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철학으로서만 보지 않고, 역사를 역사로서만 끝내지 않고, 더욱 유기적으로 조합하여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근원적이자 보편적인 의문에 대해서 탐구하게 하는 것이 미국식 리버럴 아츠 교육이다. 그 목표는 전 세계 어디에서든, 또는 정치든 비즈니스든 어떤 분야에서든 사회 곳곳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간을 키워내는 것이다. 앞으로 이 책을 통해 그 중심 내용을 전달하고자 한다.
---「미국 명문대식 리더 교육의 기초 ‘리버럴 아츠’」중에서
특히 서양철학의 시초이자 근간이 되는 존재가 고대 그리스 시대의 인물인 플라톤과 그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다. 이 두 사람은 『국가』와 『니코마코스 윤리학』, 『정치학』을 비롯한 다수의 저작을 남겼는데, 여기 담긴 사상이 바로 리버럴 아츠의 원류라 할 수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그들이 어떤 생각으로 이와 같은 책을 썼는지 당시의 시대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그리스라는 나라의 탄생부터 문명의 발전과 쇠퇴, 그리스인의 기질, 유럽과 아시아가 대립하게 된 원점까지 전체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리버럴 아츠의 모태, 고대 그리스」중에서
고대사를 배울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그리스인 역사가 두 명이 있다. 한 명은 헤로도토스, 또 한 명은 투키디데스다. 이 두 사람은 그 후의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친 두 개의 대사건을 각각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이름을 남겼다. 첫 번째 대사건은 기원전 5세기에 일어난 페르시아 전쟁이다. 아시아의 거대 제국이었던 페르시아가 그리스 세계를 침공한 것이다.
그 과정을 속속들이 기록한 것이 헤로도토스의 정대한 저서 『역사』다. 완전한 형태로 현존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 알려졌다. 또 하나는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고 20년 뒤에 일어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그리스의 도시국가였던 아테나이(현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일어난 27년에 이르는 전쟁이다. 투키디데스의 저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그 전말을 기록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배우는 유럽의 원점」중에서
“이리하여 아테나이는 더욱 강대해졌다. 자유와 평등이 한 가지 면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실제로 증명한 것이다. 아테나이가 독재하에 있었을 때는 이웃 어느 국가도 전력에서 앞선 적이 없었으나, 독재자로부터 해방되자 단연 다른 국가들을 제압하고 가장 강한 나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보건대, 독재자의 압정(壓政) 아래 있을 때는 그를 위해 일하는 셈이므로 일부러 비열한 행동을 했지만, 자유로워지고부터는 각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할 의욕을 불태웠음이 명백하다.” 이 구절이야말로 헤로도토스가 『역사』를 통해 가장 전달하고 싶은 내용이었을 것이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그려내는 그리스 중우정치」중에서
이런 소크라테스의 언행은 특히 젊은이들의 지지를 모았다. 반면 위신과 평판에 금이 간 ‘현인’들은 그에게 증오의 눈길을 보내게 되었다. 소크라테스가 40세가 되었을 무렵 시작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나이의 전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페리클레스가 세상을 떠난 후 근시안적이고 사리사욕을 우선시한 정치 리더들이 등장해 국가를 점점 더 쇠망의 길로 끌고 간 과정을 우리는 이미 앞 장에서 살펴본 바 있다.
그중에서도 기원전 415년에 시작된 시켈리아 원정을 주도하다가 전쟁 직전 적국인 스파르타로 망명한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의 제자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비난은 한층 더 심해졌다. 뿐만 아니라 기원전 404년 아테나이가 패배하고 스파르타의 지배 아래 놓이자 아테나이에서는 민주제 대신 과두제인 ‘30인 정권’이 발족했다. 이 정권은 공포정치를 펴서 시민의 반발을 샀고, 결국 1년 만에 와해되어 아테나이는 민주제로 회귀한다. 이 30명의 멤버 중에도 제자가 있었던 탓에 결국 소크라테스도 규탄의 대상이 되었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생애를 마친다. 이 재판의 경위는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플라톤의 『국가』가 주장하는 이상주의」중에서
인간적인 탁월성도 두 가지로 나뉜다. 지혜와 분별 등은 ‘지성적인 탁월성’이며, 관용와 절제 등은 ‘윤리적인 탁월성’이다. 플라톤이 중시한 것은 전자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후자에 집중했다. 윤리적인 탁월성을 습관을 들임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으로, 그리스에서는 습관을 ‘에토스(ethos)’라고 불렀다. 이는 ‘윤리(에티케, ethike)’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에티켓’의 어원이 바로 이 ‘에티케’다. 에티켓은 분명 후천적으로 습관을 통해 형성되는 ‘윤리’에 힘입은 바가 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혼이 이성을 활용하는 분야 중 하나로서 정의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주장하는 실천주의」중에서
한편 민주제에는 다섯 가지 유형이 있다. 독재제나 과두제보다는 민주제가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중우정치로 빠져 폭주한 아테나이라는 사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민주제의 기본적인 원리는 자유다. 민중이 무엇에도 구애되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그 자유를 어느 정도 선까지 확보하느냐에 따라 민주제 중에서도 다양한 차이가 생긴다. 일부 권력자나 민중만이 아니라, 부유층도 포함한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주권자라고 인식할 수 있는지가 민주제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형태인 국제(國制)는 국민 각층으로부터 선거를 통해 관료를 선출하고, 기본적으로 법률에 의해 운영되는 형태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국가는 성장해서 국민 대다수가 만족하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이 그려내는 현실적 국가론」중에서
원래 교회와 수도원에는 ‘스콜라’라고 불리는 학교가 함께 설치된 경우가 많았다. 이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탈리아 반도와 서유럽은 게르만 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파괴되고 황폐해졌지만, 교회는 계속 남아 있었다. 교회는 게르만 민족을 기독교로 교화시키는 데 사활을 걸고 매달렸다. 그것을 위해 세운 학교가 스콜라였다. 종교를 가르치려면 신의 존재를 믿게 만들기 위한 이론이 필요하다. 그때 도움이 되는 것이 앞서 설명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과 같은 저작이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기본으로 하면서, 믿음으로써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교의는 충분히 설득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의 번영부터 중세 기독교 시대까지」중에서
르네상스(Renaissance)란 프랑스어로 재생, 부활을 의미한다. 문자 그대로 유럽에서 오랫동안 명맥이 끊어졌던 헬레니즘 문화가 부활한 것을 의미한다. 본격적인 르네상스는 14세기의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앞 장에서 서술했듯이 이슬람 세계로부터 헬레니즘 문화가 대량으로 역수입된 것이다. 이로써 사람들이 학문과 과학, 예술에 눈을 떴다. 둘째는 흑사병이라 불리는 페스트의 대유행이다. 14세기 중반에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이 전염병으로 인해 몇 년 만에 유럽 전 인구의 3분의 1이 생명을 잃었다고 한다. 사회와 경제에 큰 타격을 준 것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생사관과 종교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닥쳐오는 죽음 앞에서는 교황도 교회도 무력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렇다면 권위에 속박되지 않고 자유롭게 살자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셋째는 상업의 발달이다. 특히 북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제노바 같은 항만도시는 이슬람 세계와의 교역 거점으로 번성했다. 그 풍요로움을 바탕으로 시민의 문화가 발달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이탈리아에서 탄생한 대표적인 작품이 단테의 서사시 『신곡』과 보카치오의 단편소설집 『데카메론』이다.
---「서양 우위의 시대 개막 르네상스에서 근대까지」중에서
1914년에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은 신성로마제국 붕괴 후의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와 같은 역사가 있고 질서가 잡혀 있는 국가들과 대항해시대를 거쳐 급격히 대두한 영국,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 국가들이 대립하는 구도였다. 형세가 크게 기운 것은 1917년, 미국이 참전하면서부터였다. 서유럽 국가 측이 승리를 거두면서 이를 계기로 세계 질서는 서유럽 국가 주도, 더 나아가 미국 주도로 이동해갔다. 이와 함께 오랫동안 세계의 중심이었던 지중해는 그 지위를 미국의 양안에 위치한 태평양과 대서양에 내주었다.
같은 해 미국에서는 전혀 눈에 띄지 않았지만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미국 육군의 요청으로 컬럼비아 대학에서 미국식 리버럴 아츠 교육과정을 개발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로 결정한 미국 육군은 사관생도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느꼈고, 이를 위해 컬럼비아 대학에서 만든 것이 바로 리버럴 아츠 교육과정이었다.
---「초강대국 미국에서 성장한 리버럴 아츠」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