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 해석과 ‘꿈 읽기’를 통해 캐서린 켈러는 우리 시대 최후의 파괴력에 맞서서 요한계시록의 신비하며 무서운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묵시종말이라는 단어가 지닌 계시와 종말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놀라운 발견들로 가득한 탁월한 작품이다.”
- Jurgen Moltmann
“고대의 묵시종말론과 현대의 묵시종말론이 서로 만나는 역작이다. 켈러는 아무나 흉내낼 수 없으며 절묘한 단어 조립과 ‘꿈 읽기’를 통해서, 점차 짙어지는 암울함을 배경으로 고대의 묵시록을 지렛대로 활용함으로써, 희망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에 우리들로 하여금 예언자적인 희망을 갖도록 설득시킨다. 이 책은 우리 시대의 가장 창조적인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쓴 필수적인 책이다.”
- John J. Thatamanil (Union Theological Seminary)
“묵시란 ‘드러내는 것’이라는 명석하고 넓은 관점에서, 켈러는 오늘날 허무주의, 승리주의, 확실성을 찬양하는 종말론 담론들에 개입한다. 풍부한 상상력과 냉철함, 윤리적 긴박감이 빛나는 이 책은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반드시 읽어야 할 필수 도서이다.”
- Carol Wayne White (Bucknell University)
“우리 시대의 ‘지나치게 과장된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사이에서 놀랍게 연주하는 이 책은 요한의 묵시적 세계와 우리의 묵시적 세계 사이의 깊은 패턴들을 드러냄으로써, 점차 거주 불가능한 행성이 되어가고 있는 우리의 지구를 위한 마지막 기회의 가능성으로 우리를 소환한다.”
- 캐스린 태너 (Yale Divinity School)
“오늘날 생태 파멸적이며 민주주의가 해체되는 시대를 위한 예고 이후의 예언이다. … 켈러는 매우 낯설지만 어느 때보다 더 상관성이 있는 계시록, 즉 우리가 바꾸지 않으면 끝장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책에 대해 섬뜩하게 만들고, 때로 전율시키며 항상 우리의 정신을 사로잡는 예리함을 전해준다.”
- Stephen D. Moore (Untold Tales from the Book of Revelation 저자)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들 중 한 사람인 캐서린 켈러는 흔히 간과된 계시록의 표징들을 열어젖힌다. 본문과 시대의 표징들을 계시적 긴장관계 속에서 파악함으로써 우리의 현재 순간을 뒤흔든다.”
- Tripp Fuller (host of the Homebrewed Christianity Podcast)
종말이 오면 지구는 잔혹하게 파멸되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일까? 기독교인들은 죽은 자는 천국으로 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의 재림을 믿으면서 예수는 이 땅으로 다시 온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 세상을 떠나가고 예수는 이 세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켈러에 따르면, 구원받은 자들이 이 땅을 벗어나 위로 들려 빨려 올라감을 뜻하는 “휴거”는 요한계시록에 없다. 세계는 파멸되고 사람이 하나님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계로 내려오셔서 이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신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계 21:5). 켈러는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대체(replacement)하지 않고 갱신(renewal)하시는 것으로 읽는다. 이것은 자연세계를 철저히 회복하는 것이지, 초자연적인 대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녀에 따르면, 요한계시록은 새로운 것들(things)을 만들어내는 것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모든 것을 새롭게(new) 하는 것에 관한 기록이다. 신적인 공간은 탈우주적 공간이 아니라 우주적 공간이며, 새 예루살렘이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 이찬석 (협성대 조직신학)
이 책은 경이로운 책이다. 감동과 놀라움의 연속을 경험하게 한다. 단순히 요한계시록을 생태-정치적으로 읽고 오늘의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기후위기에 대응하라는 교훈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저자는 ‘묵시종말론을 지워버릴 수 없다면, 그것에 대해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음 집중을 통해 묵시적 종말론의 은유들의 의미가 되살아나온다. 은유와 상징들은 파멸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 세계를 향하는 멈춤의 기회로 받아들여진다. 생태학적 자살을 넘어 새 하늘과 새 땅, 공생공락(共生共樂)의 삶의 축제성을 향하는 미래를 꿈꾸게 한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이해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 홍인식 (한국기독교연구소)
극심한 빈부격차와 젠더차별 구조 속에서 생존하는 것은 이미 많은 이들에게 너무 참혹하다. 기후위기는 생존을 더욱 참혹하게 만들고 있다. 인간이 멸종위기종이 된 비상사태 앞에서, 희망을 말하는 것 자체가 기득권자들의 자기 합리화이며 집단적 저항을 차단하는 수단처럼 보인다. 기독교가 착취와 파괴의 구조악에 편승한 채, 자신들만 초자연적으로 구원받는다는 거짓 희망과 탈정치적 평안을 불어넣는 혹세무민의 종교인지 아닌지 판가름할 기준은 특히 계시록 해석에 달려 있다. 동방교회에서 아직도 예배 중에 계시록을 읽지 않는 이유는 ‘하느님의 어린 양’의 잔인성(계 19장)이 예수와 바울의 ‘자기비움(kenosis)을 뒤엎기’ 때문이다(Karen Armstrong 2019: 228-9). ‘로마제국의 잔인성과 영원함에 대한 정반대와 대안적 미래’로 고백된 ‘처형된 어린 양’이 이처럼 정복자와 대량학살자가 된 것은 초대교회가 너무 처절하게 박해받은 결과일 게다. 이처럼 학살당한 공동체가 꿈꾸었던 최후승리를 문자적으로 읽는 제국주의적 기독교는 심판과 폭력의 종교가 되기 마련이다. 이 책은 계시록에 대한 전통적 해석이 초래한 근본주의자들의 승리주의와 폭력,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의 절망과 체념에 맞서, 인류의 마지막 희망의 신학적 돌파구를 여는 책이다. 한강의 소설들처럼, 아이들까지 학살당한 극한적 고통을 견디며 해산하는 저자의 몸부림이 절절히 느껴지는 책이다.
- 김준우 (무지개신학연구소)
저자가 포착한 요한계시록의 일곱 장면 가운데 하나는 해산의 진통을 하는 여인이다. 이 여인의 진통에서 기후위기 시대의 아픔을 보고, 그녀의 투쟁에서 묵시적 현실의 마지막 기회를 찾는다. 가부장적 힘의 문명이 간과해 온 요한의 비전, 로마제국의 잔인한 어둠 속에서 그가 본 ‘태양을 입고 달을 밟고 열두 개의 별이 박힌 월계관을 쓴 여인의 우주적 산고’는 이 책에서 시적인 언어를 입고 오늘의 위기와 모험으로 재연된다. 잡힐 듯 말 듯 이어지는 리듬을 타고 증폭된 상상력은 놀랍게도 현실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 용을 피해 달아나는 이 여인의 몸부림치는 가능성을 광야에서 그녀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살려낼 수 있을까? 저자는 묻는다. 이 묵시종말적 현실에서 과연 어떤 새로운 백성이 태어나며, 어떤 투쟁이 이어질 것인지.
- 김희헌 (향린교회 담임 목사)
이 책은 과정신학자이고 여성신학자이며 정치신학자로 알려진 저명한 신학자 캐서린 켈러가 읽는 요한묵시록에 관한 해석이다. 묵시적 종말론은 더 이상 가망 없는 현재를 닫고 도래할 종말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담화 양식을 가리킨다. 통념상 그렇다. 이런 통념에 따르면, 묵시적 종말론을 말하는 지금은 예외상태다. 사회가 지탱되는 한 필요불가결한 법의 효력도 정지시키는 상태다. 독일의 법학자인 카를 슈미트는 그러한 통념적인 묵시적 종말론적 신학을 ‘정치신학’ (Politische Theologie)이라고 불렀다. 그의 이런 정치신학적 문제인식은 예외상태의 정치적 형태로서 나치체제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캐서린 켈러는 묵시적 종말론의 예외상태 해석에 반대한다. 묵시적 종말론은 비루하기 짝이 없는 현재를 폐절시키고 도래할 미래가 아니라, 그런 현재라는 땅을 굳건히 밟고서 도래할 미래를 이야기한다. 비루한 현재는 밑바닥으로 떨어진 존재들(the under- commons)로 가득하다. 사람만이 아니라 자연 환경도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졌다. 켈러는 이처럼 밀려난 존재들의 상생적 연대, 그런 존재들의 꿈을 말하는 것이 묵시적 종말론이라고 주장한다. 하여 이 책에서 우리는 언더클래스화된 세계의 민중들, 자연 환경과 그 속에 사는 모든 존재들, 그리고 기후까지 연결된 새로운 상생의 정치신학을 접하게 될 것이다.
- 김진호 (제3 그리스도교 연구소)
“도대체 왜 기독교 역사의 대부분을 통해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믿었던 신앙이 단순히 삶 자체(life itself)에 대한 희망이라기보다는 내세(afterlife)에 대한 희망인가?”(1994: 331). 몰트만이 『희망의 신학』에서 주장한 현실변혁적 종말론을 구체화한 켈러의 이 질문은, “마지막 또는 궁극”을 뜻하는 종말(eschatos)에 관한 신학적 논의를 획기적으로 바꾸어놓은 질문이었다. 이 질문을 통해 켈러는 휴거와 영혼 부활과 천국 같은 내세 중심의 종말론에서부터, 현재의 생명 중심의 종말론으로 그 방향을 전환시켰기 때문이다. 인류가 집단적으로 당면한 핵전쟁과 기후위기 때문이다. 켈러에게 신앙과 신학은 불의한 현실을 포기하고 내세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찾기 어려운 현실을 마지막 순간까지 치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켈러가 특히 계시록의 묵시종말론과 계속 씨름하는 이유는 그 묵시종말론 담론이 매 시대마다 다른 모습으로, 즉 도착적으로 혹은 퇴행적으로 정치적 남용을 겪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말이다. 그 와중에 망각되는 것은 우리가 매 순간 종말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시작을 개시하고 있다는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순수한 진실이다. 계속되는 팬데믹 사태와 기후변화, 그리고 생태 위기가 가중되는 시대, 여섯 번째 대멸종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 시대에 ‘종말’이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고, 또 교회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이 책을 통해 정독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그 종말의 기호들은 모든 것이 멸망하고 파괴될 것을 예언하는 대신, 자본주의의 폐허 아래서 피어나는 버섯의 생명력(안나 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실패해왔던 문명의 노력들을 가리키며,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이 종말론적 언어로 위기를 강조하며, 생태운동을 촉진하려 해왔던 우리들에게 새로운 언어의 가능성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 박일준 (감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