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타기 위해 도시에 갔다. 가난한 배낭여행자에게 기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잠도 자고, 세수도 하고, 밥도 먹고, 쉬면서 에너지도 충전하는 만능 공간이었다.
혼자 여행은 이 미술관의 전시품처럼 모든 감각을 흔드는 ‘순수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처음 혼자 여행하면 혼돈 속에 던져져 마주치는 모든 것에 예민해진다. 영혼을 잠식하는 초조와 불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혼자라서 모든 감각이 외부로 열리고 깊은 잠에 빠졌던 의식이 슬금슬금 깨어난다. 본능에 따라 보고, 듣고, 체험하는데 무게를 두면서 퇴화했던 예민함을 되찾는다.
한 나라와 도시에 대한 이미지를 수집하는 과정은 자신도 몰랐던 감성을 채굴하는 시간이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모방할지, 비실용적인 정보를 모으며 알아간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한 도시를 상상하게 되고, 이 상상은 적극적으로 체험하는 여행으로 이끈다. 도시에 대해 아무 느낌이 없는데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알겠는가?
“내가 가장 부러운 사람은 처음 여행하는 사람이야. 모든 게 다 처음이니 얼마나 흥분되고 재미있겠어.”
처음은 실수투성이지만 흥분 지수는 최고치이다. 자유여행을 떠날 그대여,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것을 아는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면 먼저 집 밖을 나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낯선 동네에 가서 반나절을 보내보자. 그 동네에 있는 한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셔도 좋고, 그냥 골목을 걸어 다녀도 좋다. 누가 정해주는 게 아니라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보고 조용히 주변을 관찰하고, 자신의 내면을 관찰한 후 어떤 느낌이 드는지 적어보자. 자신이 휴양형인지 활동형인지 알아낸 후 여행지를 정하도록 하자.
여행 계획이 없어도 구글 지도를 가지고 놀자. 지도 앱에는 별표로 저장하는 기능이 있다. 가고 싶은 도시, 카페, 미술관, 식당, 체험해 보고 싶은 액티비티 등이 생기면 구글 지도의 별표 기능을 이용해 보자. 어디든 상관없다. 별이 쌓일수록 갈 곳이 많아진다. 별표로 저장한 곳에 다 갈 수 없지만, 별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주머니가 두둑해진 것 같다.
영화 속 공간이 특별한 공간으로 남으려면 영화 바깥에서 나만의 이야기를 찾아야 한다. 이 여정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행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관심과 관찰은 대중적이고 진부한 여행지를 특별한 곳으로 만드는 비법이다. 다른 사람들은 볼 것 없다고 말해도 내게는 특별한 곳으로 거듭나서 혼자만의 비밀을 품고 돌아올 수 있다.
사람의 발길이 적은 곳에서는 예매 전쟁도 필요 없고, 동선을 계산하면서 서둘러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 다른 사람은 모르는 비밀 장소를 간직하는 일은 나만 아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한 도시의 진짜 모습은 여행자가 애정을 담고 바라보는 곳에 있다.
하루에 기차나 버스 타는 시간은 가능하면 5시간을 넘지 않는 게 좋다. 하루 이동 시간 한계를 정해서 움직이자. 일주일 이하의 단기여행자라면 욕심을 비우고 그냥 한 도시에 머물면서 한 도시에 집중하고 거점 도시를 중심으로 근교에 다녀오는 게 정답이다. 서울에 일주일 머무는 여행자라고 가정해 보자. 서울에서 일주일 동안 무엇을 하고 싶은가? 일주일 동안 머물면서 부산에 가고, 강원도에 가고, 제주도에 갈 것인가?
누군가와 같이 여행하는 것은 그의 관심사에 나도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다. 길들이기라면 너무 거창하고, 서로의 가치관과 습관이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스민다. 내 여행에서 음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했는데, 동행 덕분에 음식도 여행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반면에 동행은 골목 걷기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유명 관광지에서 더 흥이 나는 사람이었고, 나는 이름 없는 골목을 누빌 때 생기가 도는 사람이었다. 동행은 나 때문에 많이 걷고 관광지가 아닌 골목을 누볐다. 낯선 골목에서 동행이 곁에 있어서 든든했다. 길을 헤매면 동행과 나는 머리를 맞대고 지도를 보았다. 함께 여행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교집합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여행에서 동행과 겪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도 연애와 비슷한 특징이 있다. 여행 동행으로 만난 두 사람은 낯선 도시에서 서로 믿고 의지하는 가장 친밀해야 하는 조건부 관계이다. 여행이란 공통분모를 가지고 만났다. 서로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살았고, 다른 습관과 다른 세계관을 가졌다. 두 사람은 갈등을 피하려고 조심한다. 며칠 동안 자신의 본성(?)을 누르고 배려하고 양보하면 미묘한 기운이 둘 사이에 흐르곤 한다. 특별히 무슨 사건이 있어서가 아니다. 서로 상대를 ‘배려’한다고 생각해서 억누른 자아가 소리친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걸어서 여행하며 보고, 느낀 자연을 묘사했다. 워즈워스는 여행 중에 사람을 만나서 인사를 나누고 사람들과 허물없이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하면 외로운 길이 학교가 된다고 했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건넬 수 있는 것도 여행의 힘이다.
여행은 준비할 때부터 시작된다. 여행 준비기는 프롤로그나 여행 전(前)일담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여행 준비 중에 보고, 겪고, 느낀 점을 메모하면 된다. 여행 준비는 떠나지 않고 하는 여행이다. 떠나지 않는 게 여행이라니? 여행은 떠나는 게 핵심 아닌가? 맞다. 실제로 떠나지 않고 마음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커피 중독자가 다른 맛이 나는 커피를 찾아 헤매는 것처럼, 여행 중독자는 내밀하게 숨겨진 의미를 찾아 헤맨다. 다른 사람이 가지 않은 곳, 다른 사람이 별로라고 말해도 시간을 들여서 직접 본 후 즐거워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한다. 유명 관광지가 뿜어내는 인공미에 심드렁했다가 골목의 허름한 벽에 비치는 오후의 빛 그림자에 마음이 들뜨곤 한다.
11월에도 30도가 넘는 하노이에서 시원한 맥주가 어울리는 시간이란 따로 없다. 시원한 맥주는 아무 때나 옳았다. 서울에서라면 일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나는 목적 없이 어슬렁거린 후 맥주 한 잔을 앞에 두고 한가롭게 거리를 내려다보는 이방인이었다. 바쁘게 오가는 차량과 아무 관련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에 배시시 웃음이 났다. 파란 하늘에 떠 있는 커다란 뭉게구름을 보고 또 보았다. 일상에 푹 잠겨있던 온몸의 세포들이 하나씩 깨어났다.
해를 마주하고 올라갈 때 안 보였던 풍경이 해를 등지고 내려오니 보였다. 그 순간 내가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잊고 멈춰 서서 햇빛으로 넘실거리는 거리를 바라보았다. 스마트폰에 곧 사라질, 단 한 번밖에 없는 아름다운 순간을 담았다. 이 사진을 보면 그날의 기분이, 뚜껑을 꼭 닫아두었던 기억 상자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짧지 않은 여행으로 차곡차곡 쌓인 피로를 이기며 낯선 도시의 골목길을 헤매었던 날. 낯선 곳에서 길을 잃었다는 생각에 영혼이 잠식되려는 순간, 별것 없지만 특별한 풍경의 맛을 찾아내고 다시 걸어갈 힘을 얻었다.
쾰른역과 유스호스텔을 찾아서 헤매는 사이에도 여행은 계속되었다. 헤매고, 돌아서, 쉬었다 목적지에 간다고 해서 여행이 중단되는 것이 아니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사이 시간’도 여행이었다.
다른 나라로 여행 가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시스템에서 당연하지 않은 시스템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나라 간 이동, 도시 간 이동은 낯선 시스템 속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다.
여유는 있는 사람에게는 항상 있고, 없는 사람에게는 절대 찾아오지 않는다. 여유란 넉넉해서 남는 상태인데, ‘넉넉함’은 객관적 숫자가 아니라 심리적 상태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넉넉한데, 어떤 사람은 왜 그렇지 못할까?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