에 있었는데 자기반이 근처 논의 모내기에 동원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새참으로 나온 막걸리까지 한잔 했다는 것이다. 속으로 부럽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정말 시골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논 한 마지기만 샀어도……. ---본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