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해 나는 아내의 그런 대꾸에는 어떤 불평도 늘어놓을 생각이 없었다. “저쪽 산에 목련꽃이 피어 있대. 구경 좀 해 보고 싶소.” “어머, 그걸 못 봤어요?” 아내는 너무 기뻐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많이 피어 있었는데….” “거짓말 좀 하지 마.” 이번에는 내가 자못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무리 책을 보고 있어도, 지금 어떤 풍경이고, 어떤 꽃이 피었는지 정도는 잘 알고 있거든요….” “뭐, 어쩌다 우연히 본 거겠지. 나는 기소가와강만 쭉 보고 있었어. 강 쪽으로는….” “봐요, 저기에 하나.” 아내가 갑자기 나를 가로막고 산을 가리켰다. “어디에?” 나는 아내가 말해 준 곳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거기에서는 고작 희끄무레한 뭔가를 얼핏 보았을 뿐이다. “방금 봤던 게 목련꽃일까?” 나는 넋이 나간 듯 말했다.다만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그런 아내의 주의를 창밖으로 돌려, 근처 산마루에서 새하얀 꽃들이 무리 지어 피어 있는 목련 나무 한두 그루를 찾아내 여행의 정취를 함께 맛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아내의 그런 대답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그냥 조금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 「목련꽃」 중에서
그 뒤로 나는 거의 정신 나간 사람처럼, 거기 발 아래로 넣어진 남편의 편지를 찢어 버리지 않고 손에 들고 봤더니, 이 어찌 된 일인가, 내가 사복시정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찢어 낸 부분을 반대로 그분한테 보여 준 거였다. 게다가 잘못 보여 준 종이 끝이 절반쯤 더 뜯겨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곧바로 나로서는 그 엷은 구름에 가려진 으스름달이 희미하게 비치는 툇마루 가장자리에서 사복시정이 돌아갈 때 뭔가 자꾸 흥얼거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사복시정한테 보여 줬던 종잇조각 바로 뒷면에, 당시 나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듯 잔뜩 휘갈겨 낙서한 상태였다는 걸 그때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거다. “새삼스레 어떤 망아지가 따르리요….” 나는 별안간 입 밖으로 튀어나온 그 글귀에 가슴이 미어지면서도, 왠지 모르게 나데시코의 슬픈 눈빛이 공연히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내게 무슨 말을 하려다가 금세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은 듯한 나데시코의 귀여운 눈빛이, 이제껏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그날 밤에는 유독 내 눈앞을 언제까지고 떠나지 않았다.
--- 「두견새」 중에서
“자네는 교토에서 왔다던데?” 장관은 자리에 움츠리고 앉은 여자의 뒷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위로하듯 물었다. “….” 여자는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자는 몇 해 전 일을 떠올렸다. 몇 해 전에는, 시골에서 상경한 알지도 못하는 사내에게 몸을 맡기고 교토를 떠나야 했던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가엾었다. 그리고 그때는 상대편 사내나 누구에게도 멸시당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번은 그 상대가 오히려 대단한 분이니만큼, 그런 상대가 말하는 대로 하려고 하는 자기 자신이 왠지 스스로 생각해도 조롱당하는 듯하고─또 아무리 상대한테 멸시받아도 별수 없는─공연히 쓸쓸한 기분마저 들었다.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남들 눈에 띄기보다는 여태껏 그러했듯 아무도 모르게 하녀로 덧없이 묻혀 지내는 게 얼마나 더 나은 삶인지 미처 몰랐다…. “나는 자네를 어디서 본 듯 이상하게도 신경이 쓰이는구나.” 남자는 차분하게 말했다. 남자가 무슨 말을 해도 여자는 여전히 소매를 얼굴에 가져다 대고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저택 밖에서 마침 호수의 물결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 「광야」 중에서
어느 날, 노모가 아무 할 일도 없고 해서 옛날이야기를 생각해 내어 하쓰에에게 들려주었다.
옛날, 이 마을에 오래된 여우가 살고 있었고, 여우가 남몰래 밤이면, 몇 년 전에 무사에게 살해된 어느 유녀의 무덤가를 헤매다가 가끔 슬며시 무덤에 다가가 그것을 핥아 주었다. 마을 사람들이 결국 그 일을 알고 그곳에 가 봤더니, 무덤에도 저절로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오에후는 옆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도 처음 그 이야기를 듣던 어린 시절의 일, 이를테면 가을날 숲속에서 진홍빛으로 물든 담쟁이덩굴이 휘감겨 있는 오래되고 자그만 무덤 등을 발견하고, 으레 그 여우 이야기를 연상하며 왠지 유녀라는 사람을 애처롭게 생각한 적이 있음을 떠올렸다….
--- 「고향 사람」 중에서
“그때의 겨울은 뜻밖에 슬픈 추억이 되어 버렸지만, 그건 어쩌면 그 무렵, 다치하라도 여전히 살아 있어 함께 놀던 무렵 우리와 왔으니, 아직 한창 젊어 그런 실없는 꿈에 자신의 일생을 거는 데 주저하지 않았지. 뭐, 젊은 시절의 기념물 같은 거겠지만. 그 열 푼짜리 잡기장에 실린 표지 그림을, 나는 이런 낙양을 앞에 두고 마음속 깊이 떠올려 본 적도 있다네…. 그런데 오늘은 자네 덕에 고목나무 숲속의 낙조 광경이 떠오르는군. 눈 덮인 표면에는 나무 그림자가 죽죽 색다른 모습으로 길게 가로놓여 있어. 그게 약간 보랏빛을 띠고 있지. 어디선가 멧새가 희미하게 울어 대며 가지를 옮겨 다니고. 들리는 소리는 그게 유일하지. (그대로 눈을 감는다) 주변에는 토끼며 꿩들이 디딘 발자국이 어지럽게 나 있고. 그리고 그 안에 섞인 또 하나, 누군가의 발자국이 희미하게 나 있지. 그건 내 발자국인지 다치하라의 발자국인지….”
“갑자기 쌀쌀해졌군요. 이제 창문을 닫을까요?”
--- 「눈 위의 발자국」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