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이의 학비로 쓰였어야 하는 돈이 독일어 교습비 등의 푼돈을 제외하고는 전부 아서의 학비에 들어갔습니다. 여행, 사교, 방해받지 않는 시간, 혼자 쓸 수 있는 공간 등등 누이가 누렸어야 했던 혜택(알고 보면 학업의 필수 요소)에 쓰였어야 하는 돈도 전부 아서의 학비에 들어갔습니다. 아서의 학비는 아무리 열심히 채워 넣어도 금방 비어버리는 돈 통이기도 했지만 대단히 중대한 사실(눈앞의 풍경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워버릴 만큼 중대한 사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보고 있는 풍경은 같아도 우리의 눈에 보이는 풍경은 다른 것입니다. 교회를 비롯한 여러 건물들과 뛰어놀 수 있는 푸른 잔디밭이 있는 저곳, 수도원처럼 보이기도 하는 저곳은 어떤 곳일까요? 귀하에게 저곳은 귀하의 출신 남학교(이튼 아니면 해로)이자 귀하의 출신 대학교(옥스퍼드 아니면 케임브리지)이자 무수한 기억과 무수한 전통이 샘솟는 곳입니다. 하지만 아서의 학비라는 그림자를 통해 저곳을 보게 되는 저희에게 저곳은 교실 공동 책상이자 등굣길의 승합 마차이자 배운 것이 많지는 않지만 병든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 붉은 코의 아가씨이자 어느 정도 자랐을 때부터 옷을 사거나 선물을 하거나 여행하는 데 쓰라고 받는 연간 50파운드의 용돈입니다.
--- p.13
고학력 남성의 딸이 지금 전쟁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생활비를 벌게 됨으로써 가지게 된 공평무사한 영향력뿐입니다. 고학력 남성의 딸에게 생활비를 버는 법을 가르칠 통로가 없어진다면 그 영향력도 없어질 것입니다. 고학력 남성의 딸은 임용되는 법을 배울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임용되지 못한다면 다시 아비나 오라비에게 의지하게 될 것이고, 다시 아비나 오라비에게 의지하게 된다면 다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전쟁에 찬성하게 될 것입니다. 역사도 그 점을 의심의 여지 없이 증언해주는 듯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대학 개축 기금을 담당하는 재무 관리자님에게 1기니를 보내고, 그분더러 알아서 써달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 p.69
파시스트와 나치를 상대로 싸우는 사람들이 언론의 주목을 받는 무장한 남자들뿐이겠습까? 그 독을 다 들이마시면서 그 독충과 싸워야 하는 여성, 아무도 모르게 무기 하나 없이 자기가 일하는 사무실 안에서 싸워야 하는 여성이야말로 파시스트와 나치를 상대로 싸우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싸우다 보면 기력이 쇠하고 정신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 여성에게 우리가 외국 독재자를 무찌를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하는 것보다는 그런 여성이 이 나라에서 독재자를 무찌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습니까? 이 나라의 신문들을 털면, 가장 점잖다는 신문을 털어도, 무슨 요일 신문을 털어도 그 독충의 알이 이렇게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데, 이런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가 다른 나라들을 상대로 자유니 정의니 하는 이상을 떠벌릴 자격이 어디 있겠습니까?
--- p.102
영국의 국법은 우리가 큰 재산을 상속받지 않을 수 있도록 배려해준다. 우리에게 국적이라는 온전한 형태의 오명을 허락해주지 않는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허락해주지 않기를 바라자.) 이어서 우리 오라비들은 필요 불가결하고 대단히 유용한 그것, 분별을 유지하는 데 필요 불가결하고 허영과 에고티즘과 과대망상이라는 현대의 대죄를 막는 데 대단히 유용한 그것(조롱과 비난과 멸시)을 우리에게 앞으로 수백 년 동안 (지난 수백 년 동안과 마찬가지로) 제공할 것이다. 아울러 영국 교회가 우리의 예배 인도를 거부하는 한(앞으로도 계속 거부해주기를!), 그리고 오래된 사립 학교들과 오래된 대학교들이 직책과 혜택을 우리와 나누어 갖기를 거부하는 한, 우리는 (우리 쪽에서는 아무런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그런 직책이나 혜택으로부터 생성되는 특정 의리들을 면제받게 될 것이다. 그 외에도 당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 있으니, 그것은 가정집의 전통들, 이 현재의 뒤에 놓여 있는 그 오랜 기억들이다. 순결(육체적 순결)이 여성이라는 성에게 허락된 무료 수업에서 얼마나 중요한 부분이었나를 우리는 앞의 인용문들에서 알 수 있었다.
--- p.151
아웃사이더는 “‘우리 조국’은 역사를 거의 통틀어 나를 노예 취급했고, 나에게 학교 교육을 포함한 그 어떤 혜택도 허락지 않았다. ‘우리’ 조국은 내가 외국인과 결혼하면 남의 나라가 된다. ‘우리’ 조국은 나에게 나 자신을 지킬 수단을 허락지 않으니, 나는 어쩔 수 없이 해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남들에게 나를 지켜달라고 해야 하는데, 담벼락에 ‘공습 주의’라는 경고문이 쓰여 있을 정도라면 그것이 다 헛된 노력인 것 같다. 당신은 나를 지켜주기 위해 싸운다느니, ‘우리’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싸운다느니 하는데, 우리끼리 냉정하게 과장 없이 말해보자. 당신은 내가 공유할 수 없는 어떤 남성적 본능을 채우기 위해, 내가 과거에 공유한 적도 없고 내가 미래에 공유할 가능성도 없는 어떤 이득을 취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잖은가. 내 본능을 채워주기 위해, 내 안위나 내 조국을 지켜주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잖은가. 여자에게는 조국이 없다. 여자는 조국을 원하지 않는다. 여자의 조국은 전 세계
다.” 이렇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 p.198
저희가 귀하의 전쟁 방지 노력에 도움이 될 최선의 방법은, 귀하가 사용하는 말을 반복하고 귀하가 동원하는 수단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말을 찾아내고 새로운 수단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귀 단체에 가입하는 것이 아니라 귀 단체의 외부에 남아 있으면서 귀 단체의 목적을 위해서 협력하는 것입니다. 귀하와 저희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남녀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이 한 명 한 명 정의와 평등과 자유라는 대원칙에 따라 존중받을 권리”를 천명하는 것입니다.
--- p.258
『3기니』라는 에세이의 탁월함이 문득 감지되기도 한다. 한편으로, 『3기니』의 내용은 당대의 사회적 현실에 매우 강도 높게 밀착되어 있다. 당대 공론장에서 가장 큰 권위를 휘두르고 있는 유력 인사들에 대한 실명 비판, 실명 조롱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3기니』는 울프의 에세이 중에서 가장 현실적인 축에 든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3기니』의 형식은 대단히 복잡 미묘하다. 저널리스트 울프는 평생 수많은 작가의 에세이 작품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에세이 형식을 성찰했고, 작가 울프는 그런 성찰을 바탕으로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스펙트럼의 에세이들을 써내고 펴냈다. 『3기니』는 그런 울프의 에세이 중에서도 가장 실험적인 축에 든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