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 무엇인가’라는 정체성 문제는 오랜 세월 저의 창작 활동의 중심적인 주제였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저 자신을 몹시 고민하게 만든 문제였으며, 감히 오해를 무릅쓰고 말한다면, 저는 다른 무엇보다 저 자신에게 효과가 있는 약을 발견하고 싶다, 발명하고 싶다는 마음에 이끌려 다양한 소설들을 쓰고 사색을 거듭해왔습니다. 그 까닭은 아무래도 기존의 사고방식으로는 저의 고민을 치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장편도 썼고, 실험적인 단편도 썼습니다. 그런 길을 더듬으며 다다른 것이 ‘분인’이라는 개념입니다.
「프롤로그」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책은 제가 소설에서 전개했던 분인주의의 정수를 간결하고 평이하게 정리해주길 바란다는 독자의 강한 소망에 힘입어 만들어진 책입니다.
소설을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현재 심각한 정체성 위기에 빠져 자기를 긍정할 수 없는, 죽느냐 사느냐는 긴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는 좀처럼 소설과 마주할 여유가 없을 거라는 사정도 이해합니다. 또한 이 고민은 대개 10대 무렵부터 시작되므로 그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작업에도 의의를 느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광범위한 반향을 얻어서 저는 출간 후에 기업 세미나나 학교 현장, 정신의학 학회나 심포지엄, 나아가서는 자살 대책 문제에 몰두하는 비영리 단체의 이벤트 등 다양한 곳으로부터 강연 의뢰를 받았습니다.
현실은 다양하며 개개인의 고민 또한 복잡합니다. 저는 제 소설이 만능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없으며, 분인주의 역시 여러 가지 의문이나 비판을 발판으로 앞으로 더 다듬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게 편안해졌다”고 말씀해주신 분들이 많았다는 점에 저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 「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이 책은 미세한 톱니바퀴가 빈틈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하나의 작은 기계에 비유할 수 있을 만큼 정교하다. 그러나 이 기계는 비슷한 주제를 다루는 다른 책들처럼 위압적이지 않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딪히게 되는 가장 근원적인 고민들을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을 만한 논리로 헤쳐나간다. 그래서 어떤 독자는 ‘이 책에 담겨 있는 논지들은 나 역시도 어렴풋하게나마 다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데, 히라노 게이치로는 단지 분인이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이야기를 더 쉽게 정리했을 뿐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개념을 창안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하나의 새로운 개념은 어떤 사유의 출발점인 것이 아니라 귀결점인 경우가 많다. 우연찮게도 분인이라는 개념을 떠올렸기 때문에 쓰인 책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세공된 사유가 분인이라는 개념의 발명과 함께 결실을 맺으면서 탄생한 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분인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이 책-기계가 내게는 감탄스럽다. 나는 앞으로 다가올 인생의 몇몇 결정적인 순간에 이 책을 다시 펼쳐보게 될 것이라는 확실한 예감을 갖고 있다. 이 책과 더불어 내 안에서 하나의 분인이 탄생했다고 말하면 될까.
물론 이 책이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최종적인 해답을 제시하는 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저자 자신도 그렇게 간주되길 원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도 몇 가지 의문은 남아 있다. 첫째, ‘나’라는 것이 다양한 분인의 집합체라고 할 때, 분인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테니 분인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위계를 갖는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여러 분인 중에서 어떤 특정한 분인일 때 내가 가장 만족스럽다면 그 분인은 결국 ‘진정한 나’로서의 분인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둘째, 이 책의 분인론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레벨에서의 ‘나’만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인식할 수 없는 나로서의 무의식이 나의 여러 분인 밑에서 어떤 근본적인 프로그램으로 작동하면서 분인들의 구조와 비율을 결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라캉(J. Lacan)의 말마따나 내가 인식하고 있는 내 이미지로서의 ‘자아’는 허구일지라도 내가 모르는 무의식의 영역에서 나라는 ‘주체’는 분명한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까? 이런 생각은 결국 ‘진정한 나’라는 것으로 다시 우리를 되돌려놓는 것은 아닐까? …… 이렇게 훌륭한 책-기계는 그것이 작동하는 한 계속 질문을 산출한다. 토론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 「한국어판 발간에 부쳐, 신형철(문학평론가)」 중에서
분인은 모두 ‘진정한 나’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고, 유일무이한 ‘진정한 나’라는 환상에 사로잡힌 까닭에 숱한 고통과 압력을 감내해왔다. 어디에도 실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고 그것을 찾아내야 한다는 끊임없는 부추김에 시달려왔다.
그것이 바로 ‘나’란 무엇인가라는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다.
--- 「1장 ’진정한 나‘는 어디에 있는가」 중에서
누구를 어떻게 사귀느냐에 따라 당신 안의 분인 구성 비율이 변화한다. 그 총체가 당신의 개성이 된다. 10년 전의 당신과 지금의 당신이 다르다면, 그 까닭은 교제하는 사람이 바뀌고 읽는 책이나 사는 장소가 바뀌어서 분인의 구성 비율이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10년 전에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그 당시 애인과의 분인이 지금은 헤어져서 움츠러들고, 그 대신 성격이 전혀 다른 애인과의 분인이 커졌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당신 자신의 성격, 개성에도 변화가 있을 게 틀림없다. 개성이란 절대 날 때부터 타고난, 일생 동안 불변하는 개념이 아니다.
--- 「2장 분인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분인은 타자와의 상호작용에서 생겨난다. 나르시시즘이 거북하고 꺼려지는 이유는 타자를 일절 필요로 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취해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면 주위 사람들은 ‘뭐, 그럼 좋을 대로 해’라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의 분인이 좋다는 사고방식은 반드시 한 번은 타자를 경유한다.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존재가 불가결하다는 역설이야말로 분인주의의 자기 긍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다.
--- 「3장 나와 타자에 대한 재검토」 중에서
사랑이란 상대의 존재가 당신 자신을 사랑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당신의 존재로 말미암아 상대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람과 같이 있을 때의 분인이 좋아서 그 분인으로 좀 더 살고 싶어진다.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그런 분인이 발생하고, 나날이 신선하게 갱신되어간다. 그렇기에 서로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존재이며, 그렇기에 한층 더 상대를 사랑한다. 상대에게 감사한다.
매번 사랑한다고 끊임없이 어필하지 않아도 그러는 와중에 이미 서로의 존재 자체가 함께 가야 할 필연이 되는 것이다.
--- 「4장 사랑·죽음」 중에서
분인(dividual)은 타자와의 관계에서는 오히려 분할 불가능(individual)하다. 좀 더 강한 표현으로 바꿔보자. 개인은 인간을 낱낱으로 분리하는 단위이며, 개인주의는 그러한 사상이다. 분인은 인간을 낱낱으로 분리시키지 않는 단위이며, 분인주의는 그러한 사상이다. 분인주의는 개인을 인종이나 국적이라는 보다 큰 단위로 조잡하게 통합하는 것과는 반대로 단위를 작게 만듦으로써 아주 면밀한 유대를 발견하게 해주는 사상이다.
우리는 마땅히 가까운 사람의 성공을 기뻐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분인을 통해 그 성공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마땅히 가까운 사람의 실패에 따뜻하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실패의 원인은 분인을 통해 우리 자신에게서도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 「5장 ‘나누어짐’을 넘어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