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말 - 작년 여름에 우연히 이 책을 구상했다. 길거리에서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누가 저 구름을 올려다보고 있을까, 어떤 장면을 살아내고 있을까, 나는 느슨하고 어쩌면 조금은 따뜻한 무지에 휩싸인 채, 바로 그 순간 말할 사람이 없다는 마음의 밀도를 느꼈다.
두 계절이 지나서야 문득 ‘지난여름의 구름’이라는 제목의 책을 제안하는 청탁서를 보내게 되었다. 글을 받아본다면, 다른 어느 분의 여름도 나의 것과는 닮지 않았고 내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리라 여겼다. 그런 다름을 소망했다.
구름 같은 인연 속에서 우리가 만난다.
--- p.3, 「기획의 말」 중에서
오랜만에 맑은 주말이라 이불을 빨았다. 이사를 하면서 나는 옥상을 갖게 되었고, 이불을 옥상에 널 수 있게 되었고, 이따금 옥상으로 가 넓은 하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물 먹은 솜이불을 안고 올라가 넓게 펼쳐놓았다. 천천히 넓어지고 가벼워지는 이불을 내버려두고 옥상 문을 닫았다. 그리고 이불이 말라가는 동안 이 글을 썼다. 글을 쓰고 있는 책상 오른쪽으로는 창이 나 있고, 바람이 분다. 커튼이 크게 부풀었다가 창밖으로 빨려 가는 것을 본다. 나는 커튼을, 슬픔을, 마음을 놓아준다.
--- p.18, 「이여경/ 구름공동체」 중에서
구름 씨, 인제에서의 3년 동안 우리는 지금껏 조금이나마 모은 돈을 파먹고 살았고 서로의 꿈과 희망을 파먹고 살았어요.
텃밭으로 말고는 출근하지 않는 우리를 마을 사람들은 의심스러워하다가 내가 글을 쓴다는 D의 말에 이제야 모든 것을 이해하겠다는 듯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수확과 채집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이해의 안간힘을 실은 끄덕임 아니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쿡, 하고 웃음이 나오지만 당시에는 내가 글을 쓴다는 사실과 내가 글을 쓴다는 걸 세상 사람이 알게 할 방편에 대하여 무진 애를 쓰느라 촘촘하게 실망하던 나날이 옆에 있었다.
--- p.27, 「정고요/ 강원도의 구름」 중에서
캄보디아에서 6월 1일 국제 아동의 날은 공휴일이다. 다시 말해 내가 교사로 있는 캄보디아 학교도 쉬는 날이란 소리다.(...) 웃고 떠드는 아이들의 얼굴과 손짓 발짓은 하나같이 물안개 속에서 빛났다. 얘들아, 이런 날이 또 올까. 답은 이미 알고 있기에 물음을 목구멍 깊이 넘겼다.
--- p.42, 「허정수/바라볼게, 사랑한다고」 중에서
창밖을 본다. 비가 온다.
비가 온다. 모데라토의 비. 비는 직선이다. 창문을 타고 직선으로 흘러내린다. 창문에 방이 비친다. 모서리와 모서리. 선반과 서랍. 전등. 달력. 그리고 상반신의 내가 창밖을 보고 있다. 비가 온다. 어둡다. 아카시아의 거뭇한 실루엣이 어렴풋이 움직인다. 하지가 가까워지는데도 종일 밤을 보내고 있는 기분이 든다. 밀린 일기를 정리한다.
--- p.45, 「신해욱/북쪽 창」 중에서
노인이 불쑥 다가오더니 내 손을 잡고 화단 쪽으로 나를 천천히 이끌었다. 그러더니 장미가 몇 개 달려 있는 화분 앞에 멈추어 서서 나의 손목을 놓고 슬그머니 화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곤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장미 하나를 따 강낭콩 모양으로 입을 살짝 벌리고는 그것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웃음기로 둥글어진 두 눈은 입과 함께 하나의 원을 이루고 있었다.
--- p.63, 「류가영/환대」 중에서
#여름 작약
막 첫 시집을 출간한 시인을 축하해주기 위해 꽃집에 들러 작약을 골랐다. 꽃집 주인은 내게 작약 꽃다발을 건네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름 작약은 한 송이만 화병에 꽂아두면 금방 시들어버려요.
서로서로 지탱해주는 힘으로 버티는 꽃이니 여러 송이를 화병에 꽂아두세요.
--- p.77, 「서윤후/여름 앨범」 중에서
온천 명인을 향한 벳푸에서의 일과는 명인의 길답게 단조롭다. 기상. 동네 온천 입욕. 입구 벤치에 앉아 무알코올 맥주. 숙소에서 간단한 요기, 가방에 수건과 무알코올 맥주 세 캔 챙겨 출발. 온천 탐방. 온천 입장. 무알코올 맥주. 점심. 산책. 버스 타고 장거리 온천 방문. 간식과 무알코올 맥주. 체력이 부침. 긴 산책. (...) 2019년 늦봄. 8323대 벳푸 온천 명인이 되었다.
--- p.82, 「선재서/그날의 그늘」 중에서
그렇게 말했다고?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풍경은 스쳐 지나가고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지루하고 아무런 시선도 끌지 못해.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로 남아 있고 보이는 것들은 너와 나한테 약간씩 다르게 기억에 남게 돼.
그걸 또 기쁘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 p.102, 「김가을/미래에 여름은」 중에서
가끔 한강 다리를 걸어서 건널 때가 있다. (...) 한강 다리를 건널 때는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서울에는 이렇게 높은 곳이 많아서 참 다행이라고. 언제든지 결심만 한다면 삶을 끝내버릴 수 있는 기회가 이토록 많으니, (...) 한국 사회에서 예술인으로 산다는 것이 이런 두려움 속에서 사는 일인 줄 알았다면 나는 글 쓰고 공부하는 삶을 택했을까?
--- p.110, 「장은정/서른여섯 번째 여름」 중에서
사람을 만날 때면, 어차피 헤어질 거면 왜 만나야 하지 싶었다. 헤어짐을 인지하고 만나는 것 자체가 이상했지만,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어차피 헤어질 거라면, 굳이 마음을 쓰면서까지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내 옆에 있는 글을 사람보다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겼다.
--- p.127, 「하수호/구름선」 중에서
지난여름을 떠올리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내 등단작 가운데 하나는 지난여름을 생각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시였고, 어쩌면 내 시의 시작은 바로 그 여름의 기억 없음에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 p.132, 「황인찬/지난여름의 통영」 중에서
여름 산문을 쓰려고 여름에 대해 애써 생각하다 보니까, 이상하게 여름이 더 멀게만 느껴졌다.
지난여름 같은 여름, 마스크를 쓰지 않는 여름, 카야가 전혀 없는 여름, 그런 건 다시 오지 않을 거라고 믿게 됐다.
여름은 막다른 길 같고 여름은 겨우 마음 같다. 더 도망칠 데가 없어서 주저앉아 자포자기해야 하는 심정과 같을 뿐, 그것을 넘어서지는 못하는 마음. 그냥 거기까지인 마음.
여름을 통과하려면 헐벗은 것들과 회우해야 하고 탄생에 대해 골머리를 앓아야 한다.
--- p.145, 「배시은/카야가 전혀 없는 여름」 중에서
10.
어느 해 여름에 한번은 공원에서 무심코 장미꽃잎을 하나 뜯어 엄지와 검지로 비볐는데, 이상하게도 피 냄새 같은 것이 났다. 그 순간 갑자기 작은 공원은 광대무변해졌고, 공원 한끝에 있던 내가 입구까지 가려면 한세월을 보내야 할 것 같았다. 마치 무한의 정원처럼. 에워싸는 세계의 광활함이 느껴지고 손가락 끝이 생생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 p.164, 「조원규/장미의 벼락 속에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