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천하는 글: 가장 객관적 입장에서 가장 공정하게 쓴 최제우 평전
1. 동학사상의 현재적 의미와 가치 2. 출생과 성장기 3. 세상을 찾아서 장삿길에 나서다 4. 수행과 득도 5. 사회비판과 동학 선포 6. 동학의 경전 『용담유사』 짓다 7. 포덕에 나서다 8. 남원 은적암에서 6개월 9. 경주에서 본격 포교 나서 10. 수난의 시기에 임하여 11. 최후를 앞두고 대비하다 12. 최후에 남긴 글 13. 포교 3년 만에 다시 체포되다 14. 41살에 ‘좌도난정’ 죄목으로 순교 15. 교조 순도 이후의 동학 16. 후계자 최시형과 손병희 지은이 후기 수운 최제우 연보 주(註) |
김삼웅의 다른 상품
|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최제우
최제우는 ‘동학’을 창도한 교조이기도 하지만, 한국사에서 전근대의 낡은 성벽을 뚫고 근대의 문 ‘사회개혁 사상가’이기도 하다. 동학을 세웠다는 종교사적인 측면뿐만이 아니라, 그는 안으로는 군왕과 양반 위주의 유교적 반상체제를 거부하면서 사민평등사상을 내세웠고, 밖으로는 서세동점으로 밀려오는 서학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사상의 원동력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최제우가 동학을 세운 목적은 병든 사회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정치권력이 없는 위치에서 백성들의 정신을 깨우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했기에, 그는 설법할 때도 이해하기 쉬운 말로 하고, 시가도 이해하기 쉬운 한글로 썼다. 동학의 역동적인 평민주의 사상은 백성들의 기대를 모으기에 모자라지 않았고, ‘서학’과 대비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기존의 틀에 박힌 사회구조에 얽매이던 조선 사회의 주류 밖에 있던 사람들, 사회적 소외자들에게는 구원과도 같이 들린 수운의 외침에 수많은 사람이 감동하여 그를 찾았다. 그들이 답례품처럼 가지고 왔던 곶감 꽂이만으로도 동네 사람들이 땔감을 했을 정도라고 하니 당시 수운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컸는지 잘 알 수 있다. 이렇듯 수운 최제우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유학 일변도의 척박한 풍토에서 ‘양반에 대치할 수 있는’ 세력으로 민중을 내세우고 각성시켰다. 차츰 각성된 민중은 주체성과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수운으로 인하여 근대적 민족주의 사상이 움트게 된 것이다. 비록 당시에는 실패했지만 최제우가 펼치고자 했던 동학사상은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민족주의 의식의 선구적인 자각이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 최제우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다양한 책들을 읽으면서 당대 누구 못지않은 학식과 덕성을 갖추었다. 그러나 입신출세의 길은 애초부터 막혀 있었기에 21살의 나이에 먹고살기 위해 보부상의 길을 선택했다. 1844년부터 1854년까지 10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길에서 그는 시국과 세상을 알게 되었다. 그는 10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두 눈으로 확인한 조선 사회가 이대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사를 그만둔 이듬해 한 스님으로부터 기이한 책을 받고, 1856년에 천성산에 있는 통도사 내원암과 적멸굴에서 득도를 위해 노력하지만 실패로 끝난다. 결국 다시 생업을 위해 철점을 차리지만 이 또한 2년 만에 문을 닫고 빚만 남는다.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다가 빚을 갚기 위해 농지를 팔고 집을 정리하는 바람에 갈 곳이 없어진 최제우는 36살에 고향인 경주의 용담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때 이름을 ‘제선’에서 ‘제우’로 바꾼다. ‘구할 제(濟)’에 ‘어리석을 우(愚)’, 곧 어리석은 세상을 구하겠다는 의지의 표시였다. 최제우는 그렇게 용담에서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와 수련하던 1860년 4월 5일 ‘한울님의 계시’로 후천개벽의 새 원리인 동학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1년여의 수도 정진 끝에 무극대도의 길, 즉 새로운 종교인 동학을 창도하고, 사람들에게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격의 존엄성과 근대적 민족의식을 일깨워주는 일에 전념한다.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한 이유 중 하나는 ‘서학(西學)’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이름도 ‘동학(東學)’이라고 지었다. 동학혁명과 3·1 혁명을 주도한 동학 최제우는 종교를 창도한 다른 성인들과 다른 길을 걸었다. 동학의 경전인 『용담유사』를 직접 지은 것이다. 석가, 예수, 마호메트 등 성인들은 종교를 창도할 때 글이 아닌 ‘말씀’을 제자와 신도들에게 남겼지만 최제우는 이들과 달리 경전을 직접 지어 남겼다. 백성이 주인이 되는 후천개벽의 새시대상을 제시하고, 다른 종교 창도자들과 달리 ‘광제창생, 제폭구민, 보국안민’ 등 현세론을 제기한 동학이 점점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퍼지고, 이를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음해와 탄압도 심해졌다. 1862년 9월에는 관아에 체포되어 경주 감영에 갇혔다가 6일 만에 풀려난다. 그러다 마침내 1863년 10월부터 조정에서 최제우의 동학을 탄압할 방도를 논의하고, 선전관 정운구를 내려보내 12월 10일에 최제우를 체포한다. 최제우가 도를 깨닫고 포덕을 펼친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조정에서 그에게 씌운 죄목은 유학을 문란시킨 ‘사문난적’과 서학이라는 사술로 백성들을 기망했다는 것이었다. 서학에 대응하기 위해 창도학 동학을 서학으로 치죄하는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다. 최제우는 동학을 세운지 4년 만인 1864년 3월 10일, 41살에 대구 감영에서 효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를 이어 해월 최시형(2세)과 의암 손병희(3세)이 교주의 자리를 이어받아 동학 세력을 확장한다. 교조가 혹세무민의 누명을 쓰고 죽자 동학도들은 관으로부터 갖은 탄압과 수탈을 당했다. 그러나 1870년에 들어서면서 동학 세력은 더욱 강화되고, 1892년에 동학도들이 모여 동학 탄압 중지와 교조(최제우)의 신원운동을 벌인다. 교조신원운동은 마침내 1894년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이 이끄는 동학혁명으로 폭발하게 된다. 그리고 동학은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로 이름을 바꾸고(1905), 1919년 3·1 혁명을 주도한다. 수운 최제우는 자신의 뜻을 미처 펼치지 못하고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유산은 우리나라 근현대의 역사를 바꾸는 큰 물줄기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수운 최제우를 알아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