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신자들도 근자에 이르러 이전에 비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진 분들이 상당히 많다. 심지어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명목상의 신자들도 물어보면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다는 통계가 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의 삶의 변화나 신앙생활의 열심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세상은 기독교인들에게 특별히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기대하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보면 세상만도 못한 수준을 드러낼 때도 많다. 교리적인 측면에서 신앙의 의식화는 잘 되었는데, 윤리적인 측면에서 신앙의 생활화가 미흡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인은 세상의 지탄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실정이다. 구원의 복음을 ‘값싼 구원’, ‘값싼 은혜’로 만들고 있다. 이에 대해 ‘신자라면 신자답게 살라’는 메시지가 야고보서의 주장이다.
---「9복」중에서
이제 들음은 행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자기가 좋은 말씀을 들었다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좋은 생각을 했다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좋은 말을 했다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귀한 진리를 깨달았다고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 즉 자기기만이요 자기도취다. 신자들이 얼마나 자주 좋은 말씀을 읽고 듣고 말하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온전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듣고 깨달은 것을 몸소 실천하고 행할 때 자기가 변화되는 것이다.
---「청행일치(聽行一致)」중에서
만약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 즉 세상과 정욕을 사랑하게 되면 성령님께서 내 안에서 탄식하면서 근심하신다.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 분통을 터트리신다. 당신은 신앙생활을 할 때, 성령님께서 답답해하시는 것을 느껴 본 적이 없는가? 살면서 성령님이 책망하시는 것을 느껴 본 적이 없는가? 성령님께서 당신에게 간곡히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는가? 그 경고를 듣고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살아가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친밀한 교제가 회복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이 참된 평안을 가져다주고, 더 큰 은혜를 받게 한다.
---「싸움과 다툼의 기원」중에서
신약의 지혜서인 야고보서는 이렇게 묻고 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우리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우리 생명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혜로운 삶이다. 우리는 안개일 뿐이다. 뜨거운 태양이 뜨면 곧 흩어질, 실체 없는 안개다. 세상의 영광도 풀의 꽃처럼 잠시 후 시들고 말 것이다. 이 진리를 진정으로 깨닫는다면 우리는 인생을 허비하지 않게 된다. 세세만년 살 것처럼 방탕하게 살지 않고 정숙하고 질서 있게 살며,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주어진 시간을 선용하여 영원한 천국의 삶을 더욱더 풍요롭게 가꿀 것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중에서
방황하고 있는 영혼을 돌아서게 하는 일은 공동체의 의무다. 물론 공동체 자체도 많은 병폐를 가지고 있다. 악한 말, 불순종, 이웃에 대한 무관심과 차별, 세속주의, 싸움, 질투와 교만, 욕심, 언행 불일치, 물질주의, 착취와 억압, 맹세, 위선, 분노, 원망 등. 그래서 공동체의 이런 문제들을 보면서 낙심하고 시험에 들어 세상으로 나아간 사람들이 많다. 공동체는 자체적인 병폐를 고쳐야 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떠난 영혼들도 돌아오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공동체를 회복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그래서 마지막 단락에서 야고보는 기도하고, 찬양하며, 고백하고, 권면할 때 교회는 세워진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고난당한 자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감사한 일이 있을 때 함께 찬양하고, 병든 사람이 있을 때 함께 중보하고, 낙심한 사람이 있을 때 함께 권면해야 한다. “성자에게도 과거가 있고, 죄인에게도 미래가 있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변화의 중심에는 기도가 있다. 회개의 기도로 과거를 지울 수 있고, 소망의 기도로 미래를 열 수 있다.
---「믿음의 기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