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조선 초를 살았던 통진 사람 박신(1362~1444)은 대사헌, 호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통진에서 강화를 오가며 보니 사람들이 배 탈 때마다 물에 텀벙텀벙, 귀찮고 불편하고, 특히 겨울에는 고통이다. 높은 사람들이야 가마 같은 거 타고 배에 오르고 내리니 버선 한 짝 젖을 일이 없다.
마음이 있어야 보이는 법, 박신은 백성에게 참마음이 있었다. 배 타고 내릴 때마다 고통 겪는 이들을 애처롭게 여겼다. 선착장 만드는 비용만 대도 칭송받을 일인데 손수 사람들과 함께 일했다. 그렇게 김포 쪽 해안과 강화 쪽 해안에 돌을 쌓아 선착장을 완성했다. 인조는 박신이 쌓은 선착장에 내렸을 것이다. 박신은 몰랐겠지. 이 나루로 나라님이 피란 올 줄은.
---「빛나는 물길이 다다르는 곳 〈갑곶나루〉」중에서
1627년(인조 5) 3월 3일, 드디어 조선과 후금은 맹세 의식을 통해 화친조약을 맺었다. ①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그대로 유지한다. ② 후금과 조선은 형제관계를 맺는다. 이게 주요 내용이다. 후금이 명목상 형의 나라가 되었고 조선은 동생의 나라가 되었다. 조선은 세폐(歲幣)라는 이름의 전쟁 배상금도 물게 됐다. 그래도 인조는 이 정도에서 호란이 수습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잃은 것이 많았다. 반정의 정당성을 상실했다. 정권의 자체 명분도 잃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그렇게도 비판했는데, 오로지 명나라만을 섬겨야 한다고 외쳤는데, 그래서 광해군을 폐위시키기까지 했는데 정작 자신들은 명나라를 배신한 꼴이 되었다.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으면서 어쨌든 친금(親金)을 공식화한 셈이 되었다. 자괴감, 무력감. 인조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정묘호란 〈화친은 항복인가〉」중에서
인조가 즉위하자 백성들은 기대의 눈빛으로 조정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광해군 사람들보다 인조 사람들이 더 나을 거라고 여겼을 것이다. 또 그래야 했다. 그러나 이내 기대는 실망으로 바뀐 것 같다. ‘그놈이 그놈’이었나보다. ‘그놈이 그놈’이 아닌 세상을 살고 싶었는데 말이다. 인조 즉위 3년째인 1625년, 여염에 상시가(傷時歌)가 떠돌았다. 상시가란, ‘그릇된 시대상을 마음 아파하는 노래’이다.
아, 너희 훈신들아, 스스로 뽐내지 마라.
그들의 집에 살면서, 그들의 땅을 차지하고
그들의 말을 타며, 또 그들의 일을 행하니
너희와 그들이 다를 게 뭐 있나?
상시가를 통해 백성들이 인조 정권에 물었다. 뭔가 대단한 걸 할 것처럼 반정 일으켜 들어선 정권아, 너희와 광해군 때 그들과 뭐가 다른 거냐?
---「정묘호란 〈백성의 사늘한 눈빛〉」중에서
김자점은 반정 참여를 계기로 인조 조정에서 권력을 휘두르며 호사를 누렸다. 인조의 총애를 받고 영의정까지 올랐다. 그러다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면서 날개가 꺾이고 귀양 갔다. 유배지에서 김자점은 어떤 짓을 했을까. 청나라에 몰래 연락했다. “저기요, 새 임금이 청나라를 치려고 해요. 청나라 연호도 안 쓰고 있어요.” 일러바쳤다. 그래서 나라에 큰 소동을 일으켰다. 다시 말하는데, 그는 몇 년 전 병자호란 때 청군과 싸우는 조선군 총사령관이었다. 노비 송해수, 이국화 등은 자결로써 청에 저항했다. 평생 따듯한 손길 한번 주지 않던 나라 조선. 그래도 조선은 내 나라였다. 정명수의 나라는 청나라였다. 그러면 김자점의 나라는 어디일까?
---「병자호란 〈송해수·정명수·김자점〉」중에서
강화성을 장악한 노왕(도르곤)은 “군병을 단속하여 살육을 못 하게 하였으며, 제진(諸陣)으로 하여금 사로잡힌 사녀(士女)를 되돌려 보내도록” 했다. 그런데 그가 강화를 떠나자마자 몽골병이 난을 일으켰다. 난을 일으켰다는 것은, 무슨 반란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소란이나 항의 시위 정도의 의미에 가깝다. 약탈하지 말라는 청군 지휘부의 명을 거부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가정해 보자면, 전투 참여에 대한 대가로 강화에서의 약탈권을 요구했을 수 있다.
몽골병들은 강화도 전역을 누볐다. 저 멀리 마니산까지 가서 약탈, 납치, 방화, 살인, 겁탈을 마구 해댔다. 당시에는 마니산이 강화 본섬과 떨어진 별도의 섬, 고가도였다. 물이 빠진 뒤에는 걸어서 들어갈 수 있었을지 모르나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그곳까지 기어이 간 몽골병, 참으로 지독했다.
끌려가는 사람들과 말, 소가 길을 가득 메웠다. 끌려감을 면한 노인들은 알몸이 되었다. 그 추위에 옷을 빼앗긴 것이다. “다니는 길마다 눈 속에 버려진 어린아이들이 가득했으며, 죽은 아이는 서로 베고 누워 있고, 산 아이는 기어 다니며 혹은 죽은 어미의 젖을 빨기도 하고, 혹은 어미를 부르고 할아버지를 부르며 구르다 다시 쓰러지니,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강화도는 생지옥이었다.
---「병자호란 〈청군의 만행〉」중에서
힘겹게 쓴 항복문서를 김상헌이 북북 찢어 버렸다. 얼마나 화가 날 일인가. 문서가 찢어지듯 자신의 가슴도 찢어졌을 것이다. 최명길은 찢긴 문서 조각을 주섬주섬 주웠다. 호란이 끝난 어느 날 최명길이 인조에게 말했다.
“그 글 속에 실정에서 벗어난 말이 없지 않아서 김상헌이 보고서 통곡하고 찢어 버리면서, ‘나를 죽여라.’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신은 웃으면서 답하기를, ‘말뜻인즉 옳다. 그렇지만 이 글을 버릴 수는 없으니 응당 고쳐 써서 보내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상황에서 어찌 웃으며 말할 수 있었을까. 최명길 신도비명에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이 나온다. 최명길이 김상헌에게 말했다. “문서를 찢는 사람이 없어선 안 됩니다. 그리고 찢긴 문서 조각을 주워 맞추는 사람도 마땅히 있어야 합니다.” 조정에 자신처럼 항복문서를 쓰는 사람이 있으면, 그걸 찢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최명길의 말속에 묵직한 가르침이 있다. 항복을 말한 최명길도, 끝까지 싸우자는 김상헌도 목적은 같았다. 나라를 위한 마음이었다. 자신의 부귀영화를 따진 선택이 아니었다.
---「병자호란 〈1637년, 남한산성 일기〉」중에서
광해군을 폐하고 왕이 된 인조는 즉위 초에 “금수(禽獸, 짐승)의 땅이 다시 사람의 세상이 되었으니, 뭐라 형언할 수 없다.”라며 감격했었다. 그 ‘사람의 세상’이 인조에게 참으로 고단하였다.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신하의 반란으로, 외적의 침략으로 세 번이나 피란 짐을 싸야 했다. 어디 임금만 고단했으랴. 백성들의 피눈물이 넘쳐나는 세상이었다. 호란의 시대, 실로 아팠다.
---「떠나간 이들과 이 땅에 남은 것 〈실록과 역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