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출간일 | 2000년 02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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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03쪽 | 153*224*30mm |
ISBN13 | 9788982812668 |
ISBN10 | 8982812660 |
출간일 | 2000년 02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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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03쪽 | 153*224*30mm |
ISBN13 | 9788982812668 |
ISBN10 | 8982812660 |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장점은 우리 문단에서는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운 상상력, 묘사력, 분석력의 직관적 통합에 있다. 숲의 형제단이라 일컫는 소설속의 인물들은 다양한 이력만큼이나 특이하고 흥미롭다. 또한 신화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복원하고 있는 이 소설의 강점중의 하나는 자연의 생명력과 삶의 깊이를 묘사하는 문장의 아름다움에 있다. |
1. 에피쿠로스의 정원 2. 숲의 형제단 3. 숲의 왕 4. 신성한 숲 * 심사평 - 김화영, 오정희, 윤흥길 * 인터뷰 - 김수이(문학평론가) * 수상소감 |
어디서 읽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어떤 인디언 추장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우리도 사냥을 하지만 재미로 사냥하지 않는다. 우리는 짐승을 잡고 나면 털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먹는다. 그게 우리에게 소중한 음식을 제공한 짐승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이다.
제목만 봐도 딱 견적이 나온다. 숲에 관한 책이다. 그리고 왕도 나온다.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다분히 현학적인 내용과 긴장감 없는 사건의 진행이 아쉽다. 중간 부분부터는 소설을 읽고 있는지 인문 서적을 읽고 있는지 분간이 잘 가지 않을 정도로 인용 된 문구가 많았다. 작가는 어떤 텍스트를 읽고 새롭게 다른 텍스트를 창조해내는 직업이다. 그런 점에서 김 영래 작가는 작가로서 실격이다. 어디에서 인용되었던, 어디에서 보았던 간에 작가는 자기 것인 척해야 한다. 세상을 보고 그것을 작가 내면에서 발효시켜 쏟아 내야한다. 계속해서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숲의 고결함을 해치는 적들에 대해 숲을 지켜가는 사건의 전개가 너무 약했다. 오히려 숲에 관한 신화와 전설을 너무 많이 인용해 긴장감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그리고 등장 인물들의 우화식 이름은 어색하기까지 했다. 너무 직접적으로 숲의 소중함을 말하지 않았나 싶다. 조금 더 숨겼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치밀한 묘사력은 가히 천부적이다. 중간에 나오는 불에대한 묘사는 정말 아름다웠다. 소설가보다는 오히려 시인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우와아앙. 제목이 간지나서 사놓고 보지를 않던 책이다. 솔직히 말해서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이라 어느정도 퀄리티는 이미 보장되었다고 보는게 옳다. 달의 바다가 그랬고, 캐비닛도 그랬다. 재밌었다. 돈이 아깝지 않은 것. 적어도 영화 두편 보는 맛은 있었다. 아, 영화를 깎아 내리는게 아니다. 책은 혼자 보는 것이고, 거기에 온전히 내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두편의 값어치가 있었다.
사실 제목만 보고는 당연히 뭐더라, 호랑이 이야기인 줄 알았다. 숲에서 왕이면 그게 호랑이지 뭐. 그런데 이건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아니었다. 환경 저널이었다. 그는 환경에 대해 논했고, 이 따위로 사람들이 살아가다간 망해버릴 거라고 외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공감이 되기도 한다. 갈수록 석유는 줄어들고 석탄까지 뽑아쓰고, 오존층은 뚫리고 대기권은 얇아지는데 빙하도 녹아내리고 여전히 투발루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라의 경제를 위해 눈을 가리고, 입을 다물로 귀를 막았다. 환경따위 알게 뭐냐, 뒈져버릴. 지속 가능한 개발은 역시나 탁상공론에 눈 가리고 아웅식의 헛소리다. 주가가 3자리를 달리고 환률이 1500으로 치솟는 이 마당에 환경을 위해서 경제를 천천히 발전시켜야 합니다, 라고 했다간 당장에 내 뺨을 칠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말해야 한다. 환경을 생각해야 한다고.
REX NEMORENSIS. 이 한 줄로 모든 것은 설명 된다. 이제 비폭력 무저항의 순수는 없다. 그리고 합리적 대화도 없다. 개발과 환경은 이제 양립할 수 없는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결국 환경은 제의를 올릴 수 밖에 없다. 꿈꾸는 이상을 위해 그들의 제사장은 한 없이 빌고, 빌고, 또 빈다. 이 세상을 버리고 갈 수 있게. 더 이상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을 원하지 않는다. 환경에 기대어 이 빌어먹을 난개발의 세상을 떠나고 싶은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어머니 대지는 이미 범해지고, 아버지 하늘은 죽었다. 내 부모가 죽었는데 대체 나는 왜 살아가야 하는가. 책은 강하게 외치고 있다. 생명은 위대하다. 자연은 존엄하다. 하지만 대체 왜 빌어먹을 현대인이라는 종자들은 그런 것을 도저히 모르냐는 것이다. 자연을 살려야 한다고 주둥이를 나불대지만 그래놓고 자기 집이 그린벨트로 묶이면 씨발씨발 한다. 그래, 나도 우리 집 보호지역으로 묶이면 씨발거릴 것이다. 나도 속물에 현대인이니까.
모든 자연은 결국 지켜오던 자에게로 돌아간다. 이 세상 석유가 다 떨어지고 더 이상 수억 와트의 전기가 뿜어지지 않을 때, 우린 결국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자연은 자신을 모르는 자에게는 냉혹하다. 냉엄한 자연의 솎아내기 속에서 결국 지켜오던 자들만이 그 분노를 피하게 되고, 인류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럴 때를 대비해서 자연을 사랑하자는 것은 아닌 것같 같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다 죽던지. 전부 자연에 패하던지. 둘 중 하나는 확실히 진실이고 그럴 때를 대비한다면 우린 지속 가능한 발전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안락함과 쾌락을 놓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쾌락주의의 에피쿠로스는 깨달음의 큰 쾌락을 위해 먹고 사는 작은 쾌락들을 희생했다. 우리도 생존이라는 쾌락을 위해 약간의 불필요한 쾌락을 자제해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언젠가 숲의 왕이 나타나 우리를 인도할 지도 모른다. 물론 그전에 이 빌어먹을 인류가 다 망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런데 그 때 우린 당당히
'살려주세요.'
라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 난 그것이 궁금하다.
리뷰 끝.
이러고 싶다.
전쟁터에 오래 머물면 뜻하지 않는 위기 상황에 많이 봉착하게 된다. 그런 삶이 지속되다 보면 습관처럼 생기게 되는 능력이 하나있다. 바로 판독능력이다. 그 판독 능력은 문장이나 문서, 암호의 범주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지형지물을 비롯한 인간에게 까지도 영역이 확장된다. 다시 말해 전쟁터에서 어느 누구에게 의지할 데 없는 한 명의 병사가 자신의 생명을 지켜내기 위해서 자생적으로 만들어 내는 능력이라 할수 있다.
이런 습관은 한 번 생기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맹수가 자신의 새끼를 지키기 위해 항상 민감하게 주변을 경계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옳으리라.
인간에게 위기는 촉수를 민감하게 발달시키는 하나의 도구이다. 불운속에 만들어진 재능이라 할수도 있겠다.
사람은 역시 사람이다 보니 그 사람의 추구하는 바나 성향이 무엇을 통해서든 나타나게 되어있다. 특히 예술을 하는 사람일 경우는 그게 더욱 심하다고 볼 수 있다. 영화나 음악, 문학 모든 장르가 그렇다. 작가의 색채를 배제할 수 없으며 그러다 보면 그 속에서 작가 내면의 인성도 발견할 수 있다.
실제 인간관계에서 사람을 대면하면 실제 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 보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약점을 본인이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포장된 채 드러나게 되므로 감추어진 속내를 밝혀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사람은 위기 상황 즉, 자신의 방어가 느슨해졌을 때 나타나는 현상을 보면 그의 진가를 알 수 있다고 종종 말하기도 한다.
술주정, 도박의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러면 반드시 그런 상황에서만 속내를 뚫어 볼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포장지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훈련되어진 사람들이 있다. 기업으로 치면 인사를 담당하거나 채용을 담당하는 사람이 그런 훈련을 받은 자들이다. 그런데 그런 자들보다 더 냉혹하게 깊은 곳까지 뚫어볼 수 있는 자들도 존재한다. 바로 앞서 말한 전쟁터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장수들이 그렇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를 두고 상황을 판독하는 것에 길들여진 사람은 빠르고 정확하다.
물론 무언가를 꽤뚫어 본다는 것이 좋은 일만은 아니다. 당하는 사람도 기분이 좋을리 없겠지만 가하는 사람도 씁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만큼 가려내고 솎아내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이기에 뛰어난 사교술을 지니고 있음에도 가깝게 두려는 자는 극히 그 수가 드물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발견할 능력이 되지 않아 사람을 곁에 두지 못하는 것 보다 발견할 수 없어 곁에 두지 못하는 자의 심정이 더 고통스러운 법이다.
남자에게 한 번 속은 여자는 남자를 믿지 않는다. 두 번 속은 여자는 남자의 꼼수를 읽어내게 되며, 세 번 속은 여자는 남자를 갖고 놀 수 있다. 갖고 노는 것이 즐거울 일 같지만 그건 달리 말하면 영원히 사랑할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반복되는 비슷한 이치들이다. 전장이 아니라면 계발되지 않을수록 좋은 재능이다.
용병이 제대후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화려한 문장력을 지닌 작가이다. 특히 그 묘사면에서는 발군의 실력이란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이 책의 주제는 쉽게 보아 버릴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다. 환경이라 함이 그렇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무엇인가.
작가의 책속에 등장하는 문구 하나를 인용해 본다.
"한마디로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있는 것을 현학적인 수사로 치장함으로써 초점을 흐려놓았다." 131쪽.
자신의 작품이 그렇다.
260쪽 정도에 해당하는 비교적 짧은 장편임에도 시종 또아리를 틀며 보게된 것은 비단 이런 이유뿐이 아니다. 그 화려한 묘사에 절제가 없다. 그러므로 중반부에 이르면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일 뿐 아니라 이전의 그 화려함도 퇴색해 버리고 만다. 소설은 반드시 완급이란 게 존재 해야 한다. 독자에 대한 배려가 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혼자 즐기려면 작품 발표를 왜 하는 가. 또는 전문가끼리 모여 최고라고 추켜 세우려면 문단 계간지에나 실어놓고 또래집단끼리 감상하고 말 일이다. 화려한 수식어를 동원하여 나같은 독자까지 꼬여내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그래, 속아 넘어간 내가 등신이다.
동급 소설 [캐비닛]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맥도날드가 자신들의 고기를 공급받기 위해 아마존 정글을 밀어내고 있다, 그것은 지구 온난화를 비롯해 각종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너 이 새끼, 지금 햄버거 먹고 있어? 쪽팔리지!라고 비스무레하게 말하고 있다.-생각이 잘 안나서 각색했다.- 숲의 왕 260쪽 보다 캐비닛의 두 줄 문장이 훨씬 가슴에 와 닫는다.
무엇보다 나의 인내심을 극한으로 끌고 갔던 이유는 나의 개인적인 성향으로 말미암아 그렇다. 나는 자신의 주장을 본인의 체험을 바탕으로한 간곡함이 없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그런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의해 온갖 전문가들의 지식을 암기하여 떠벌여대며, 그러므로 나의 말이 옳다, 라고 주장하는 부류를 한심하기 그지없는 눈길로 바라본다. 물론 내게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나는 그런 인간들을 상종하지 않는다. 그런 자를 어느 조직의 장으로 앉혀 놓아 순식간에 그 조직이 와해되는 것을 한 두 번 본게 아니다. 그런 자들은 당연히 고집도 드럽게 쎄다. 논쟁에서 지는 걸 굉장히 쪽팔려 한다. 참 실속없는 군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책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잭의 80%가 남의 얘기를 짜깁기 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차용해서 주장하는 것도 정도껏이어야지 간만에 책보다가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해준 작품이다.
이 나마도 작가의 뛰어난 묘사력을 존중하여 이만큼이나 리뷰를 끄적여 준다.-사실, 분노의 용트림이구나!- 개인적으로 만날 일도 없는 작가이지만 만나더라도 알고 지내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작가 인터뷰를 보고 그렇게 느꼈다.
재미있는 영화를 보자는 제의를 거절하고 읽은 책이건만 결과가 이 모양이라 분노가 더욱 극에 달한다.
쿠오오오오오오오오~~~~!!!!
이 얼마나 공격성이 드러나는 리뷰란 말인가!
(님하 진정 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