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경계선에 다다를 때마다 느껴지는 기억의 냄새, 남편의 목덜미에서 퍼져 나오는 피곤의 냄새, 여행지의 추억을 끄집어내는 빗방울 냄새, 햇살 냄새, 비 오는 날 1교시 냄새, 강아지의 귀여운 꼬순내와 구수한 커피 향까지, 냄새에 관한 한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잠시 멈춰 서 코끝을 간지럽히는 냄새를 맡고, 무언가를 떠올리고, 아파하고, 행복해하고, 얼마간 외로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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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냄새와 함께 다가온다. 계절의 냄새에는 어김없이 기억의 흔적이 묻어 있다. 지난해 이맘때 날 할퀴었던 말, 보듬었던 손, 웃고 떠들며 보았던 영화, 거닐던 거리의 소음 등. 종종 후각은 시각이나 청각보다 후순위가 되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 후각은 과거를 가장 생생히 떠올리게 하는 감각이다. 과거를 맡게 하는 감각.
--- p.13
어린 시절 엄마는 가난한 사람에게 겨울은 힘든 계절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그래도 난 겨울이 좋았다. 엄마가 목 끝까지 덮어 준 솜이불에서 나던 장롱 냄새, 귀에 걸어 준 분홍색 면 마스크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던 엄마의 크림 냄새가 따뜻했다. 묵직한 이불을 덮을 때, 보드라운 마스크를 쓸 때면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그럴 때마다 히죽 웃으며 엄마를 힐끗 바라보았다. 또 뭐가 그렇게도 신났어 하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는 엄마의 거친 손에서도 어렴풋이 겨울의 냄새가 묻어 있었다. 빨랫비누 냄새, 연탄집게의 매캐한 냄새 같은 것들이.
--- p.17
생각해 보면 여름이라는 계절이 곧 흑역사의 시즌인 것도 같다. 땅 위에 조금은 붕 뜬 채로 지내는 여름엔 이성의 끈을 놓기가 쉽다. 그리고 여기엔 여름의 냄새가 한몫한다. 흙냄새를 머금은 장맛비, 우산 속 어깨를 맞부딪힌 두 사람의 땀 내음, 뜨겁게 달아오른 아스팔트의 냄새, 부채질해 주는 손에서 느껴지는 향수 냄새…. 여름 내내 이 냄새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제정신 차리고 살기가 더 힘들다.
--- p.41
남이 하는 일은 다 쉬워 보인다.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대체 돈 받고 뭘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막상 해 보면 안다. 남이 하는 일 중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는 걸. 그 일이 쉬워 보이는 건, 그 사람이 죽을 동 살 동 노력한 끝에 힘든 내색 없이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 p.55
냄새로 그 사람이 어떻게 일상을 꾸려 나가는지 가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옷은 얼마나 자주 빠는지, 샤워는 얼마나 꼼꼼히 하는지, 식후 양치는 꼬박꼬박 하는지, 신발을 종종 볕에 말리곤 하는지, 퇴근 후 얼마나 살뜰히 자신 을 살피는지. 이 모든 것이 스치는 냄새 하나에서 느껴진다. 야근으로 어쩌다 하루 이틀 정신없이 보낸 사람과 정돈 없이 사는 게 일상인 사람의 냄새는 그 농도부터 다르다.
--- p.85-86
일본에서는 물 냄새가 난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맡게 되는 냄새. 지하철에서도, 거리에서도 맡을 수 있는 눅눅한 물 냄새.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일본 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어서 그곳 학생들과 편지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 일본 친구가 보내온 편지에서 습기를 머금고 축축해진 종이 냄새가 났다. 그 냄새는 왠지 모르게 외롭고 쓸쓸했다. 일본의 집 냄새일까 궁금했다.
--- p.119
이런저런 경험이 쌓이며 향기에 신중하려 한다. 향이 짙은 보디로션을 바른 날엔 향수를 뿌리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향이 짙은 핸드크림을 들고 나가는 날에는 묵직한 퍼퓸보다 가벼운 코오롱이나 오드투알레트를 뿌린다. 과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짙은 향기보다 은은한 내음으로 기억되고 싶다. 내가 머물렀던 자리에 코를 찌르는 향수 냄새가 남아 있는 건 좀 싫다.
--- p.141-142
책장을 넘길 때 코끝에 닿는 파삭파삭한 책 냄새도 좋았다. 책의 종류에 따라 냄새가 달랐다. 양장본은 냄새도, 촉감도 매끈했다. 재생지로 만든 책에서는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고, 올컬러 책에서는 사인펜 냄새가 느껴졌다. 책마다 냄새가 다르다는 건, 책을 대하는 나의 마음도 달라진다는 뜻이었다.
--- p.153
철봉 놀이를 한 날엔 손에서 동전 냄새가 났고, 놀이터에서 흙장난을 친 오후에는 텁텁한 냄새가 잠들기 전까지 코끝을 맴돌았다. 유치원에서 달걀국을 먹은 날엔 밥상 냄새가 머리카락에 묻어났다. 내 냄새를 맡는 만큼 나라는 사람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 p.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