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부, 나 빨리 백 살 되고 싶어. 근데, 하부 함머 지금 몇 살이야?”
너는 ‘백 살’을 무척 힘주어 큰 소리로 말하더구나.
하부와 함머는 네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생각해봤단다.
하부 함머한테 늘 귀염을 받는 게 기쁘고 고맙고, 더군다나 하부 함머를 많이 사랑해서 그렇게 말했지? 하부 함머도 너무너무 기쁘고 고맙구나.
원재야.
지금은 아직 겨울이라 춥지만, 얼마 안 있으면 봄이 되어 날씨가 따뜻해질 거야.
더구나 너는 곧 유치원에 다니게 될 거고 많은 친구들이 생기게 될 테니까 신나지 않아?
그러려면 감기 안 걸리도록 밤에 이불 꼭 덮어 자고, 엄마가 해주시는 밥 맛있게 많이 먹어 건강해야 돼.
하부 함머는 유치원 옷을 입은 멋진 손자를 보게 될 게 벌써부터 기다려지고 즐겁구나.
안녕, 잘 자거라.
원재야.
이제라도 우리사이에 둘이만 아는 훈훈한 ‘소통의 자리’를 마련해놓고 이런 대화를 이어갔으면 기쁘겠구나.
네가 앞으로 부딪치게 될 여러 가지 문제와 생각들에 관해 이야기해주면, 할아버지가 자신의 청소년기 경험과 기억을 감안한 조언으로, 해결까지는 아니더라도 도움이 될 방향을 찾아줄 수 있을 거 같거든. 어때, 찬성해줄 거지?
내가 짐작컨대, 너희아버지는 사업일로 워낙 바쁘기도 하거니와 성격상으로도 너에 대한 자상스런 멘토링이 부족하지 않겠나 싶어. 아버지의 존재감이 절실히 필요한데도 곁에 그 모습이 안 보일 때의 심정은, 나도 너 만할 적에 싫도록 경험한 사람이란다.
너희할머니는 나더러 영감탱이가 혼자 잘나서 독단과 고집이 센 사람이라고 핀잔하는데, 타고난 성격도 성격이지만, 어쩌면 어렸을 때 그처럼 성장한 탓도 있는지 모르겠구나.
그렇더라도 사람이 뚜렷한 자기주관과 의연한 이지로 정신무장을 항상 하고 있어야 함은 당연하며, 우리 손자도 그런 개성의 소유자라고 믿는다.
그런데, 원재야.
할아버지가 말은 이렇게 원론적으로 할망정 가슴으로는 그다지 석연치 않구나. 왜냐하면, 나는 요즘 학생들이 경쟁심리에 쫓겨 죽어라 하고 공부하는 걸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공부 열심히 해서 성적을 높이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 그렇지만, 한창 성장기에 운동과 레크리에이션으로 몸과 마음을 활기차고 즐겁게 하면 나중에 사회생활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데 훨씬 더 요긴하고 값진 에너지가 축적되거든. 그 귀중한 활력소를 원천적으로 빼앗긴 거나 다름없는, 너를 포함한 요즘 중고등학생들 전부가 가엾구나.
나는 지금 너 만한 나이 무렵에 이런 궁리를 했느니라.
‘어차피 내가 걸어가야 할 방향은 정해져 있고 씨름해야 할 상대는 나 자신인데, 누구나 다 하는 학과공부 구태여 머리 싸매고 해서 무슨 대단한 소용이 있을까?’
시건방지고 무모한 생각이라 할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타고난 두뇌로 적당히 앞가림하며 혼자 사색하고 읽고 쓰는 문학공부를 꾸준히 한 결과가 오늘의 내 모습이란다.
저 나름으로는 초등학교 6년과 중학교 1년 동안 범생이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제가 공부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못 해봤어요. 성적이 잘 나오면 부모님 기분이 좋고 칭찬받는다는 성취감은 있었지만, 목표가 불투명했거든요.
더구나 중학교의 공부는 초등학교 시절과는 꽤나 달랐어요. 초등학교 때 제가 했던 공부량과 방식으로는 영 아니었거든요.
갈등은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더 심화되었어요. 새로운 반 친구들은 나쁜 애들이 아니었지만, 대다수가 착한 담임선생님을 무시하고 때때로 소란을 피우기도 했었죠. 그땐 마냥 재미있었어요. 제 목표와 가치관이 뚜렷하지 않아서 그냥 아무생각 없이 흘러갔어요. 그러다 보니 성적이 C를 넘어 D, E까지도 떨어지더군요.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지만, 가족들은 당연히 더 많이 놀랐지요. 부모님은 제가 인터넷만 하면서 하루를 소비하는 모습에 안타까워하시고, 일주일에 몇 번씩은 큰소리가 났었어요. 사실 성적의 문제라기보다는, 제가 사춘기라는 핑계로 부모님께 감정을 많이 푼 게 더 큰 원인이었어요.
앞의 것은 지동설을 부르짖다가 죄에 몰려 재판까지 받은 중세기 물리학자 갈릴레이의 말이고, 뒤의 것은 세계최고의 천재과학자로 꼽히는 아인슈타인의 말이다.
각각 인류역사의 새 지평을 연 위대한 선각과학자들이 한 이 말이 무슨 뜻인지 한번 헤아려보자꾸나.
갈릴레이는 사람이 누구나 태어나면서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무한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걸 스스로 계발하도록 주위에서 적극 도와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나봐.
이에 비해, 아인슈타인은 글을 읽거나 남의 가르침을 받아 터득하는 지식이나 지혜보다 스스로의 상상력을 더 중요하게 앞세웠구나. 대부분의 창조적 발명과 발전은 그 상상력의 소산이라는 거지.
둘 다 탁월한 의견이지만 의미상 개념의 차이가 있는데, 우리 손자 생각은 어느 쪽에 더 가깝다고 스스로 판단하는지 들어봤으면 좋겠네.
솔직히 말하면, 이 할아버지는 아인슈타인 쪽에 다가서고 싶구나. 크게 내세울 정도는 못되지만, 세상 모든 사물에 대한 폭넓은 상상과 끊임없는 탐구심 덕분에 이나마 ‘오늘의 나’가 존재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하니까.
아인슈타인은 또 ‘중요한 것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이라고도 했는데, 멈추지 않는 질문이란 게 무슨 뜻이겠어. 궁금한 것을 그냥 넘겨버리지 않고 해답을 얻고자 끝까지 물어보고 탐구하는 태도가 아니겠니?
저희는 기본적으로 맨몸운동을 위주로 하고, 주말에는 직접 만나서 새벽 한강을 마포대교까지 뛰었어요. 맨몸운동은 또 은근 재미가 붙어서 매일매일 딱 두 가지, 턱걸이와 팔굽혀펴기만 죽어라 실천했어요. 밥도 무슨 머슴밥마냥 퍼먹는, 말하자면 ‘벌크업’을 위한 루틴이었죠.
그렇게 한 달을 한 지금, 체중이 얼마나 불었나 궁금하시죠? 그건 마지막 부분에서 알려드릴게요.
이렇게 운동을 하다 보니, 작은 변화지만 확실히 가슴통도 더 볼록해져 보이고 일상적으로 힘이 솟더라고요.
이렇게 고2까지만 해도 할아버지를 업기는 물론이고 번쩍 안아 올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ㅎㅎㅎ
근데 그럴 일도 없을 것 같은 것이, 할아버지께서는 어린 시절의 저를 보고 순수한 어린이의 이미지로 각인하셨듯이, 저에게 할아버지는 체구는 작아도 꼿꼿하고 언제나 의지와 기운이 넘치는 이미지로 박혀 있거든요. 할아버지께서 골골하게 업히시는 모습은 상상이 안 된달까요.
특히 중학생이 되어서는 ‘코스모스’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같은 과학 분야의 책들을 종종 찾아 읽었어요. 덕분에 그쪽 배경지식이 수능대비 비문학 문제집 풀이에 도움이 되더라고요.
재밌는 건, 오히려 문학을 덜 읽어서 고전문학 지문에는 애를 먹는 중이에요. 이렇듯 전에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동안 읽은 책들 때문에 제 지적 능력이 성장한 게 느껴져요. 이래서 사소한 거지만 습관을 만드는 게 참 중요한 것 같아요. 꾸준히 읽다가 적성에 맞는 분야 또는 작가에 꽂히면 자연스레 찾아보게 되고, 그렇게 점점 성장하니까요.
동생은 제 경우와는 달리 책 읽어줄 사람이 없어서 습관이 잡히지 않은 게 아쉬워요.
저도 한편으로는 공부할 게 많다는 핑계로 독서를 놓다시피 하고 있는데, 이번 기회에 우리 가족 모두 책 읽는 습관을 길러야겠어요.
아마 주말이나 다음 주 중에 할아버지 댁에 놀러갈 텐데, 할아버지 서재에서 저랑 동생 읽을 문학 책 한 권씩만 추천해주세요. 자기 전에 틈틈이 읽어볼게요.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