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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표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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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준 유고 산문

김희준 | 난다 | 2021년 07월 24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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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7월 24일
쪽수, 무게, 크기 164쪽 | 236g | 130*224*10mm
ISBN13 9791188862993
ISBN10 1188862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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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별은 멸종 위기에 처했다. 유성우를 봤다든가 소원을 빌었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까마득하다. 내가 야광 별을 헤아리다 잠든 세대라고 말해도 좋겠다. 캄캄한 밤하늘을 선물해준 앞 세대를 원망하지 않는다. 나 또한 그러할 것이므로.

행성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린 건 아홉 살에 본 그림책이 인상 깊어서다. 기회가 된다면 빼지 않고 달로 갈 작정이다. 내 왼쪽 골반에는 점이 빼곡하다. 엄마는 그걸 은하수라 불러주었다. 자신은 어느 추방당한 별의 지느러미거나 파란 피를 가진 외계인이라는 말을 겨울밤 귤 까먹듯 들려주었다. 내 몸에는 은하가 흐르고 유전자에는 외계가 섞여 있다. 운명론을 맹신하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내가 별을 이야기하는 건 운명인 셈이다. 부디 별자리를 길들이는 시간을 즐겨주시길.
--- p.7, 「시작하는 말」 중에서

누군가가 대신 울어준다는 건 근사하지만 부끄러운 일이야. 나는 지금도 곧잘 울어. 하지만 울지 않은 척하지. 얼마나 많은 새가 당신을 위해 울어주겠어. 내게도 그런 아름다운 행성이 있었다고 해. 아주 오래된 일이라 까마득하긴 하지만. 봄이면 우리 행성에서 당신이 가장 빛났다지. 계절의 시작이자 우주가 깨어나는 시기에 당신은 천체의 가이드가 되기도 하고 여행자에게 나침반 역할을 했었다지. 말하자면 선구자였던 셈이지.
--- p.18, 「우주 미아가 될 당신을 위하여,」 중에서

쪽지를 몇 개 잡는다. 이해되지 않던 감정이 이해되는 순간이 있다. 그러나 이유 모를 감정이 함께 번진다. 조금 울어도 누군가 용서해줄 것 같다. 양지바른 언덕에 쪽지를 심는다. 글자는 곧바로 색을 내며 나무가 된다. 전하지 못한 감정을 대변하는 쪽지의 행성. 땅에 닿자마자 숨을 갖는 신비로운 언어들. 발신자가 만들어낸 추상명사가 자라는 땅. 그리하여 당신에게 당도하지 못한 편지가 쏟아지고 있다.
--- p.55, 「은하를 건너는 밀서와 쏟아지는 알타이르의 새」 중에서

모성으로 돌아가면 당신의 등을 밀어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건너온 행성과 만났던 생물을 나열하여 당신에게 보여야겠다. 그러려면 많은 밤을 써야겠다. 그네를 타며 안아본 당신의 허상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일지를 쓴다. 하얗게 흔들리는 밤과 발버둥치는 생의 곡진함을 그리고 기약과 거리가 먼 마른 등을 밀어주는 당신을,
--- p.88~89, 「바람개비 은하에 잘린 외로운 도형」 중에서

거짓말에 대해 생각한다. 연인을 앗아간 말, 흰 날개와 말을 잃은 새, 세상에서 영영 사라진 이름, 그리고 여름방학. 베개에 얼굴을 묻은 밤을 떠올린다. 사소한 거짓이 어지럽게 떠돌던 행성을 이불 사이에 깔아두던 그때가 생생하다. 어둠에 묻힌 얼굴이 많아질수록 거짓 행성에서 날아온 말이 발화하는 오후는 뜨겁다. 일기에 날씨를 적는 걸 깜박했다. 그보다 그날 내가 얻은 캐러멜 주머니에 대해 정확하게 적혀 있다. 하얀 민소매에 속옷을 입고 맘보를 추는 그는 솜사탕이 되어 금세 사라졌다. 지구에서 발화되는 추상적인 색깔의 거짓말을 나는 맛있게 까먹었다.
--- p.160, 「자오선을 회전하는 오좌烏座의 낭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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