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는 왜 중요한가?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정체성과 독특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유신론이다. 그래서 무신론인 불교와 다르다. 또한 기독교는 유일신론이다. 그래서 다신론을 전제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와 다르다. 더 나아가 기독교는 정확하게 말하면 삼위일체론이다. 그래서 유일신론을 주장하는 유대교나 이슬람교와도 다르다. 이처럼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독특성과 정체성을 밝히는 초석이다. 따라서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핵심 교리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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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은 기원후 2~3세기 로마에서 사용되던 ‘세례 문답’에서 기원한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 따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신다. 세례를 받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삼중의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까?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당신은 성령을 믿습니까?
....
이러한 세례 문답의 내용은 기원후 4세기에 와서는 질문과 대답의 형식을 벗어나 직설적 진술의 형식으로 변하게 되고, 5세기에 비로소 완결된 신앙 고백문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사도신경의 텍스트는 교부마다 조금씩 차이가 났었지만, 750년에 피르미니우스(Pirminius)의 텍스트가 공인 본문으로 서방교회에서 인정받게 되었다. 10세기에 와서 신성로마제국의 첫 황제 오토 대제가 세례식 때 사도신경을 자기가 다스리는 제국 전체에서 사용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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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나, 이제 그 형상은 죄로 인해 흐려지고 왜곡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과 관계하는 ‘의존적인 존재’이지, ‘동등한 존재’는 아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자존적 존재’이지만, 하나님도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라는 삼위일체 관계 안에서 존재한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도 ‘관계적 존재’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도 관계적 존재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근원적인 관계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다. 인간과 하나님의 진정한 관계는 ‘하나님에 대한 의존성’이다. 인간은 ‘자존자’(自存者)가 아니다. 인간은 ‘의존자’(依存者)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될 필요가 없다. 인간은 인간일 때 가장 아름답고, 참 인간이 된다. 인간이 이러한 본래성을 거부하고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독립성을 선언하는 것이 죄이다. 즉 죄는 하나님의 은혜(하나님께 대한 의존성)를 거부하고, 우리 자신을 절대화하는 모습(자아 중심적 우상숭배)으로 드러난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유혹에 취약하며, 결국 유혹에 넘어가서 죄의 통로가 된다. 우리의 자유의지는 오늘도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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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한 몸이고, 우리의 몸이 교회라면, 우리 몸에서 지금 가장 중요한 곳은 어딜까? 심장일까? 뇌일까? 심장이나 뇌가 아니다.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지금 아픈 곳’이다. 가정 안에서도 아픈 사람이 중심이다.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대통령, 장관, 기업 총수, 목사가 국가의 중심이 아니다. 지금 아픈 사람,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중심이다.
교회에서도 가장 중요한 대상은 지금 아픈 사람이다. 지금 눈물 흘리는 사람이다. 그래서 공동체로서 교회는 특히 약자에게 민감해야 한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최후 심판의 비유에 따르면, 약자에 대한 연대와 섬김이 영벌과 영생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네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40). (70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부합하는 존재 방식을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지상의 체제와 사회에 대한 강력한 대안적 공동체, 즉 대조사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현실의 삶에서 여러 부족함과 거듭된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자기의 과제로 삼고,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부분적으로 미리 맛보는 곳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완성된 기관이 아니다. 교회는 완성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되어 가는 존재’(Being in becoming)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 이념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믿고, 이를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실천해가는 공동체다. 동시에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미리 경험하고 맛보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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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신앙생활은 ‘내 삶의 이야기에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야기에 내 삶을 조율하는 것’이다. 조율할 때 삶의 기준은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예수님/성령님이어야 한다. 조율의 기준음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피아노도 적절한 시간이 지나면 조율을 해야 한다. 기타도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튜닝이라는 조율을 해주어야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다. 인간도 적절한 시점에서 반복적으로 늘 조율되어야 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신앙의 본질을 놓치지 말자. 이를 기준음으로 삼고, 순간순간 조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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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는 늘어나는 각종 사회경제적 약자들, 외국인 노동자, 장애인, 탈북자. 소수자 등 기존 체제의 중심부에서 환영받지 못한 생명을 향해 신적 환대를 어떻게 활성화하고 실천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께서 최후의 심판관으로서 천국으로 인도할 사람들로 굶주린 자들, 옥에 갇힌 자들, 헐벗은 자들, 병든 자들을 먹이고 입히고 심방하며 위로하는 등 구체적인 ‘환대의 사랑’을 실천한 자들을 꼽는다는 것이다(마 25:31~46).
오늘날 우리의 삶의 방식에는 두 가지 다른 접근법이 있다. 하나는 장벽을 쌓고, 다른 사람들을 외면하고, 부를 추구하고, 내주기는 거의 하지 않는 삶이다. 다른 하나는 다리를 놓고, 다른 사람들을 환대하고, 적절한 정도만 부를 추구하고, 궁핍한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내주는 삶이다. 후자의 삶이 기독교적인 삶의 방식이다. 이런 사람들이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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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죽음의 문화’와 ‘죽임의 문화’다. 반생명적 문화 속에서 인간 생명의 절대적 가치는 끝없이 추락하고, 생명의 존엄성은 심각하게 위협당하고 있다. 자살자 수는 줄지 않고, 가정과 학교, 군대 안에서 폭력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여기저기에서 죽음의 신음이 그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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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나 언어폭력도 살인죄에 해당한다. 인간은 모두 깨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존재다. 사람은 겉으로는 강하게 보여도 속은 매우 연약하다. 말 한마디에 깊은 상처를 입어 사람을 대할 때 생기와 의욕을 잃어버리는 것이 사람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외적인 생명을 빼앗는 것만이 살인이 아니라, 내적인 속사람을 상심시키는 것 또한 살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상대의 기를 죽이는 것도 살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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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단순히 ‘저기에’ 서 있는 중립적인 물질이 아니다. 오히려 돈은 강력한 힘을 그 자체 안에 지니고 있는 ‘세력’(power)이다. 인류 타락 이후에 하나님을 가장 강력하게 위협하는 피조물이 있다면, 그것은 돈이다. 신들의 반열 위에 서 있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도 힘센 신이 있다면, ‘돈의 신’이다. 길이 없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금신’(금송아지)이야말로 그들에게 길을 보여주고 인도할 수 있는 ‘신’이라고 여긴 적도 있지 않은가(출 3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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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하나님과 경쟁하는 유일한 신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따르는 ‘하나님 백성’의 삶과 돈을 따르는 ‘돈 백성’의 삶 가운데 한 길을 선택해야 한다. ‘돈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돈이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돈이 따르는 삶이 선물로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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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동산의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이 그를 지으셨다는 사실 외에는 하나님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대단한 존재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동산 가운데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다. 그런데 이 나무 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 금지하셨다. 사람은 생명나무 실과는 자유로이 따먹을 수도 있고,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누릴 수도 있을 정도였다. 이 얼마나 대단한 배려인가!!
인간은 낙원이라는 완벽한 삶의 조건에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누릴 수 있었다. 창세기 2장 16절의 ‘각종 나무의 열매’라는 표현에서 ‘각종’은 ‘모든 것/전부’를 의미한다. 인간은 모든 나무 열매를 먹을 수 있었다. 그에게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즉 모든 것이 가능하고, 오직 하나만 금지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마저도 먹으려 했다면 인간의 욕심은 얼마나 지나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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