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출간일 | 2021년 09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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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88쪽 | 710g | 150*220*30mm |
ISBN13 | 9788967359607 |
ISBN10 | 8967359608 |
출간일 | 2021년 09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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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88쪽 | 710g | 150*220*30mm |
ISBN13 | 9788967359607 |
ISBN10 | 8967359608 |
자기애, 나르시시즘, 자기혐오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사회는 오늘날 ‘당신의 자존감’을 만들었는가 우리는 완벽주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 흔히 완벽하다고 인정받는 이상적인 인물의 모습을 떠올리는 일은 어렵지 않다. 아름답고 날씬하며 사회성이 뛰어나고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외향적이고 낙관적이며 부지런하고 셀카를 많이 찍는 자존감 높은 개인주의자. 우리 문화가 ‘완벽한 자아’라고 규정한 이들이다. 텔레비전 속 연예인을 넘어 소셜미디어 속 스타까지 이들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내 모습을 그들과 비교하며 스스로 질타한다. 사회가 전하는 메시지는 이렇다. “누구나 노력하면 원하는 모습이 될 수 있어! 네가 게으르고 부족한 거야.” 하지만 사회가 규정한 완벽한 이 이상적인 자아 모델은 사실 매우 위험하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이 불가능한 환상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 예쁘고 날씬하고 완벽한 몸매를 가져야 하고 동시에 똑똑하고 사교적이기까지 해야 하는 이 빡빡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무리한 성형수술과 다이어트를 감행하고, 미라클 모닝이나 운동 등 자기 계발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스스로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더욱 완벽해지고자 하는 욕망이 무조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문제는 ‘모두가’ 이와 같은 모습이 되어야만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는 것이고, 그 결과 자해, 우울증, 섭식장애를 가져오고 심할 경우 자살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점점 완벽한 사람이 되는 일에 비정상적인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영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 윌 스토는 최근 3년간 자신의 삶에서 네 건의 자살이 있었다고 밝힌다. 한 사람이 자기를 혐오하고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결과를 가져오는 실체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그는 이 책을 썼다. 우리 자아를 침몰하게 하는 이 강력한 힘은 어디에서 오고, 왜 나타나게 된 걸까? 그 굴레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스토는 본격적으로 조사를 시작했다. 먼저 스토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자아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자아의 표면 아래를 파고들어 인간의 자아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추적한다. 다음으로는 우리를 완벽주의자로 만드는 환경, 즉 문화를 살펴본다. 문화는 쉽게 이상적 자아를 규정하고, 영화, 책, 신문, 광고, 텔레비전과 인터넷 등 어디에서나 우리를 공격한다. 이를 통해 많은 사람이 문화적 환경이 요구하는 완벽함에 걸맞아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다. 스토는 먼저 독자들을 고대 그리스로 데려간다. 이어서 기독교의 자아를 위해 수도원으로, 자존감 운동이 한창이던 캘리포니아의 에설런 연구소로, 실리콘밸리로, 나르시시즘과 셀카 세대로 불리는 밀레니얼 세대의 기숙사로 우리를 이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자아의 모습을 대표하는 셀피, 우리는 어쩌다 카메라로 내 모습을 찍게 된 걸까? 이 책은 자아와 자존감에 대한 책이지만, 높은 자존감을 강조하는 수많은 자기계발서와는 완전히 다르다. 높은 자존감이 과연 바람직하기만 한 걸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며 그 과정을 밝혀가는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프로이트부터 높은 자존감을 상징하는 스티브 잡스나 도널드 트럼프 같은 당대의 인물까지 다채롭게 다루며 우리 머릿속 한구석에 자리잡은 높은 자존감의 진실을 파헤친다. 자아와 문화를 탐구하는 여정은 독자들에게 한편으로 충격을 안겨주고 동시에 신선한 시각을 제공할 것이다. |
0. 죽어가는 자아 1. 부족으로서의 자아 2. 완벽할 수 있는 자아 3. 나쁜 자아 4. 착한 자아 5. 특별한 자아 6. 디지털 자아 7. 완벽주의 시대에서 살아남는 법 감사의 말 │ 이 책의 방법론에 대하여 │ 주 │ 옮긴이의 말 │ 찾아보기 |
셀피, 윌 스토 지음, 이현경 옮김, 글항아리 출간(7)
완벽주의 시대에서 살아남는 법
문화를 정의하는 격언 중 하나로, 원한다면 뭐든 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신자유주의적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그저 꿈꾸고, 이 꿈에 마음을 쏟아붓고, 이를 몹시 원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내면화하여 자아의식에 편입시킨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사실 이것은 완벽주의 시대의 본질에 있는 거짓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수많은 불행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겐 한계가 있다. 불완전하다, 그리고 이는 어쩔 수 없다.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우리의 신경 연결은 자궁에서 나올 때 완성된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누구인지의 핵심은 사실상 우리가 무력한 상태인 인생의 초기 단계에 설정된다. 생명 활동, 문화, 경험에 의해서 일부는 선천적으로 또 일부는 환경적으로 만들어진다. 내 성격이 정말로 어떤지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들어서 성격을 바꾸기 위해서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하기 시작할 때쯤에는 모든 것이 대부분 결정돼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절대 변할 수 없고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성장하고 원숙해지며 많은 것을 배우고 더욱 지혜로워지고 노련해진다. 외상적 사건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으며 개인적인 위기에서 회복되면 신경증적인 성격을 나타내는 특징은 사라지게 된다. 우리의 완벽함 모델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충족시키느냐의 상당 부분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신경적 메커니즘에 달려 있으며 우리는 이를 변화시킬 능력이 없다.
이 길고 경이로운 여정에서 내가 깨달은 가장 놀라운 것은 스토리텔링이 부족의 선전 활동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수렵 채집민이었던 조상들의 이기적인 사람과 이타적인 사람들에 대한 소문이 구성원들에게 호되게 얻어맞고 배척당하는 악당이 되기보다는 이타적인 영웅이 되라고 가르침으로써 부족을 지배하는 데 도움이 되었듯이,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메커니즘이 강력한 사회적 압력을 행사한다. 신자유주의적 이야기들은 이상적 자아의 형태가 있다고 은밀하게 우리를 설득한 다음 우리를 위해 이상적 자아를 정의한다. 우리는 이 이야기와 영웅을 내면에 흡수한다. 우리는 우리 부족의 이야기를 우리 이야기로 만든다. 우리는 이를 우리의 소문과 스토리텔링 속에 퍼지도록 하고 이 음모에 무의식적으로 가담한다. 그러고 나서 영웅이 되고자 노력한다. 너무 자주 우리는 실패한다. 바로 그때 위험한 완벽주의적 사고가 촉발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이 게임의 패자라고 판단하게 된다. 우리는 자기혐오를 느낀다. 심지어 이미 자살, 자해, 섭식 장애에 대한 끔찍한 통계에 수치를 더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 것은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문화 속에서 자라났고, 당연히 상당 부분 그 문화가 될 수밖에 없다. 문화의 요구에 완전히 귀를 닫아버릴 수는 없다. 나의 어떤 부분은 항상 내가 친구가 더 많았으면, 더 부자였으면, 더 말랐으면, 더 매력적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하지만 ‘완벽하다’는 것은 어떤 환상이고 부족의 선전이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깊은 위안이 되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완벽함을 위한 전쟁을 막는 것은 단지 첫걸음일 뿐이다. 리틀 교수는 자신을 바꾸지 않고도 우리가 느끼는 방식을 바꾸는 방법을 설명한다. 내가 생각해 낸 방법은 우리가 가진 목표들을 바꾸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만약 자아가 이야기라면,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것은 통제하고 있다는 환상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정말로 통제하지 못한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실제로 모두가 완벽하지 않으며 우리 중 누구도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위안을 얻을 수 있다.
내 연구는 사실 우리가 상당 부분 문화 그 자체임을 암시했다(그렇게 길게 설명했던 모든 것이 문화 이야기였다)
이 책의 저자 윌 스토가 주장하는 그의 말을 따라왔다. 많은 내용이었고 따라가면서 길을 잃기도 했다. 그래서 정리를 하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정리한 것을 읽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내용을 요약하면서 새로운 사실도 확인했다. 뇌량 절제술(뇌 분리 수술)도 그중 하나다. 사진으로 보는 내 모습과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왜 차이가 났는지를 알았을 때의 놀라움이란 지금도 가슴 설렌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 중 하나다. 새로운 것을 접하고, 익히 아는 것을 확인하고. 이 책을 접하는 모든 분들은 우리 뇌가 속이고, 우리 사회가 속인 우리의 자아을 제대로 이해했으면 한다. 우리는 모두 생존 본능을 가지고 있다. 죽기를 원하는 생물은 없다고 확신한다. 그럼에도 자살을 하는 것은 특별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특별하기에 소중한 것이 아니라 특별하기에 이상한 현상인 것이다. 이상한 것을 치유하는 방법은 정확한 현실 인식 위에 터를 잡아야 한다고 믿는다.
정확한 현실 인식은 생존을 위한 필수 요소라고 믿는다. 새로운 정권이 만들 5년을 예측하고, 분석하고 대처하는 것도 이와 같을 것이다. 우리 모든 인간의 행동은 자아가 시킨다고 믿는다. 이 자아가 무의식적이지 않고, 미신도 아니며,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달려가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 책을 상기하라. 우리의 자아는 우리가 그렇게 자랑할 만큼 대단한 것도 아니며, 믿을 만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 긴 글을 읽고, 저 긴 책 ‘셀피’를 읽는 용기를 가지길 희망한다.
셀피, 윌 스토 지음, 이현경 옮김, 글항아리 출간(6)
특별한 자아, 디지털 자아
바스콘셀로스가 지지한 자존감의 가치를 탐구하고 홍보하는 대책위원회는 자존감을 국제적인 대중문화 상품으로 만든 것에 상당한 책임이 있으며 그들의 영향력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그가 약속한 대로 우리를 구원하거나 어떤 사회적 문제들을 개선했다기보다는 극적인 역효과를 낳았다. 그 이유는 그 핵심이 거짓되었기 때문이었다. 1990년 초반 자존감 운동이 광란에 치달을 때 로이는 심리학의 해악에 관한 책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는 가설을 세우기 시작했다. “어쩌면 공격성을 유발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하는 것 때문일지 모릅니다. 어쩌면 여기서부터 모든 게 끔찍하게도 잘못되어가는지도 모르죠” 1996년 로이는 ‘위기에 직면한 이기주의’가 공격성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시사하는 문헌 연구 논문을 공동 집필했다. 이는 믿기 힘든 이론이었다. 그 당시 대중문화뿐 아니라 학계 또한 자존감 학설에 푹 빠져있었다. 자존감이 올라가면 성적도 올라간다는 것이 당시 그들의 주장이었지만, 로이는 “시간이 지나 사람들을 추적해보니, 성적이 먼저고 그다음이 자존감이었어요.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죠”라고 지적했다. 자신의 공허한 자존감 고양에 취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 있다. ‘나르시시스트’
나르시시즘의 독특한 위험성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이 아니라 대개 높은 사람들이 폭력적인 행동을 보인다는 로이의 이론을 확인하기 위한 일련의 실험에서 처음으로 분명히 나타났다. 실험(자세한 내용은 책을 참조하세요~~)에서는 놀랍게도 자존감이 공격성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혼란스러운 결과였다. 그러나 참가자들 또한 다양한 성격 테스트를 받았는데 “나르시시즘은 심술궂은 높은 자존감인 듯합니다. 이는 아주 강력한 영향을 미쳤어요. 나르시시즘에 깊게 빠진 사람들이 그 어떤 사람들보다 더 화를 잘 내고 공격적이었어요.” “나르시시즘은 일종의 자존감 중독으로도 볼 수 있다”고 로이는 발표했다. “
1999년 진 트웽이는 성격 검사에서, W.키스 캠벨은 나르시시즘적 행동에 대한 그의 연구에 대해 심사숙고했다. 미국에서의 나르시시즘이 문화와 함께 변했는지를 확인해보는 것은 어떨까? “나르시시즘은 공격성. 물질주의. 타인에 대한 배려 부족. 피상적인 가치관과 같이 미국인들이 자존감으로 예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의 모든 것을 야기한다. 높은 자존감, 자기표현, ‘자기애’를 찬양하는 사회를 건설하려고 하면서 미국인들은 무심코 더 많은 나르시시즘을 만들어냈다”고 트웽이와 캠벨은 발표했다. 완벽주의 시대가 우리 스스로를 실패자로 느끼게 하는 기회로 가득 차 있다면, 신자유주의의 부상과 금융위기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남긴 가혹한 경쟁 세계는 분명히 완벽주의 시대의 주역이다.
완벽주의 시대에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서 정부든 기업이든 간에 어떤 집단적인 유기체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개인의 어려움은 시민들을 돌보지 않은 국가의 책임이 아니라, 당신에게 기대되는 바를 충족하지 못한 당신의 잘못이라고. 만약 우리가 완벽주의를 지향하고 환경 속에서 실패 신호에 대해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면, 자살과 자해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자아가 불안정해지는 위험에 처해진다.
디지털 기술은 1990년대부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프로젝트를 대단히 촉진시키고 가속화시켰다. 미국에서는 좌파와 우파의 양극화가 1970년대 이후로 인정사정없이 심화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디지털 고치 속에서 우리에게 동의하면서 아첨하는 목소리에 둘러싸여 우리는 우리가 본질적으로 옳다고 믿는 것에 더욱 확신하게 되고,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과는 더욱 멀어지게 되면서 그들을 이제 거의 파렴치하고 그릇된 악으로 보기 시작한다. 소셜미디어의 반향실 효과(사람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신념이 미디어로 인해 폐쇄적으로 증폭되고 강화되는 현상)는 페이스북과 같은 사이트에서 널리 유통되는 허구의 기사로 인해 더욱 커지게 되었다.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완벽하며 성공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렇다고 믿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대중화된 이후 몇 년간, 수많은 데이터는 나르시시즘이 대단히 증가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 자기 사랑 문화로부터 실리콘밸리 왕국의 혁신이 탄생했다. 셀카용 카메라다. 셀카 문화를 쉽사리 접하게 된 사람들은 물론 자존감 세대의 자녀들이었다.
셀피, 윌 스토 지음, 이현경 옮김, 글항아리 출간(5)
나쁜 자아
서구의 자아에 나르시시즘이 충실하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상적 자아는 이제 삶의 존속과 보호를 위해 장원 영주와 하늘에 계신 주님께 의지하지 않았다. 특히 절제와 영혼의 순수함과 같은 ‘극기’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기독교의 묵직한 영향력은 여전했지만,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일과 출세는 이제 점점 더 개인에게 달려 있으며 부유해지고 지위를 높이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핵심은 성실성에서 명랑하고 매력적인 성격을 갖는 것으로 바뀌었다.
칼 로저스로부터 영감을 받은 윌 슈츠는 인간은 자신 안에 필요한 모든 기쁨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사회가 이를 방해하며, 우리가 진정한 자아를 억압할 때 우리는 이 기쁨을 억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슈츠에게 병과 사고를 포함하여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고통받는 자가 스스로 초래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생각들이 거짓된 전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 연구(책을 참조하세요~) 결과를 보면, 우리에게는 진정한 핵심은 없고 사회의 억압적인 기대를 없애버림으로써 나타날 수 있는 본질적이고 행복하며 완벽한 버전의 자아도 없다. 사실, 자아는 모듈식이다. 우리가 실제로 누구인지에 대한 우리 감각은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에 결정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자살 연구소의 로리가 사회적 완벽주의에 대해 말했던 것을 생각나게 한다. “사람들이 실제로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는 당신이 생각하기에 다른 사람들이 기대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거울 자아라는 개념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 사회적 완벽주의자를 보여준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들여다보고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상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판단한다.
우리가 성공에 필요한 모든 힘을 우리 안에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실패는 자연스럽게 우리 잘못이며 오직 우리 잘못이라는 말이 된다. 이는 오늘날의 완벽주의 시대부터 에설런의 윌 슈츠와 프리츠 펄스를 거쳐서 바로 다시 스미스 위글스워스와 메리 베이커 애디와 같이 19세기 미국의 신앙 치료자들과 마음 치료 주창자들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잔인하고 협소한 사고방식이다.
좌뇌 해설자(작화자)는 신경증적 완벽주의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실제 모습과 되어야 하는 모습 사이에 ‘심각한 차이’를 갖고 있는 걱정스럽고 불안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특정한 것에 효율적이지 않다면 전체 자아가 실패했다고 성급하게 일반화해버린다. 그리고 이어서 엄청난 자기혐오가 뒤따른다. 이것은 문제다. 사람들이 자살 충동을 느낄 때 이는 종종 자기혐오의 감정과 함께 오는데, 문화적 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특히 완벽주의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고 실패 신호에 대한 민감도가 높다면,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이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아 한다.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느끼는 방식이 부끄러운 것이다. 우리를 몰아붙이는 침묵 속에서 그 수치심과 자기혐오가 자라난다. 내가 보기에 자기혐오는 우리 뇌의 영웅 만들기 능력에 결함이 생길 때 일어나게 되는 듯하다.
에설런의 명시적 사명을 1980년대로, 정부 정책에 반영하고 전 세계로 퍼뜨리는 것을 도운 사람은 칼 로저스의 제자였으며 에설런 졸업생으로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존 ‘바스코’, 바스콘셀로스였다.
마가렛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이 신자유주의 이념을 현실에 통용시켰다.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의 궁극적 목표는 1970년대의 경제 혼란을 종식시키는 것 그 이상이었다. 새로운 형태의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 그 목표였다. 이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남들과 잘 지내고 출세를 한다는 것은 주변 사람들보다 환경에 더 걸맞고 더 똑똑하고 더 빠르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나의 놀라운 힘을 두 배로 그리고 세 배로 늘려야 한다는 말이었다. 자존감 열풍이 도래한 것은 바로 이 병적인 개인주의 단계에 들어서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