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네 살 나이에 전문 SF 작가로 자리 잡은 딕은 이 결정이 그의 삶 전체에 걸쳐 유효하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저 기회를 한 번 잡았을 뿐이라고, 일시적 상황에 역시 일시적으로 적절하게 반응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 p.37
필은 음반 가게에서 일하던 시절 밤중에 글을 쓰는 버릇이 생겼는데, 이 버릇은 나중에까지 계속되었다. 아침이 되면 집 주변을 어정거리고 ─ 움직이는 반경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 서가에 꽂힌 중고 음반들을 점검하고, 특히나 황량하게 방치된 손바닥만 한 정원에 앉아 뭔가를 읽었다. --- p.42
하지만 그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어쩌면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에서 어떤 의미를, 하나의 질문으로 여기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일 수 있는 것에서 어떤 대답을 찾는 범주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의 직업이 하는 일은 바로 이런 질문들을 상상하는 거였다. --- p.72
딕이 전에 쓴 비슷한 종류의 이야기들에서, 주인공은 세계의 질서에 관련된 엄청난 비밀을 우연히 발견하고, 믿으려는 이 하나 없는 주변 사람들에게 그것을 설명하려고 무진 애쓴다. 이 소설에서 딕은 또 다른 플롯을, 좀 더 소름 끼치는 플롯을 시도해 본다. 〈그만 빼놓고 모든 사람이 모른다〉가 아니라 〈그만 빼놓고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이다. --- p.80
그런데 불행히도 딕이 살면서 추구하지 않는 게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지혜였다. 『주역』을 기준 틀로 삼는 도교 사상이 유연함과 인내와 초연함의 효용에 대해 가르치는 모든 것, 더 넓게 말하자면 경험과 금욕에 바탕을 둔 삶의 접근 방식들은 그에게 전혀 흥미가 없었다. 이 점에서 그는 본질적으로 비의(秘儀)주의자였다. --- p.107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런 심리 테스트를 해보는 것은 딕이 소년 시절에 즐기던 놀이 중 하나였다. 그는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이 어떤 종류의 정신병에 대한 성향이 강한지 보기 위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질문했을 때, 거기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대답하는지 살폈다. --- p.137~138
『높은 성의 사내』를 발표한 이듬해 쓴 『화성의 타임슬립』에서 딕은 메스칼린을 잠시 맛보고 돌아온 헉슬리보다 훨씬 진지하게 〈정신병자로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작품 전체에 걸쳐 등장인물들에 파급을 미치는 어떤 자살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소설은 지구가 방기하고, 경쟁 세력들이 제각기 영토를 차지하고 힘을 겨루는 화성을 무대로 펼쳐지는 어떤 부동산 투기 이야기다. --- p.141
다른 사람의 악몽 속에서 죽는 것보다 끔찍한 일이 있을까? --- p.144
암페타민은 그로 하여금 몇 주 만에 소설 한 권을 끝내 2년 동안 10여 권이나 출판할 수 있게 해주었으나, 약물의 이러한 도움에는 끔찍한 우울증이라는 대가가 따랐다. --- p.149
이제 딕 주위에 모여든 팬들은 그의 안에 있는 어설픈 배우를 밖으로 끌어냈다. 그에 대한 전설이 만들어져 있었고, 그는 결코 이 전설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의 책들, 어쩌다 대중 앞에 나타났을 때의 모습, 그리고 포인트 레예스 시절 거의 은둔자처럼 살았던 것을 바탕으로 사람들은 그가 이상하고 마약 중독이고 망상적이고 천재적인 인물이라며 떠들어 댔다. 사실 그는 그렇게 보이려 애쓰지 않아도 그 모든 것이었다. --- p.202
양분법적 논리를 좋아하는 그는 세상에 두 종류 사람밖에 없다고 결론 내렸다. 한쪽 사람들에게는 현실의 실체가 빛과 생명과 기쁨이고, 다른 쪽 사람들에게는 죽음과 무덤과 혼돈이었다. 가장 깊고 어두운 심연에서도 그리스도를 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도스토옙스키의 스비드리가일로프처럼 영원을 거미줄투성이의 불결한 욕실로 상상하는 사람들도 있다. --- p.212
딕이 생각하기에, 모든 악의 근원은 자기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 자기 껍데기 안에 갇히는 것, 정신 의학적으로 말하자면 〈조현병〉으로 진단되는 것이었다. --- p.225
어떤 SF 작가, 그것도 형편없는 문체의 작가가 쓴 글에서 전율이 느껴질 뿐 아니라 본질적인 무언가를, 근원적인 무언가를 접했다는 확신이 들게 하는 구절들을 발견하는 것은 참으로 기묘한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일부분이며, 아직 아무도 그 깊이를 알아내지 못한 심연을 언뜻 보게 되는 것이다. --- p.229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에서 필 딕은 〈키플kipple〉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는데, 이 단어는 엔트로피 법칙에 의해 만물이 지향하게 되는 분해와 쓰레기와 혼돈의 상태를 뜻한다. 딕의 삶은 이 〈키플〉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지금 〈딕의 삶〉이라고 말했지만, 그게 정말 자기 삶인지 알 수 없고, 자기가 아직 살아 있는지도 확신하지 못하는 마당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 p.265
『유빅』은 끝내기 불가능한 책이었다. 일반적으로 딕은 〈끝〉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을 끔찍이 힘들어했는데, 자기가 쓰는 작품이 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 p.280
심하게 덴 적이 있는 그는 더 이상 믿고 싶지 않았다. 현실이 무언가를 감춘 담요라고, 우리가 바늘을 찌르기도 하고 다시 빼내기도 하지만 그 뒷면만 볼 뿐 나중에 찬란하게 드러날 앞면은 보지 못하는 어떤 태피스트리라고 말이다. --- p.351
그의 안에는 신이 20세기 후반의 미국에 자기 말씀을 전하기 위해 선택한 계시받은 자가 들어 있었다. 또 거기에는 이 계시받은 자가 빠져드는 환상을 끊임없이 고발하는 다른 사람도 있었다. --- p.418
딕은 반복해서 말한다. 우리가 삶 가운데서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자동차를 수리하는 거라고. 어떤 가상의 차, 일반적인 차를 말하는 게 아니다. 세상에 일반적인 차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개별적인 차들뿐이며, 우리에겐 살아가면서 만나는 차들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머지는 모두 위험한 것들이다.
--- p.501~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