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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든가 죽는다든가 아버지든가

산다든가 죽는다든가 아버지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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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5월 08일
쪽수, 무게, 크기 256쪽 | 348g | 130*195*16mm
ISBN13 9788965781837
ISBN10 8965781833

카드 뉴스로 보는 책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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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내가 스물네 살 때 예순넷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밝고 총명하고 유머 넘치는 멋진 분이셨지만 나는 ‘어머니’로서의 어머니밖에 모른다. 당신에게는 아내로서의 얼굴도 있었을 것이고 여자로서의 인생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어머니에게 당신의 인생에 대해 직접 듣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아버지만큼은 같은 후회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
--- p.12

나는 아버지의 이사를 돕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참 정나미 떨어지는 딸이다. ‘이사를 도우면 틀림없이 싸울 게 뻔하니까. 그게 싫어서….’라는 게 겉으로 내세운 이유지만 진짜 속내는 다르다. 어쩐지 고이시카와 집을 떠나 이사하던 장면이 떠올라 아버지가 또 패배하듯 이사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삿짐을 보자 고이시카와 집에서 나와야만 했던 그때 일이 떠올라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마 아버지도 그럴 것이다.
--- p.24

지난 십 년 동안 나는 늘 바빴다. 솔직히 말하면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성묘는 서서히 우선순위 상위에서 하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아버지와 같이 살았을 때는 일주일에 한 번, 혼자 살면서는 점점 횟수가 줄어 지금은 한 달에 한 번, 어떨 때는 두 달 동안 못 갈 때도 있다. 속으로는 늘 마음에 걸렸지만 해야 할 일 리스트에서 성묘는 늘 저 뒤에 두게 된다. 예전에 “행동을 안 하면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라고 아버지를 몰아붙인 적이 있는 딸로서는 이보다 찜찜한 건 없다.
--- p.40~41

집이 타 버려서 사라졌다. 비참하다는 것 외에 어떤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살아야 하니까 소이탄에 탄 가지를 가족들이 먹는다.
나라면 먹기는커녕 두 번 다시 보고 싶지도 않았을 것 같은데 희한하게도 가지 구이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요리다. 우리는 부모 자식 사이지만 삶에 대한 집착 정도는 다르다.
--- p.89

어머니의 퇴원 소식을 들은 H 씨가 어머니를 보러 한걸음에 달려와 줬다. 어머니는 파자마 위에 가운만 입고 있어서 누가 봐도 손님을 맞을 채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H 씨는 꽤 오래 머물렀다.
그때 나는 화가 났었다. 어머니가 빨리 누웠으면 좋겠는데 왜 이렇게 눈치도 없이 오래 있느냐고.
몇 개월 후, 어머니 장례식에서 H 씨가 내게 말했다.
“그때는 미안했다. 그날 어머니 모습을 보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좀처럼 발걸음이 안 떨어지더라.”
나는 그 말을 듣고 어른들은 솔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 p.133

내가 어머니에게 원했던 건 단 한 가지.
“엄마, 소원이야. 아버지보다 먼저 죽지 마.”
내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건강 그 자체였던 어머니는 휘리릭 하고 아버지보다 먼저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쉰아홉에 홀아비로 전락한 남자는 그 후 어떻게든 살아남아 2017년 3월에 무사히 일흔아홉 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 p.158

1996년 여름. 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 나는 라이브 공연에 갈 예정이었다. 티켓을 미리 구해 놨던 데다가 목을 빼고 기다리던 공연이라서 무슨 일이 있어도 가고 싶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병원에 같이 가자고, 그렇게 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여전히 내가 우선이었고 입원한 아버지한테 가서는 무정하고 한심한 말을 쏟아내고 말았다.
“아버지가 입원 같은 거 하니까, 내가 갈 수밖에 없잖아!”
--- p.204~205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아버지와 사이가 점점 나빠지기만 했다. 어머니라는 완충재가 사라진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아버지가 자신만의 삶을 공동생활 속으로 끌고 들어오는 바람에 생긴 알력도 관계가 악화된 원인이 되었다. 내 기대와 달리 아버지는 ‘아버지’의 역할을 수행해 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오각형 주사위 같았다. 나는 그중에서 ‘아버지’라는 면만 보고 싶은데 불안정한 오각형 주사위는 ‘아버지’로서의 일면은 잠시만 보여 주고 금방 다른 면으로 넘어갔다.
--- p.220

집 정리는 장례식이다. 가득 찬 쓰레기봉투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묶고 있으면 후회가 솟구치고 자존심은 바닥을 친다. 쓰레기봉투는 다음 날 쓰레기 수거차가 수거해 간다. 회전판이 작동해서, 기억이 쓰레기가 되어 우지직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난다. 그 끔찍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지고 매번 내 등뼈를 두들겨 팬다. 그 소리는 지금도 끔찍하다.
--- p.233

조장나무 향이 코를 자극하더니 나를 추억 속으로 데리고 갔다.
이 향기는 집 주방에서 나던 향이다. 양갱을 먹을 때도 사과를 먹을 때도 났다. 젓가락과 수저 등을 넣어 둔 서랍을 열면 늘 이 향이 났다. 어머니가 서 있는 주방에서는 이 향이 났다. 가게 사람이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나는 계산대를 등지고 서서 맘껏 조장나무가 내뿜는 향을 맡았다. 이쑤시개는 날 위한 선물로 사자.
--- p.253~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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