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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왕

나의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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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6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240쪽 | 262g | 128*188*15mm
ISBN13 9788932921112
ISBN10 8932921113

카드 뉴스로 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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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떨어지고 또 떨어졌다.

비비안은 그렇게 바람 속에서 튀어나왔고, 우리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바위 뒤편에, 안전하게, 자리를 잡았다. 비비안을 다시 보게 되어 기뻤지만 할 말이 너무나 많은 탓인지 얼른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비비안은 왼쪽 눈 주위에 시꺼멓게 멍이 들어 있었다. 왼쪽, 그러니까 내 신발 밑창이 조금 너덜거리는 쪽이었다. 다행히 나는 짝이 잘 맞는 멀쩡한 신발을 신고 집을 떠났다.
「너희 아빠가 그랬어?」 내가 물었다.
계집아이는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비비안은 도대체 왜 그렇게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 했다. 가장 최근에 한쪽 눈가에 멍이 든 건 아빠한테서 맞았을 때였거든. 부모는 자식한테 자주 그러지 않느냐고 내가 되물었다.
「아니, 우리 아빠는 아니야. 나 혼자 이렇게 만든 거야.」
그걸로 벌써 충분한 설명이었지만, 비비안은 계속 말을 이었다.
「한번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었거든. 그래서 내가 주먹 한 방 먹여 봤어.」
논리적이었으므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비안은 내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풀밭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만일 주먹으로 나를 한 대 치라고 하면, 그렇게 할래?」
「네가 원한다면야.」
「좋아. 그럼, 해봐. 한 방 먹여 보라니까.」
나는 비비안 맞은편에 무릎을 꿇고 앉아 주먹을 꽉 쥐었다. 비비안은 두 눈을 감았지만, 나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상하게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원하는 걸 해주고 싶었지만, 꼭 비비안이 감은 눈꺼풀 너머로 나를 쳐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비비안은 눈은 뜨지 않은 채 배시시 미소 지었다.
「난 벌써 알고 있었어. 넌 감히 네 여왕님을 향해 손을 치켜들지 못해.」
--- p.59

「넌 이제 뭐 할 거야?」 비비안이 뜬금없이 물었다.
나는 계속해서 우적우적 빵만 씹었는데, 왜냐하면 그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명 뭔가가 빠진 질문인데, 그럴 때는 못 들은 척하는 게 상책이었다. 물론 비비안이야 모든 걸 보고, 모든 걸 다 알고 있는지라, 나를 조금 세게 밀치더니 화가 난 사람처럼 똑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넌 이제 뭐 할 거야?」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비비안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질문의 나머지 부분, 분명 빠져 있는 부분, 다른 사람들은 다 알지만 나만 모르는 그 부분을 생각해 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비비안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조금 부드러운 투로 말했다.
「넌 내가 없으면 뭘 할 거냐고?」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만하면 훨씬 분명하니까. 그래서 나는 비비안에게 넌 내내 여기 있을 테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대답했다. 그 아이의 눈이 나를 나무라는 듯했다.
「아니, 셸. 난 언제까지고 여기 있지 않아. 넌 혼자 여기에 있을 수 없고.」
「아니, 난 혼자 있을 수 있어.」
「〈지금〉이야 그렇지. 왜냐하면 내가 너한테 먹을 것도 가져다주고 또 여름이니까. 넌 여기 겨울이 어떤지 알아?」
나는 겨울이 어떤 건지 잘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겨울은 흰색이고 회색이고 검은색이며 기분 좋은 연기 냄새가 난다고, 겨울은 거짓말의 계절이고, 주유 손잡이는 뜨거우니까 조심하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손가락을 꽁꽁 얼게 만드는 계절, 사람들이 뭘 하겠다고 약속은 하지만 사실은 실내에 있는 게 더 좋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계절이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겨울을 좋아하지만, 아직 겨울이 되려면 기다려야 하니까 지금은 겨울에 대해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 p.92

비비안은 떠났다. 비비안은 우리의 놀이며 웃음, 멋들어진 거짓말, 심지어 영원히 나와 함께 있겠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그런 거짓말까지, 송두리째 다 가져가 버렸다.
--- p.169

우리는 〈참회자〉 위로 올라갔다. 나는 풀잎에 미끄러졌고, 무릎이 까진 게 확실했지만, 비비안이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갔으므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올라가서 비비안을 따라잡았다.
끝까지 올라간 우리는 말없이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사이 비는 그쳤고, 우리 두 사람의 발밑으로는 20미터짜리 허공이 이어졌다. 비비안은 정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잔뜩 움추린 그 아이의 고개는 거의 양 어깨에 파묻힌 것처럼 보였다. 마침내 비비안이 입을 열었다.
「나는 희생 제물이 있어야만 비로소 다시 여왕이 될 수 있어.」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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