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 소리와 함께 헛간 문이 다시 닫혔고, 로테의 히스테릭한 비명은 일순간, 가까이 다가오는 사이렌의 소음을 압도해 울렸다. 키플링스 뱅에의 평화는 끝났다. 출입이 차단된 현장에는 낯선 사람들이 사건을 조사하느라 끊임없이 왔다 갔다 했고, 붉은색과 흰색 줄무늬 폴리스라인 다른 쪽에선 동네 사람들과 기자들이 북적거렸다. […] 그의 머리가 있어야 할 위치엔 회색빛의 육중한 상자가 놓여 있었는데, 거대하고 다루기 힘든 종류의 오래된 폐기용 모니터 같았다. 이런 물건은 무게가 얼마나 나갈까? 8킬로그램? 10킬로그램? 피, 유리 조각, 뼈 토막, 뇌 구성물의 혼돈 가운데 모니터가 콘크리트 바닥에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기에 그 아래엔 머리가 있을 공간이 없을 듯했다. --- p.13-14
“사실 오늘 당신한테 청혼할 생각이었는데……. 그런데 당신은 바로 같은 날 로또에 당첨된 이야기를 하다니. 내가 돈 때문에 당신 곁에 있으려 한다는 말로밖에 더 들리겠어. 참 나……. 이제 완전히 물 건너갔어.” 그는 고개를 돌렸다. 눈동자가 촉촉해 보였다. “무슨 얘기인지 알겠어, 우르술라?”
“나한테 청혼할 생각이었다고?” […]
“내가 당신 돈 때문에 청혼한다고 당신이 그렇게 믿는다면……. 난 정말로 내 진정성이 더럽혀진 느낌이야.”
“반지를 샀단 말이지?”
마침내 그가 뒤돌아섰다.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고 그는 해바라기가 해를 향하듯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보여줄까?” --- p.31-32
잠깐 동안은 그냥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었다. 사랑스럽고 밝고 재능 있는 딸이 있지 않은가? 스물다섯 살 아네모네가 엄마 없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게다가 우르술라의 부모는 외동딸을 그런 식으로 잃어버리면 또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자살이라니 너무 이기적이지 않은가? 사표를 취하하면 여전히 일할 수 있는 직장도 있고 집도 있는데. […] 그러다 어느 깜깜한 밤 좁은 거실에 모니터 조명만 비추고 있을 때 갑자기 아픔이 몰려와, 소파 쿠션을 누르고 눈물 콧물이 범벅되고 온몸에서 나오는 흐느끼는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렸다. 그때 그녀는 자신의 이성적인 자아가 작동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한 가지 방식으로만 반응할 수 있었다. 그냥 떠나고 싶었고, 잠들고 싶었고, 사라지고 싶었다. 길면 길수록 좋을 것 같았다. --- p.43-44
전 세계의 책과 잡지가 가득한 서점에 다다랐을 때 단은 거의 포기 상태였지만 그래도 계산대에 있는 키 작은 금발 여직원에게 또 한 번 사진을 보여주었다. 어느새 사진이 구깃구깃해져 있었다.
“네, 기억해요.” 직원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하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 사람 여기서 봤어요.”
“확실합니까?”
[…] “정확히 기억나요. 그때 막 휴가 끝나고 근무한 첫날이었거든요. 그가 매장으로 들어올 때 눈에 확 띄었어요. 그래서 마음속으로 시작이 아주 좋다고 생각했죠. 휴가 끝나고 오자마자 그렇게 멋있는 남자를 봤으니까요. 우리 매장을 찾는 고객이 전부 다 이 남자처럼 아니면 선생님처럼 생겼으면 당연히 기분 좋지 않겠어요?” 직원이 씩 웃었다.
[…] “혹시 그때 누군가 동행이 있었는지 기억나십니까?”
“혼자였어요. 만약 아내나 여자친구가 같이 있었다면 제가 그 남자를 그렇게 뚫어지게 바라볼 수 없었겠죠.”
[…] 단은 그녀의 이름을 적었다. 피아라고 했고 자신의 전화번호를 주겠다고 했다. 단은 서점을 나오면서 너무 큰 소리로 고함치지 않기 위해 자제해야 했다. 처음 확보한 증거였다. 첫 목격자가 나왔다. --- p.106-107
비르기테와 제이, 리세로테는 동시에 캐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결혼이라고요?” 요아킴은 되물으며 이마를 찡그렸다.
“네, 죄송한 말씀이지만 얼마 사시지 못하는 걸 당신도 아시잖아요, 요아킴. 그럼 비르기테가 몇 개월 뒤 유산을 물려받을 테고요.”
그는 소파 한가운데서 뿜어 나오는 탄식 소리를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유언장대로 비르기테가 유산을 물려받으면 대략 40퍼센트를 상속세로 내야 합니다. 하지만 결혼하고 두 분이 재산을 공동명의로 해놓는 데 합의하면 완전히 달라지죠. 그러면 요아킴 재산의 절반이 비르기테 명의가 되고 나머지 금액에 대해 세금이 전혀 나오지 않아요. 말하자면 금액 차이가 엄청나죠.” 그는 서류를 뒤적였다. “요아킴 헤인센의 재산이 총 300만 크로네예요, 비르기테. 그러니 고려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 p.136-137
“요아킴이 자기 문신이 무슨 의미인지 얘기하던가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룩한 고양이’라는 의미라고 했어요. 인도에서 쓰는 힌디어라던데요.”
“확실한가요?”
“그래서 비르기테가 요아킴을 만나자마자 푹 빠진 거예요. 요아킴이 고양이에 미쳐 문신까지 했다고 했거든요.”
[…] “요아킴이 나중에 다른 여자한테 다시 사기를 치면서 그 문신의 의미를 뭐라고 했는지 말씀드릴까요? 그 여자분은 미술수업을 하는 교사이고 자기 직업에 열정을 다하는 사람이거든요?”
대답 없이, 회색 눈동자만 빛났다.
“미술교사가 묻자 요아킴이 ‘색’이라고 대답했다는군요. 어이없지 않습니까?”
“요아킴이 아니었을 수도 있잖아요. 전혀 다른 남자였을지도 모르죠. 둘 중 한 사람이 요아킴 형이나 동생일지 누가 알아요.”
“두 손 다 들었습니다.” 단이 말하며 일어났다. “좋으실 대로 생각하세요.” --- p.149-150
“혹시 이 남자를 본 적이 있으신가요?”
그녀는 안경을 이마 위로 밀어 올리더니 팔을 쭉 뻗어 사진을 멀찍이 들고 응시했다. 초점이 맞지 않는 사진을 보려고 애쓰면서 그녀는 몇 초쯤 완전히 무관심한 듯 보였다. 그러다 갑자기 아주 순간적이긴 했지만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정을 찾은 표정을 지었지만, 흔들리는 눈빛으로 카마와 사진 그리고 창가 쪽을 번갈아 보았다. 그녀는 요조숙녀가 함부로 봐서는 안 될 음란물이라도 되듯 사진을 도로 내려놓았다. “모르는 남자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들렸다. 좀 지나치게 단호하다고 할까? 플레밍은 이어 사진을 카마에게 건넸다. 그는 그녀도 같은 반응을 보이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표정 관리를 더 잘하긴 했지만 그녀도 마찬가지로 사진 속 젊은 남자를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카마는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다는 듯 사진을 뒤집어놓았다. 플레밍은 두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둘 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시선을 들지 않았다.
“왜 거짓말을 하는 거죠?” 그가 침착하게 물었다. --- p.184
플레밍이 전화를 끊자 단은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좋다. 이렇게 돼야 할 일이다. 플레밍하고 부하직원들이 곧 사기꾼 두 명을 체포할 것이고 사건은 영원히 단의 손에서 떠날 것이다. […] 그런데도 영화관에서 영화가 끝나기 전에 자리를 떠야 하는 그런 실망감 같은 느낌이었고 사건의 본질적인 부분을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은 정말 긴장되고 재미있는 순간이 이제 시작되었다는 걸 잘 알았다. 그런데도 그걸 경험하지 못하게 되다니. 바로 전까지 그는 요하네스 한센을 미행하는 일을 물고 늘어졌다. 전문 사기꾼의 작업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이 사기꾼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단은 그 자신이 직접 각본을 쓴 연극의 일부였다. 그리고 지금, 오랫동안 까다로운 리허설 끝에 마침내 주인공이 진지하게 연기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이 드라마의 정점에서 그가 속아줘야 하는가?
--- p.3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