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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에서 밀크티를 마시다 (큰글씨책)

안나푸르나에서 밀크티를 마시다 (큰글씨책)

: 하염없이 재밌고 쓸데없이 친절한 안나푸르나 일주 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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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6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352쪽 | 210*297mm
ISBN13 9791191382877
ISBN10 1191382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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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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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하루만 새 포터를 기다렸다가 모레부터 다시 트레킹을 하면 된다. 내게 시간은 충분하지 않은가. 별 문제 없다. 다만 빔이 의도적으로 나를 속인 건 괘씸했다. 그의 거짓말이 내 즐거움을 짓밟아서 화가 났다. 정말 그깟 돈 때문에 이 사달이 벌어졌을까.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면,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내가 불쌍하고
만약 그의 말이 거짓이면, 의심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내가 불쌍했다.
이래저래 나만 손해였다. 트레킹 끝나면 여행사에 가서 따져야겠다고 다짐했다.
밤이 깊도록 사건 정리 . 정황 검토 진실 재구성 불만사항 항목별 정리 분노 마음 진정 원망의 사이클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생각의 무간지옥에 갇힌 나는 괴로움에 오랫동안 뒤척였다.
--- p.77 「4. 고양이가 알 낳을 노릇이다」 중에서

“스와르가 다와르.”
맹숭맹숭해 보이는 거대한 산이 동네 뒷산처럼 푸근하게 서 있다. 보기와 달리 이 산의 높이는 5,000m에 육박한다. 보디빌더 같은 산이다. 탱탱하고 우람하다.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처럼 비현실적이지 않고 마동석처럼 친근하다. 산이 이렇게 다양한 모습을 가졌다는 걸 왜 30여 년간 몰랐을까. 산이 많은 대한민국에서 나는 무엇을 보고 있었던 걸까. 하긴 트레킹 전에는 등산도 몇 번 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지금 안나푸르나에 와 있으니 이것 참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 p.101 「6. 화가 복이 된다」 중에서

집중하려는 일련의 의식적인 노력 없이 나는 먹고 자고 걷는 그 순간에 몰입했다. 어제도 내일도 사라졌다. 말 그대로 나는 현재를, 그 순간을 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저녁에 목적지에 도착하면 오늘 걸어온 길이 생각나지 않았다. 억지로 기억을 짜내야 겨우 지나온 길이 그려졌다. 마치 지금, 여기만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나간 것과 다가올 것이 죄다 사라져버린 느낌이랄까. 내 평생 이런 삶의 충만함을, 현재를 오롯이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트레킹의 묘미는, 멋진 풍경을 보고 평소에 안 쓰던 다리를 호되게 쓰며 모험담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늘 시간에 쫓겨 살던 내가 더 이상 시간을 의식하지 않게 되는, 새로운 관계설정 말이다. 시간이 멈추니, 나라는 존재가 더 명확하게 다가온다.
--- p.123 「7. 태산을 넘으면 평지를 본다」 중에서

오늘도 나는 방귀대장 뿡뿡이. 얼렁뚱땅 지은 건물이기에 방음이 안 된다. 층간소음보다 벽간소음이 신경 쓰였다. 내 바로 옆방은 미국인 트레커가 사용했다. 변은 안 나오고 가스는 가득 차고. 잠 못 드는 밤 나는 슬리핑백 속에서 쉬지 않고 가스를 배출했다. 다행히 미국인 트레커는 엄청난 굉음으로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어쩌면 저렇게 잘 자는지 복이다 싶다. 덕분에 나의 가스 배출은 완전범죄가 되었다. 부룩부룩. 미국인은 고장난 자동차를 타고 달리는 꿈을 꾸고 있으려나.
--- p.153 「9. 2월에 김칫독 터진다」 중에서

아침을 먹고 숙소를 나섰다. 오늘은 포카라까지 걸어서 간다. 림부와 나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걷기 시작했다.
오늘 나는 트레킹을 끝내고, 그는 노동을 끝낸다. 나는 핫 샤워와 맥주와 스테이크가 있는 포카라 레이크사이드로 가고, 그는 가정으로 돌아간다. 숙소를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림부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찌아, 찌아는 담푸스를 거쳐서 포카라로 가자고 했잖아. 그러면 두 시간 정도 더 걸려. 그냥 포카라로 바로 가는 게 어때?”
담푸스를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강력한 의사가 묻어나는 말투였다. 조금 아쉽기는 했다. 기회가 있을 때 부지런히 다녀야 하지만 나 역시 빨리 포카라로 가서 쉬고 싶은 데다가 멋진 일출을 두 번이나 보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가 아픈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싫다고 담푸스에 무조건 가야겠다고 하면 그는 군말 없이 내 결정에 따를 것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오케이, 곧장 갑시다. 포카라로.”
「19. 씨를 뿌리면 거두기 마련이다」 중에서
--- pp.305~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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