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를 비롯해서 플루타르코스의 작품 속 인물들은 그리스 로마 역사 속에서 한 획을 그은 영웅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삶 또한 우리의 삶 속에서도 재현되는, 우리의 다양한 모습들이 담겨 있다. 그 영웅들의 성장과 성공, 실패와 몰락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우리 삶을 새롭게 이끌어 나갈 힘을 얻을 수 있다. (...)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우리는 우리 개개인의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는 한 명의 알렉산드로스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돌아보고 기억하며 기록하는 한 명의 플루타르코스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3장 영웅의 성공과 몰락」중에서
이 신화의 메시지는 적절한 높이를 지킨다는 것의 중요성이다. 우리가 갖게 된 부와 권력, 명예는 이카로스의 날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성취와 소유에 취해 정도 이상으로 우쭐한다면 이 신화 속의 이카로스처럼 날개가 녹아내려 추락하고 말 것이다. “많이 가질수록 낮아지고 겸손해야 한다, 분수를 알고 자족해야 한다, 너무 나대지 마라”라는 말을 많이 하고, 많이 듣는다. 인생의 지침이 될 훌륭한 교훈이긴 하다.
그러나 이 신화는 이런 교훈이 가질 수 있는 또 다른 위험성도 함께 경고한다. 이카로스가 적절한 수준보다 더 낮게 날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겸손하고 분수를 알며 자족하는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았을까? 아니다. 날개가 습기를 먹어 또 다른 추락의 신화를 만들었을 것이다. 너무 낮지 않게, 너무 높지 않게, 적절한 수준의 비행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이카로스의 추락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4장 영웅들은 왜 추락했을까」중에서
『임경업전』을 통해 사람들은 허구이지만 임경업에 쩔쩔매는 호국을 보기도 하고, 또 간신배와 달리 일반 백성을 위하는 따뜻한 임경업을 만나기도 한다. 결국에는 청과 간신배에 의해 죽임을 당하여, 다른 영웅 소설과 달리 비극적 결말을 맺는다는 점에서 임경업(전)은 사람들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았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실제 인물 임경업과 소설 『임경업전』은 분리되지 않고, 사람들에게 인간 임경업은 『임경업전』의 영웅으로 동일시된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말한다. 여기서의 시대는 영웅이 살았던 시대와 꼭 같은 시대는 아닐 수 있다. 임경업처럼 영웅화의 과정은 사후 반세기가 지나서 이루어지기도 하며,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망과 염원을 담아 영웅을 직접 만들어 내는 작업을 통해 완성되기도 한다. 우리는, 또 우리 시대는 어떤 영웅을 기다리고 있는가? 아직은 오지 않은 미래 영웅의 출현을 기다리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이미 와 있는데도 우리가 알아채지 못했던, 고전 속에 묻혀 있는 과거의 그 누군가를 불러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5장 도래한 영웅, 도래할 영웅」중에서
소설 속 길동의 무술 실력, 지략과 재주는 이미 조선의 으뜸으로, 길동이 조선의 왕이 되고자 마음먹는다면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대의 도덕적 관념으로는 길동이 인질이 된 아버지와 형을 모른 체한다거나 왕이 되는 것을 용납하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는 ‘헬조선’ 현실의 벽이 너무 높고 견고했을지도 모른다. 이에 홍길동은 영웅적인 능력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율도국이란 가공의 도피처에서 이상을 실현할 수밖에 없었다.
---「6장 의적에서 민중의 영웅으로」중에서
독자는 소설 속 영웅들이 허구상의 존재임을 무의식중에 전제하고 있다. 동시에 독자는 자신이 소설을 읽으며 이입하는 영웅들의 모습은 호쾌하지만, 실제 영웅들의 삶은 지금 소설을 읽으며 고달픈 현실에 괴로워하는 독자 자신보다도 못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다. 즉 독자는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난 재주를 가진 영웅들조차도 현실에서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오직 소설 속에서만 누린다는 사실을 내면에서 끊임없이 되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이 괴로워 영웅들의 이야기를 찾는 독자들에게 ‘그 잘난 영웅조차도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인식은 한편으로 자기 위안으로 작용하지는 않았을까. 비록 독자 자신이 영웅처럼 불후의 업적을 세우지는 못해도, 그 위대한 영웅들이 허구의 세계에서나 성취할 수 있는 소중한 사람들과의 일상을 자신은 현실에서 누리고 있다는 소박한 행복감과 함께.
---「7장 영웅들의 진부하지만 특별한 말년」중에서
우리는 베오울프에서 아더왕으로, 또 호빗 프로도와 해리 포터로 이어지는 영웅의 변천사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영웅의 모습은 절대적이지 않고, 시대에 따라 변모한다. 과거의 영웅에게는 신과 같은 초월적 능력을 가진 반인반신의 모습도 있었고, 지혜로운 현자의 모습도 있었다. 이제 우리 시대의 영웅은 프로도나 해리처럼 좀 더 인간적이고 평범한 ‘보통’ 사람의 모습에 가까워진 것 같아 보인다.
제정일치의 사회에서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로, 나아가 지금은 민중의 힘에 기반한 민주주의가 대세인 사회로 바뀌었고, 이에 따라 영웅의 모습도 베오울프에서, 아더왕을 거쳐, 프로도와 해리로 변했다. 각 시대가 요구하는 영웅의 모습은 그 시대의 권력의 향방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결국 각 시대가 필요로 하는 영웅은 그 시대를 반영하고, 우리는 영웅의 모습을 통해 시대를 읽을 수 있다. 영웅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인 것이다.
---「9장 영문학 속 영웅 이야기」중에서
결국 이들을 자객으로 내몬 것도 또 영웅으로 빚어낸 것도 그들을 둘러싼 당시의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는 치세라는 말보다는 난세라는 말이 훨씬 잘 어울린다. 1980년의 광주는 오랜 군부독재의 부패와 부조리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던 시절이고, 예양과 형가가 살았던 시절은 봉건제라는 사회 질서가 우르르 무너지고 군사력과 경제력 같은 완력을 발판으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던 때였다. 권력이나 재력을 소유한 자들이 자기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낼 수 있었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의 형세가 도덕이나 문학과 예술 같은 인문 역량이 힘쓰는 시대에 비해 영웅 출현에 한층 적합했던 게다. 덕분에 그러한 시세를 타고 우뚝 서고자 하는 이들이 부쩍 출현할 수 있었고, 그러한 시세 탓에 영웅의 길로 내몰린 이들도 적잖이 생겨났다. 한마디로 난세에 영웅이 많이 났음은 우연이 아니라 당연한 귀결이었다.
---「13장 영웅과 자객 사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