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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譯註叢書를 발간하면서 凡 例 參考書目 歐陽文忠公五代史抄 卷1901. 錢?世家 錢?의 世家 / 1302. 劉旻世家 劉旻의 世家 / 35 歐陽文忠公五代史抄 卷2001. 四夷附錄 사이부록 / 53 歐陽文忠公新唐書抄 卷上01. 兵志 병지 / 10502. 刑法志 형법지 / 164 歐陽文忠公新唐書抄 卷下01. 禮樂志論 예악지에 관한 論 / 20102. 曆志論 역지에 관한 論 / 21003. 五行志論 오행지에 관한 論 / 21404. 地理志論 지리지에 관한 論 / 22005. 食貨志論 식화지에 관한 論 / 22606. 百官志 백관지 / 22907. 藝文志論 예문지에 관한 論 / 238 [附錄]1. 先公事跡 先公의 事跡 / 2432. 廬陵歐陽文忠公年譜 여릉 구양 문충공의 연보 / 3023. 謚議 시호에 대한 의론 / 3404. 祭文(韓琦) 제문(한기) / 3455. 祭文(曾鞏) 제문(증공) / 3506. 參考圖版 目錄 및 出處 / 3547. ≪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 總目次 /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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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에 못지않은 『신오대사』와 『신당서』 구양수는 지방관 시절에 『신오대사』를 편찬하고 조정에 나아가 『신당서』를 편찬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抄』를 편찬한 모곤茅坤은 구양수의 역사서가 사마천의 『사기』에 못지않다 여기고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세상에서 구양자歐陽子 저술의 전모를 보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 책 외에 내가 비주批注한 『당서唐書』와 『오대사五代史』를 합하여 보아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처럼 다방면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일찍이 조정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구양수처럼 뛰어난 사람을 어디에서 얻겠는가.”라고 했을 정도이다. 구양수, 하늘이 내린 기재奇才북송北宋 시대에는 뛰어난 문인들이 많이 나왔다. 그중 구양수歐陽脩는 정치, 문학, 역사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정치적으로 뛰어난 인물들을 발탁하는 데도 힘썼는데, 그가 발탁한 인물로 소식蘇軾·소철蘇轍 형제, 증공曾鞏 등이 있으며, 소순蘇洵과 왕안석王安石을 천거하기도 하였다. 포청천包靑天으로 널리 알려진 포증包拯의 뒤를 이어 당시 송나라 수도인 개봉부開封府를 다스려 모든 일을 순리대로 처결하였다. 어떤 사람이 왜 포증처럼 위엄을 내세워 정사를 행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사람의 재주와 성품은 저마다 장단점이 있으니, 실로 잘하는 것을 버리고 못하는 것을 억지로 할 수는 없다.”(『구양문충공본전歐陽文忠公本傳』)라고 대답하였다. 이처럼 그는 주관이 분명한 인물이었다. 이후 그는 중앙의 주요 요직을 역임하였는데, 옳지 못한 사안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간쟁하였다. 이에 영종英宗이 구양수를 칭찬하여 “성품이 강직하여 사람들의 원망을 피하지 않는다.”고 평하였다.고문古文을 일으키다문학에 있어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당唐나라 때의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은 형식미만을 강조한 사육변려문四六騈儷文에 반대하여 진한秦漢 이전의 고문古文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 유가사상을 바탕으로 한 간결하고 뜻을 충실히 전달하는 문장을 짓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고문운동의 기세가 점차 약해지면서 다시 변려문이 유행하였다. 그런 와중에 다시 고문을 일으킨 장본인이 바로 구양수였다. 그가 권지공거權知貢擧가 되어 과거科擧 시험에서 변려문보다 고문을 짓는 인물을 발탁함으로써 고문이 유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없었다면 소식蘇軾의 문장이 과연 그만한 명성을 얻을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구양수 역시 명문을 많이 남겼으니 『고문진보古文眞寶』에도 실린 『취옹정기醉翁亭記』나 『붕당론朋黨論』 등이 대표적이다. 많이 보고 많이 짓고 많이 생각하라조선 숙종 때의 문장가인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송나라 문장으로 구양공 같은 분은 비록 느긋하고 평이하며 부드럽고 느슨한 듯하지만, 봉사奉事나 주차奏箚에서 이해利害를 지적하고 사정을 모사摹寫함이 곡진하고 절실해서 사람의 골수에 파고드는 듯하여, 군주가 들으면 마음을 움직여 개오開悟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 서序·기記·비지碑誌·제문祭文 등의 글은 풍신風神이 굳세고 아름다우며 음조音調가 풍일飄逸하고 질탕跌宕하여 잠깐 사이에 감개感慨하고 일창삼탄一唱三歎의 여운이 있어, 왕왕 탄식하며 한숨을 쉬다 숨이 끊어지려는 듯한 곳이 있다."구양수는 문장을 지음에 있어 삼다三多의 원칙을 주장하였다. 즉 많이 보고 많이 짓고 많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나의 평생 문장은 세 가지 위에서 지은 것이 많으니, 말 위와 베게 위와 측간 위에서이다.” 하였다. 이런 각고의 노력이 있었기에 명문장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구양수를 자신의 스승으로 여겼던 소식蘇軾은 구양수의 문장이 집대성集大成을 이루었다 여기고 이렇게 평하였다.“구양자는 대도大道를 논하는 것은 한유韓愈와 같고, 일을 논하는 것은 육지陸贄와 같고, 일을 기록하는 것은 사마천司馬遷과 같고, 시부詩賦는 이백李白과 같으니, 이는 내 말이 아니라 천하 사람들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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