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나카 미치요의 제안은 ‘지나사’를 ‘동양사’로 바꾸는 것 하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방사’를 ‘일본사’로, ‘외국사’를 ‘서양사’로 바꾸는 것까지 포함된 것이었다. 문부성은 즉각 이를 채택했지만 1902년 후반에 들어서야 일본사, 동양사, 서양사 3분과 교과서가 비로소 학생들에게 배포되었다. 새로운 교과서를 만드는 데 그만큼 시간이 소요되었던 것이다. 필자는 한국사에 관한 서술은 당연히 동양사 교과서에 나올 줄 알고 자료 분석에 임했다. 그런데 어느 동양사 교과서에서도 한국사 관련 서술을 찾아볼 수 없었다. 놀랍게도 한국사는 일본사 교과서에 들어가 있었다.
---「프롤로그」중에서
오늘날의 ‘동양’, ‘동양사’란 용어는 19세기 중·후반에 동서가 새롭게 만난 시기에 서양 문명 수용에 가장 앞선 일본이 주변국으로 진출하기 위해 ‘특별한’ 의도로 새로 만들어낸 단어이다. (중략) ‘동양사’는 중국 북방 곧 만주, 몽골의 땅에서 여러 유목민족이 명멸한 역사를 적극적으로 다루었다. 이것은 유목민족의 역사를 돋보이게 하려는 것보다 일본제국이 중국 본토를 지배할 역사적 근거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 것에 불과했다. (중략) 일본제국은 한마디로 동쪽의 대영제국을 꿈꾸었다. 이를 목표로 새롭게 제패할 지역 세계를 일컬어 ‘동양’이라고 했다. ― 35·37쪽 「1장 ‘동양사’ 용어의 유래와 인식 현황」 중에서
메이지 신정부 초기에는 반대 세력의 저항으로 내정을 다스리기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데도 일찍부터 홋카이도, 류큐, 타이완, 조선을 상대로 일본의 영향권을 넓히는 침략 행위를 일삼았다. 이러한 주변 지역 또는 국가에 대한 강제점령 또는 도발은 후술하듯이 모두가 조슈 세력의 스승 요시다 쇼인이 증기선 시대에 일본이 서양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고 살아남을 길로 제시한 것을 실현하는 행위였다. 열강에 앞서 힘이 닿는 대로 주변국을 먼저 차지하는 것이 곧 일본이 살아남는 길이라는 가르침을 국가의 교조(敎條)로 삼았다. 이처럼 메이지 신정부는 태생적으로 대외 침략주의가 국기(國基)였다.
---「2장 메이지 정부의 대외 침략주의」중에서
1885년 12월 내각제 도입에서부터 1889년 2월 「대일본제국헌법」 반포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제도적 변혁으로 일본제국은 천황제 국가주의 체제를 확립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한 이 작업은 독일 헌법을 모델로 했다고 하지만 국가주의 성향 전반은 독일에서도 유형을 찾아보기 어려운 면이 많다. 메이지 초기에는 구화주의(毆化主義)라 일컬어지던 프랑스, 미국의 자유주의 사조가 유행이었고, 이 사조가 자유민권운동의 흐름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1880년대 국가주의 체제 확립으로 상황은 크게 변했다. 제국헌법에 이어 천황의 「교육칙어」가 반포되었듯이, 국가주의 창달에는 교육 분야가 군사조직 못지않게 큰 비중을 차지했다. 모든 제도의 이행에서 국가주의 정신교육이 강조되었다.
---「3장 1880년대 국가주의 체제 확립과 요시다 쇼인」중에서
1894년 상반기 나카 미치요의 ‘동양사’ 제안은 곧 일본제국의 역사 3과 교과서 제도가 만들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즉, 개국 이후 서양 역사가 알려지면서 본방사, 지나사, 외국사로 구분되었던 역사 분야가 일본사, 동양사, 서양사로 ‘체계화’되었다. 이것이 천황의 「교육칙어」와 맞물려 역사교과서 제도에 먼저 반영되었다는 것은 일본제국 역사교육의 실체적 특성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5장 일본·동양·서양 3과 역사교과서 제도 수립과 천황제 국가주의」중에서
‘동양 먼로주의’는 요시다 쇼인의 『유수록』이 그리는 일본 천황이 지배할 세계의 다른 표현이다. 요시다 쇼인은 태평양으로 격한 ‘이웃’ 미국의 위협을 없애기 위해 일본인의 캘리포니아 진출을 과제로 삼았다. 그 미국이 세계대전으로 부자 나라가 된 만큼, 지나에 대한 관심이 많을 것이며, 그렇다면 일본제국이 지금 도모하고 있는 동양 세계의 구축, 곧 조선과 만주를 발판으로 지나를 장악하고자 하는 일본제국의 계획과 충돌할 것이 자명하다는 것이 도쿠토미의 우려였다. 실제로 당시 미국이 중국 진출을 꾀한 흔적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과도한 자기방어 논리로 국민을 선동한 모양새이다. ---「7장 제1차 세계대전 전후 도쿠토미 소호의 반미주의」중에서
1923년 9월의 간토 대진재의 참사에도 붓을 놓지 않지 않았던 도쿠토미 소호는 1925년 2월에 『국민소훈(國民小訓)』을 세상에 내놓았다. 65쪽에 불과한 소책자였지만, 사회적 반응은 컸다. (중략) 이 책은 도쿠토미 소호 황도주의의 결정판이란 의미가 엿보이는 것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황실 중심주의는 일본 국민의 열쇠이다. 이 열쇠로서 일본 역사가 해명되고, 일본의 국체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열쇠가 있어서 일본의 사회적 기구를 알 수 있고, 일본에 관한 모든 문제, 거의 일체가 이 열쇠로 해석된다. 일본은 황실의 연장인 가족적 국가이다. 유신 이전에는 지나를 척도로 하고, 이후에는 구미를 표준으로 하여 일본이 없었다. 근래 마르크스 유물사관으로 황국의 사회기구를 해석하려 하고, 루소의 사회계약론으로 우리 국체를 밝히려 하는 것은 모두 50보, 100보 차이의 오류이다.” 이 부분은 1910년대부터 저술을 통해 주장해온 황실 중심주의에 대한 자신감에 찬 언설이다. 구미의 모든 사상체계를 의식적으로 배제하는 논리이다. 『근세일본국민사』 집필을 통해 얻어진 자신감으로 여겨진다.
---「8장 1920년대 대륙 진출과 도쿠토미 소호의 파시즘 저술」중에서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을 ‘태평양전쟁(Pacific War)’이라고 불렀다. 반면에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에 대해 별도의 명칭을 내지 않고 중일전쟁 곧 ‘지나사변’을 포함하여 ‘대동아전쟁’이라고 불렀다. 대동아는 곧 1890년대에 처음 상정된 대일본제국 천황이 지배하는 새로운 동아시아 세계 곧 ‘동양’의 더 확장된 표현이었다. 요시다 쇼인이 1854년 제1차 투옥 때 옥중에서 쓴 『유수록』에서 제시한 주변국 선점론에서 마지막 대상으로 지정한 태평양 저편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를 차지하기 위해 일본제국 군인들은 사투를 벌였다. 그들은 도쿠토미 소호가 수십 년 동안 뿌린 황도 사상 마취제에 취하여 요시다 쇼인의 충직한 학도가 되어 황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있었다.
---「9장 1930~1940년대 전시체제와 도쿠토미 소호의 파시즘 국민독본」중에서
이처럼 도쿠토미 소호가 긴 여정에서 도달한 곳은 “자유주의를 퇴치하라”고 외치는 자유, 자유주의 배척의 공간이었다. 젊은 시절 자유민권운동에 열정을 쏟던 그가 노년에 황실 중심주의, 황도 파시즘에 매몰되어 자유주의 배척자가 되었다. 그것은 도쿠토미 혼자의 여정이 아니라 일본제국이 걸어온 길이었다. 조슈 세력이 도쿠가와막부를 타도하고 왕정을 복구하면서 내세운 존왕 사상이 오도한 긴 여정이었다. 주변국 선점론을 내세운 요시다 쇼인이 한 사상가로 남지 않고 성자(聖者)처럼 받들어진 것이 불러온 종국이었다.
---「9장 1930~1940년대 전시체제와 도쿠토미 소호의 파시즘 국민독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