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찬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그렇게 중요한 성찬을 제대로 설명하는 책은 드물다. 비그리스도인들은 성찬을 신기하게 여기고, 그리스도인들도 습관적으로 성찬에 참여할 뿐 그 유래와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이 책은 그들 모두를 위한 이상적 책이다. 저자인 톰 라이트는 신약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일 뿐 아니라 독특한 문체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을 지닌 사람이다. 당신은 분명 이 책을 읽고 감동을 받을 것이다.…
이 책은 성찬의 의미를 궁금해하는 사람에게는 명쾌한 설명을, 정기적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에게는 심오한 이해를 안겨 줄 것이다. 학자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 학문적 성과를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모범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다.
--- 마이클 그린의 추천 서문에서
말하자면 식사의 모든 요소 하나하나가 다채로운 방식으로 현재 그들이 누구인지, 과거에 누구였는지, 미래에는 누구일지를 말해 주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속에서 이상한 음악처럼 다가오는 것이 있었다. 과거에 하나님이 이런 분이었고, 현재에 이런 분이며, 미래에 이런 분일 것이라는 사실…한 끼 식사가 그 모든 것을 담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물론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말이 필요하지만, 숨은 뜻을 알고 보니 식사 자체가 모든 의미를 설명하고 있었다. 음식을 함께 먹는 행위도 이스라엘의 이야기, 곧 하나님의 이야기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유대인의 가정생활이 그처럼 특별하고 그들의 식사도 의미심장한 것이다.
--- 2장 중에서
안타깝게도 성찬에서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같이 먹고 마실 때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가 됨을 선포해야 할 그 특별한 식사가 오히려 많은 경우에 분열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신문들은 교회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사건들을 전하기에 바쁘다. 어떤 한심한 목사가 교회 헌금을 유용했다느니, 불륜을 저지르다 현장에서 붙잡혔다느니 말이 많다. 하지만 진짜 불미스러운 사건은 성찬이 기독교 연합의 상징이 아니라 불화의 상징으로 전락해 버린 일이다. 불행하게도 그 배후에는(적어도 서구 사회에서는) 구교와 신교의 분열이 결정적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성도들은 성찬식을 어떻게 거행하는가에 따라 이편저편으로 나뉘었고 이단으로 낙인을 찍기까지 했다. 심지어 성찬을 부르는 명칭에 의해서도 나뉘었다.
--- 7장에서
종교개혁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정치적 변화가 불가피했다. 종교는 사적인 문제가 아니었기에(그것이 18세기의 현실이었다), 종교개혁의 여파는 사회 전역에 영향력을 미쳤다. 어마어마한 사회 문화적 변화가 유럽을 휩쓸었다. 가톨릭과 개신교, ‘미사’와 ‘성찬’의 분리는 지역 사회 간의 뚜렷한 차이를 상징하게 되었다. 양쪽 모두 잘못된 것을 믿었다는 이유로 상대편을 화형에 처했다. 전쟁도 벌어졌다. 이후에는 끔찍하고 거대한 집안싸움이 벌어진 것처럼, 오랜 기간 할 말도 할 일도 없는 듯 보였다. 양쪽 모두 마음이 상했고, 그 잔혹상을 기억했으며, ‘상대’가 1킬로미터를 나오지 않으면 1센티미터도 양보하지 않았다.
--- 8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셨다. 하지만 그 나라는 사람들이 기대했던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나라가 같은 선로 위를 달려와 자신들과 충돌하여 모든 소망을 산산조각 내 버리는 기차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부활절 아침에 다시 살아난 소망은 그 나라가 원래 하나님이 구상하셨던 바로 그 나라임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의 시작이었다. 우리가 모든 것의 시작점이라 여길 수 있는 과거의 지점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해하겠는가? 하나님의 미래가 예수님 안에서 현재로 들어왔고, 그것은 우리 과거의 일부가 되었다.
--- 9장에서
이 모든 사실을 한데 엮으면 결국 성찬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첫째로, 우리 앞에 놓인 음식은 하나님이 미래에 우리를 먹이신다는 것을 상징한다. 둘째로, 우리 앞에 놓인 음식은 예수님이 ‘내 몸’과 ‘내 피’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셋째로, 성령은 현재에 신비한 방법으로 역사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에서 누릴 삶을 기대하게 만드신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성찬(이야기, 드라마, 행위들, 그리고 무엇보다 기도와 사랑)의 모든 행위 속에서, 성찬 음식은 성령의 신비한 역사를 통해 다가올 세상에서 우리를 먹일 그 음식을 진정으로 고대하게 만든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그 음식의 이름은 바로 ‘예수님’이다.
--- 12장에서
성찬이라는 연극은 두 부분으로 나누인 리듬이며 그 안에서 다양한 변화가 가능하다. 첫째 부분은 말씀이고 그다음은 식사다. 즉, 성경을 설명함으로써 마음이 뜨거워지고, 음식을 먹고 마심으로써 주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당신이 어느 교회에 가서 이름도 밝히지 않고 설교만 듣는다 해도 성찬의 떡은 반드시 받고 먹어야 한다.
--- 13장에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호소하면서 이 책을 맺겠다. 초대교회의 첫 세대부터 식사를 함께하는 행위는 다른 부류의 그리스도인들과 벽을 허무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말하자면 유대인과 헬라인(갈 2장), 부유층과 빈곤층(고전 11장) 간의 벽을 허무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정의가 세계 만민에게 뻗어 간다는 상징이었다. 그러한 일로 말썽이 생겨도 바울은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모든 사람을 자신의 식탁에 포함시킨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찬에서의 연합은 일절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전 10:17). 연합을 도모하는 긴 여정의 최종 목표가 다른 교파의 성도들과 성찬을 나누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른 교파의 성도들과 성찬을 나누는 것은 연합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하고 있는 일,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서 더 견고하게 연합하게 하는 그런 일이 되어야 한다.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분명 그 말에 동의했을 것이다.
--- 15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