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따뜻한 글을 접할 때가 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 글쓴이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글. 그런 글들을 보면 부러워진다.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어진다. 인문학에 오랫동안 투신해 온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 전문가에게 그런 글은 언감생심 꿈도 꾸기 어렵다. 도스토옙스키에 관해 예리한 글, 심오한 글, 웃기는 글, 심지어 무서운 글은 쓸 수 있을지언정 따뜻한 글은 절대 못 쓴다. 그의 치열함을 따뜻함으로 바꾼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나는 다른 어떤 책에서보다 그의 소설에서, 그 치열함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 치열함 맨 밑바닥에 있는 삶에 대한 사랑에서 힘을 얻곤 했다. 그렇다면 꼭 부드럽고 따뜻한 책은 아니더라도 그에게서 받은 〈힘〉을 공유하는 책은 쓸 수 있지 않을까. 문학은 실용서나 철학서와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우리가 삶을 끌어안을 수 있도록, 세상을 좀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 p.5~6, 「머리말」 중에서
인생의 매 고비마다 나는 도스토옙스키를 읽었고 그에게서 희망을 발견했고 그에게서 삶의 지침을 얻었다. 그러므로 어느 시점 이후부터는 그를 연구한다기보다는 그에게서 배운다는 생각이 앞섰고, 더 이후에는 배운 데 대한 보답으로 예를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 앞섰다. 조금 통속적으로 말한다면 나는 〈인생에서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도스토옙스키한테서 배웠다〉.
--- p.15~16, 「서문을 대신하여: 광야의 도스토옙스키」 중에서
「이봐요, 친구, 나는 한평생을 거짓말만 했어요. 진실을 말할 때조차 말입니다. 나는 단 한 번도 진리를 위해 말한 적이 없고, 나 자신을 위해서만 말해 왔어요. 이전에도 이것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확실히 보이는군요……. (……) 나는 지금도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몰라요. 지금도 틀림없이 거짓말하고 있을 겁니다. 문제는 내가 거짓말을 하면서 나도 그것을 믿는다는 겁니다. 삶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살아가는 동안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자신의 거짓말을 믿지 않는 것, 그래요, 그래, 바로 그겁니다!」 (『악령』, 제3부 제7장)
소설에서 가장 인간적인 인물 스테판 베르호벤스키가 임종 전에 하는 말. 〈진실을 말할 때조차 진실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말했다〉는 대목에서 눈을 떼기 어렵다. 거짓이 얼마나 쉽게 〈자기 자신을 위한 진실〉로 둔갑하는지……. 내 삶을 돌아보게 된다.
--- p.41, 「불안」 중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겁니다. 자신을 속이고 자신의 거짓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이나 주변에 있는 진실을 감지하지 못하며, 반드시 자신이나 타인을 존경하지 않게 됩니다. 아무도 존경하지 않으며 사랑을 멈추게 되면 마음을 달래고 위안을 찾기 위해 애정이 결핍된 상태에서 욕망과 색정에 몰두하여 자신들의 결점이기도 한 야수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 모두가 타인들과 자신에게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는 데서 비롯되지요. (……) 자, 일어나 자리에 앉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 또한 거짓 몸짓입니다…….」(『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제1부 제2권)
노수도사 조시마가 방탕하고 탐욕스러운 호색한 표도르에게 하는 말. 수도원에서 광대짓을 하여 거기 모인 모든 사람을 모욕하고 더 나아가 모든 성스러운 것을 모욕하는 표도르의 핵심을 꿰뚫어 보고 있다. 거짓말은 궁극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모욕이다. 스스로를 모욕하는 사람이 과연 무엇을 존경할 수 있겠는가.
--- p.42, 「불안」 중에서
고통은 도스토옙스키 문학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 화두다. 고통은 절대적이고도 상대적인 것이다. 빈곤과 질병을 비롯한 숱한 고통 속에서 살았던 그는 고통을 실존의 제1조건으로 간주했다. 그는 개인의 고통을 만들어 내는 요인들, 즉 빈곤과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질병, 중독, 가까운 사람의 죽음 등을 소재로 소설을 썼으며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각을 입체적으로 조망했다. 어떤 고통은 그 고통에 관해 언급하는 것 자체를 부도덕하게 만든다. 또 어떤 고통은 삶의 본질에 합류함으로써 위대한 것이 된다. 그런 고통은 〈위로〉나 〈힐링〉을 거부한다. 힐링은 위대한 고통을 단순 외상으로 축소시켜 일회용 반창고를 붙여 줄 따름이다.
--- p.121, 「고통」 중에서
「내가 궁극적으로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고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줄 목적으로 인류의 운명의 건물을 건설한다면, 그러나 그 일을 위해서 단 하나의 미약한 창조물이라도, 아까 조그만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치던 불쌍한 계집애라도 괴롭히는 것이 불가피한 일이므로 그 애의 보상받을 수 없는 눈물을 토대로 그 건물을 세우게 된다면, 그런 조건 아래에서 건축가가 되는 것에 동의할 수 있겠니? 자, 어디 솔직히 대답해 봐!」 (……) 「아니오, 용납할 수 없어요.」(『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제2부 제5권)
이반과 알료샤의 대화.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 중의 하나. 여러 변주의 형태로 현대 문학과 지성사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한 사람의 고통과 여러 명의 행복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 특히 이 한 사람이 아무 죄도 없는 어린아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누구도 가볍게 답을 내놓을 수 없는 딜레마다. 아니 우리는 어쩌면 이미 〈어린 희생자〉 위에 세워진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 p.145, 「고통」 중에서
「공작이 이 세상은 미에 의해 구원받을 거라고 합니다! 공작이 그렇게 장난기 어린 생각을 하게 된 까닭은 지금 사랑에 빠져 있기 때문일 겁니다. 조금 아까 공작이 들어올 때 나는 그것을 확신했어요. 공작, 얼굴을 붉히지 마세요. 당신이 불쌍해져요. 어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할까요?」(『백치』, 제3부 제5장)
이폴리트가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미시킨 공작의 말을 조롱하는 대목. (……)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눈 속에 있다. 삶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 세상의 구원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인간다움을 조금 더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미학적인 정서는 단순히 감각의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에 다른 차원을, 형언할 수 없이 감동적인 어떤 깊이를 더해 준다. 한 폭의 그림이건, 한 편의 시건, 아름다움 앞에서 공감하고 전율하고 오열할 수 있을 때 인간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존재보다 훨씬 넓고 깊은 존재가 된다. 아름다움은 필멸의 인간이 자신보다 더 큰 어떤 것을 깊이 응시할 때 그의 눈 속에 들어온다.
--- p.187, 「아름다움」 중에서
도스토옙스키는 한 존재가 다른 한 존재를 개인 대 개인으로 백 퍼센트 이기심 없이, 변함없이 사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인간은 그래서 보편적인 인류 사랑, 감상적 사랑, 그의 표현에 따르면 〈공상적 사랑〉으로 눈을 돌린다고도 했다. 우리는 사랑을 사랑한다. 사랑이 가장 소중한 가치라는 데 거의 모두 동의한다. 누구나 사랑하고 있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을 갈망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의 환상에 쉽게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 역시 인간 실존의 엄연한 한 부분이다. 실천적 사랑 없는 공상적 사랑은 무의미하다.
--- p.244, 「사랑」 중에서
「만일 용서하고 싶으면 자기 몫만 용서하면 되고, 어머니로서의 끝없는 고통에 대해서만 가해자를 용서하면 되는 거야. 그러나 그녀는 갈가리 찢겨 죽은 아이의 고통에 대해서는 압제자를 용서할 권리도 없고 감히 용서할 수도 없는 거야. 그 애 스스로가 그자를 용서한다 치더라도 말이야. 그런데 만일 그렇다면, 만일 그들이 용서할 수 없다면 조화란 어느 곳에 있을까? 그렇다면 이 세상에 용서할 수 있고 용서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존재하는 걸까? 나는 조화를 원치 않아.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원치 않는단 말이야. (……)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야. 알료샤. 난 그저 입장권을 정중히 돌려보내는 것뿐이야.」(『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제2부 제5권)
이반은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신을 규탄한다. 죄 없는 어린아이를 극도의 고통 속에서 죽게 한 가해자뿐만 아니라 그런 고통을 세상에 있게 한 신을 규탄한다. 그 누구도 어린아이의 고통에 대해 그 가해자의 용서 운운할 수 없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이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는지, 그 한계점으로 우리를 몰고 간다. 인간은 신을 용서할 수 있는가?
--- p.244, 「용서」 중에서
「세상 사람들보다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 앞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일에, 즉 사람의, 세계의, 개개인의 모든 죄에 대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만이 우리 은둔 생활의 목적이 달성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이 지상의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모든 일에 대하여, 세계의 보편적 죄악뿐 아니라 이 지상의 만인들에 대하여, 각각의 개인들에 대하여 분명히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각은 수도자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걸어야 할 길의 화관(花冠)입니다.」(『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제2부 제4권)
조시마 장로가 수도사들에게 하는 설교 중의 한 대목이다. 〈만인은 만사에 대해 만인 앞에 죄인이다〉라고 요약되는 그의 설교는 도스토옙스키 그리스도교의 핵심이다. 상식이나 논리를 뛰어넘는 주장이므로 여러 가지 반박과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이 주장에 우리가 공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일, 즉 용서를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
--- p.268, 「용서」 중에서
삶을 감사하게 여길 때 작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작은 것을 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작은 것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삶 속에 얼마나 많은 기쁨의 알갱이가 뿌려져 있는지를 알게 된다. 라스콜니코프의 시베리아 유배는 발견의 여정이다. 우리가 공짜로 받은 모든 것에 예의를 차리는 법을 배워 가는 과정이다. 거대한 권력과 성공을 꿈꾸었던 그는 이곳에서 다시 시작한다. 햇살 한 줄기와 작은 샘물과 풀잎 한 포기에서.
--- p.274, 「기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