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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감정 민주화
제1부 혐오의 작동 방식 제1장 혐오 감정 제2장 혐오 메커니즘 01 타자화│02 기피와 위계│03 상상된 정체성 제2부 혐오와 민주주의 제3장 혐오 규범 01 부정적인 감정│02 회원의 자격│03 혐오의 규범성 제3부 민주주의의 위기 제4장 혐오 정체성 01 불확실성│02 소수자성 제5장 혐오 유통 01 SNS│02 대항 표현 제6장 혐오 정치 01 감정 기획│02 도덕적 우월감 결론: 다시, 감정 민주화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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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사 기자로서 접했던 다양한 경험을 녹이기 위해 애썼다. 주로 정치, 사회, 정책 부서의 경험이 토대가 되었다. 기자는 공동체 감정을 유통시키는 최전선에서 복무한다. 공동체 감정에 매우 기민하고 예민한 직종이다. 기자들은 텍스트를 통해 대중을 흥분시키고, 때로는 절망하게 만든다. 어쩌면 우리 시대 혐오 현상은 ‘언론사’가 돌아가는 방식에 대한 반성과 ‘기자’의 성찰 없이는 설명이 어려울지도 모른다.
--- p.21~22 혐오가 공동체의 공적 감정으로 인정받게 되는 전형성이다. 특정 개인이 SNS와 같은 사적 영역을 통해 “나는 그들이 싫다”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지지받은 권력이 “우리는 그들이 싫다”고 말하는 것은 별개 문제다. 공적 영역이 사적 영역에서 체계적이지 않은 형태로 나돌던 혐오 감정을 공론화하는 것은 혐오에 규범적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혐오의 인증성’이다. --- p.33 엠케는 혐오가 특정 개인의 자발적 감정이 아니라 공동체에 의해 부추겨진 감정임을 강조한다. 즉, 혐오는 갑작스럽게 폭발해 나오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설계되고 유도되며, 훈련되고 양성된다. 그것을 자발적이거나 개인적으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 감정들이 계속 양성되는 일에 기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 p.50~51 이제 우리는 악의 평범성, 그 이상의 지점을 고민해야 한다. 필자는 ‘혐오의 규범성’이란 테제를 제시한다. 사유하고 판단할 줄 아는 민주주의 시민들이 고민한 결과, 혐오라는 감정 역시 어떤 정당한 목적이 있다고 여겼고, 그렇게 혐오가 규범적 위상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유하지 않기 때문에 ‘악’을 평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한 결과 ‘악’이라고 여겨진 것도 어쩌면 ‘선’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 즉 우리의 사유 능력이 현격히 저하된 틈을 타 ‘외부’의 악이 음습한 것이 아니라, 그 ‘악’이라 일컬어지는 감정이 민주주의 공동체 내부의 ‘규범’ 체계 안에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혐오는 선과 악이 얽히고설켜 복잡하고 혼잡스러운 형상으로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다. --- p.81 다만, 민주주의 시스템이 보장되었다고 해도, 감정 균형이 자동적으로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민주주의가 감정 균형을 ‘지향’한다고 표현했다. 감정 균형은 이상적 목표에 가깝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부단한 합의의 노력을 통해, 시스템의 의도적인 활용을 통해 ― 그리고 어떤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 ― 끊임없이 성취하는 노력의 과정이다. 민주주의는 감정 균형에 가까워지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제도이며, 그 과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민주주의 공동체의 감정은 늘 위태롭게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 p.94 반면, 부정적인 감정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할 때, 합의되고 심사받지 못한 부정적인 감정들이 우리 공동체를 부유할 때 이 감정을 일으켰다고 여겨지는 대상에 대한 부정적 감정으로 이어지고, 그 부정적 감정이 강해질수록 종국적 감정인 혐오에 도달될 가능성이 커진다. 민주주의 시스템하에서 혐오 감정이 거센 공동체는, 혐오로 전화되기 전의 그 부정적 감정들이 부유하고 있다는 뜻이며, 감정을 합의하는 민주주의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민주주의 역시 얼마든지 혐오에 취약할 수 있다. 민주주의 공동체가 감정 위기에 직면할 때, 즉 감정 합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 혐오는 얼마든지 거세질 가능성을 전제해야 한다. --- p.96~97 당시 정치 권력자들의 전략은 누가 피해자의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과 맞닿아 있었다. 단원고 유족을 피해자 자격이 없는 피해자로, 일반인 유족을 피해자 자격이 있는 피해자로 분류했던 것은 ‘피해자다움’ 혹은 ‘유족다움’이 그 기준이 되었다. 피해자다움은 우리에게 익숙한 물음이다. 법학과 범죄학, 특히 여성학에서 집중적으로 조명받아 온 이 개념은 범죄나 재난, 참사 피해자가 갖고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고정관념으로 구성되며 그 기준에 따라 피해자의 지위가 규정된다. --- p.122 한 일본 언론이 후쿠시마에서 다른 곳으로 피난 간 741명에 대해 설문 조사를 했더니, 괴롭힘을 당해 정신적 고통을 느꼈다는 답변이 45.1%로 절반에 달했다. 보상금에 대한 공격이 274건으로 가장 많았다. 지역 행사에서 배제시키는 것을 비롯해, 피난인의 자동차를 망가뜨리는 식의 폭력적인 괴롭힘도 있었다. 세월호 참사와 후쿠시마 방사능 유출 사고 당시, 한국과 일본 공동체가 참사 피해자를 다뤘던 방식은 놀라울 정도의 기시감이 있었다. 사고 초반만 하더라도 일본 공동체 역시 후쿠시마 원전 피해자들에 대해 깊은 동정을 표했다. 모금운동을 벌였고 국제적인 도움의 손길도 이어졌다. 하지만 복구가 지난하게 길어지면서 공동체 구성원 누군가는 피해자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의 불편함은 혐오로 전화되었다. --- p.125 무한대의 소통을 보장했던 SNS는 우리의 기대대로 상서로운 역할을 했을까. 안타깝게도 권력에 유착했던 기성 미디어의 힘을 빼놓으며 소통을 무한대로 증폭시킨 SNS의 뒤안길에는, 그 속도만큼 부정적인 감정을 유통시키는 역설을 내재하고 있었다. 우리 시대 혐오는 SNS를 통해 강력하게 전염되고 증폭되고 있다. 민주주의의 확산 속도만큼이나 극단론자의 목소리도 쉽게 퍼질 수 있었다. 이제 SNS에 대한 논의 없이는 우리 시대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할 수 없을 정도에 다다랐다. SNS로 소통이 극대화된 시기, 역설적이게도 ‘공론장의 위기’를 말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 p.179 화자가 해당 공간에서 상대의 반박을 염두에 두고 말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화법 역시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화법이 달라지면 화자의 감정도 달리 전달된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화법 형태를 변화시키는 두 공간을 크게 ‘연설 공간’과 ‘토론 공간’으로 달리 구분한다. 연설 공간은 불특정 다수를 향해 자신의 의견을 나타내는 공간이다. 텍스트는 한 방향으로 일방적으로 흐른다. 물론 연설 공간에서도 양방향 소통이 없지는 않다. 박수나 환호성, 구호, 야유와 같은 반응들이다. 하지만 논리적인 지지나 반박은 제한된다. 연설 공간에서 화자는 굳이 논리적일 필요가 없기 때문에 표현의 제약은 상대적으로 덜하다. 거침없이 말해도 괜찮다. 아니, 거침없이 말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연설화법은 극단적으로 흐를 여지가 있다. 선동은 늘 연설 공간에서 시작되었다. --- p.190 민주주의 공동체가 구성원들의 감정 합의를 통해 감정 균형을 지향한다는 것은 이 책의 전제다. 그 살얼음 같은 과정 속에서 감정 합의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주체는 엘리트들이었다. 정치인과 관료, 나아가 학자나 언론인 등이다. 이들은 공동체 구성원들로부터 감정 합의를 위해 복무하도록 ‘위임’받았다. …… 결국, 엘리트들은 실패했다! 독일의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의 말처럼 대중은 정당이 운영하는 은행에 자신들의 감정을 맡겼지만 ― 슬로터다이크는 구체적으로 ‘분노’라는 감정을 맡겼다고 표현했다 ― 정작 정당을 비롯한 엘리트들은 그 예금을 탕진하고 말았던 것이다! 공동체 도처에서 혐오가 창궐할 때까지. 그 틈새를 비집고 나온 이들이 포퓰리스트다. 공동체 감정을 존중하는 자신들이 진정한 민주주의자라고 외치며. --- p.245~246 민주주의 공동체 내에서 혐오 담론이 불거지지 않았던 이유는 도덕과 윤리와 같은 민주주의 원칙 덕분이라기보다는 감정 협의와 합의의 과정을 통해 감정 균형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작업이 비교적 잘 굴러왔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공동체 곳곳에 잠재된 부정적인 감정이 공론장에 올라오지 않도록 하는 자정작용이 순조로웠다. 이러한 순조로움에는 여러 조건이 있다. 경제·사회·문화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이 덜 도드라지는 환경이거나, 감정 협의와 합의의 업무가 잘 수행되도록 공론장이 잘 마련되어 있거나, 협의와 합의 업무를 위임받은 자들이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시대, 그 순조로움을 보장하는 조건들이 마모되기 시작했다. --- p.251~2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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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혁명 이후 민주주의
자부심 넘쳤던 영광의 기억과 동시에 펼쳐진 뒤안길 우리 시대 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2016년의 촛불은 정치 민주화 그 이상의 지점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권력에 기생했던 재벌과 관료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폭로되면서 우리 공동체 민주주의가 질적으로도 발전해야 함을 되뇌었다. 수많은 지식인은 민주주의에 빨간불이 켜졌다며 위기론을 꺼내들고 있다. 아니, ‘위기’가 아니라 ‘후퇴’하고 있다는 비관론에 가까웠다. 민주주의 이론의 석학 래리 다이아몬드(Larry Diamond)는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를 민주주의의 ‘불황’이라고 표현했다. 민주주의의 불황은 장기화되고 있고, 심지어 개선이 어려울 정도라는 비관론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다양한 원인이 존재하겠지만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혐오라는 정동(情動)을 위시한 공동체 ‘감정의 위기’다. 이 책이 혐오를 심각한 문제로 규정하는 것은 단순히 타자에게 상처가 되기 때문에, 혹은 사회 통합을 저해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혹은 혐오가 도덕적·윤리적 관점에서 그릇된 감정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다. 정치적 감정으로서의 혐오는 관용에 맞서고, 심지어 전복하려 들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다. 저자는 “이유는 됐고, 그냥 싫다”는 말은 소통을 차단하는 절대적 표현에 가깝고, 이는 우리의 사유를 정지시킨다고 말한다. 그는 가해와 피해라는 도식 그 이상으로, 혐오는 공동체에 어떤 감정적 위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격렬하게 보여주는 신호라고 주장한다. 또한 저자는 혐오에 편승해 대중의 지지를 얻는 ‘포퓰리즘’은 혐오가 제도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말한다. 현대적 의미의 포퓰리즘은 혐오 감정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이다. 혐오가 포퓰리즘으로 연결되는 흐름은 다음과 같다. ‘타자에 대한 적개심을 정치의 핵심으로 상정한다. 시선을 높여 엘리트나 기득권층을 향해 분개하는 동시에, 시선을 낮춰 힘없는 타자들을 공격한다. 그렇게 힘을 얻은 포퓰리스트들은 타자를 증오하는 대중의 거친 무의식을 날것 그대로 정책에 반영하려 한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고도로 발달됐다고 평가받는 미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2016년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된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는 이민자들이 똥통(shithole) 국가에서 왔다고 말하고, 멕시코 이민자의 유입을 막기 위해 긴 장벽을 쌓겠다고 공언했다. 발전된 민주주의 법률과 제도들은 그의 기행을 막지 못했다. 그는 재선에 실패했지만, 트럼프를 위시한 혐오와 배제의 구호들은 2020년 선거에서도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감정 민주화』에서는 이것을 또 다른 형질의 민주주의라고 칭한다. 포퓰리즘은 대중의 감정선을 중요한 정치 요소로 둔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다수성(多數性)’과 맞닿아 있다고 본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며 관용적이라 알려진 민주주의 공동체 구성원들이 혐오가 공동체를 위해 필요한 규범이라고 믿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혐오는 민주적으로 지지받고 있다. 혐오에 의탁한 규범과 제도가 되레 민주주의에 부합한다는 착시까지 만들어내면서. 『포퓰리즘의 세계화(Populist explosion)』의 저자 존 주디스(John Judis)의 말처럼, 포퓰리즘은 기성 민주주의가 그 한계에 직면하며 표준적 세계관이 고장났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공동체는 혐오하는 사람들을 ‘극우’라고 부르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지금의 혐오 현상은 그 문양이 변하고 있다. 히스패닉(hispanic)과 이슬람에 대한 반감을 지지대 삼아 미국 대통령이 된 도널드 트럼프의 사례는 혐오와 진영 논리의 상관성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트럼프의 당선을 견인했던 것은 평소 민주당 지지 기반이었던 백인 블루칼라였다. 우리 공동체 역시 예외는 아니다.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조차 동성애자를 싫어하고, 제주도에 입국한 예멘 난민에 대해 불편해하며, 페미니즘을 거부한다. 반대로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규정했던 어떤 이들은 예멘 난민 추방에 선봉에 서기도 했다. 혐오 담론은 이렇게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형태로 나타난다. 이 책의 저자는 선과 악의 이분법을 떠나 현실을 냉철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촛불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한 역사적 자부심이 큰 우리가, 사주의 갑질에 대해 거리에 나서 당당히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우리가, 정치 민주화에서 ‘경제 민주화’와 ‘일상 민주화’의 첫발을 내디뎠던 우리가, 혐오라는 정동 앞에서 쉽게 흔들리고 동조하며 심지어 조력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시대가 민주주의를 진지하게 재구성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감’과 ‘소통’으로 해법을 모색하다 이 시대 민주주의의 위기는 결국 감정 민주화로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논지다. 감정의 위기는 감정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설명하며, 감정 민주화를 위한 가장 핵심적인 감정적 자질로 ‘공감(共感)’을 제시한다. 저자는 ‘공감’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진부한 감정어가 부정적인 감정이 부유하는 작금의 위기에 근원적 대안이 될 수는 없지만 혐오의 악순환 그 어디쯤을 단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_ 256쪽 그렇다면, 이 책에서 지향하는 공감이란 무엇인가. 감정 민주화의 대안으로 말하고 싶은 공감은 나 자신, 내가 속한 우리,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불완전함’을 당당히 인정하는 감정이다. 불완전함을 당당히 인정할 때 공감은 공감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사람들의 주장처럼 한쪽에만 맞춰지지 않는다. 편협한 공감 능력을 가진 이는 이주민을 혐오하는 누군가에게 공감할 수 있지만, 감정 민주화의 대안으로서의 공감 능력을 가진 이는 이주민의 불완전함과 동시에 우리의 불안전함을 모두 인정하는 시선을 가질 것이라고, 저자는 믿는다. 나와 우리, 공동체의 불완전함을 당당히 인정하는 공감은 ‘다름’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 타자가, 타자가 속한 공동체가 불완전하다는 것 역시 감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이 완벽하지 않듯 우리도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은 혐오를 지속적인 소통으로 극복한 선례도 소개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이방인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미국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히스패닉 비율이 40%에 달하고, 미국 미등록 외국인의 4분의 1이 캘리포니아에서 일하고 있다. 반면, 이민자나 미등록 외국인, 난민들에게 상대적으로 관대한 지역으로 통한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캘리포니아 역시 이방인에 대한 반감은 매우 거셌다. 당시 피트 윌슨(Pete Wilson) 주지사는 반감에 편승해 지지를 얻었다. 혐오는 금세 제도화되었다. 주민투표로 ‘법안 187’이 통과되었다. 미등록 외국인의 자녀는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게 했고 응급조치가 필요한 상황에서도 의료 조치를 금지했던 매우 강력한 법이었다. 이후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이방인과 공존하는 법을 학습해 나갔다. 캘리포니아는 2000년대 들어 미국에서 가장 관용적인 지역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민자를 차별했던 법을 폐지하는 데 주민들이 앞장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