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엔, 죽음을 사유하며 죽음에 대한 공포를 예술로 승화시킨 많은 예술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직간접으로 죽음에 대한 불안과 걱정을 글로, 음악으로, 그림으로 나눴지요. 지금의 예술가들은 현대 문명 속에서 겪은 팬데믹을 과연 어떤 형태로 나누고 있나요? 아니, 혹시 소비지향적 대중에 의해 그것이 가려져 있지는 않은가요? 부지불식간에 소비된 예술이 아닌, 후세에 남길 만한 예술은 어떤 것이 있는지, 아무리 찾아도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현대 문명은 어쩌면 전보다는 죽음을 좀 더 가벼이 여기는 것은 아닐까요? 대중문화가 죽음을 희화화하고 오락의 요소로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들어가며」중에서
돌아간다는 것은 본래 내가 살던 곳으로의 회귀를 뜻합니다. 우리의 노래 ‘나의 살던 고향은’에서는, 꼭 나의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기보다는, 나 어려서 고향에서 놀던 그 시절, 그때가 좋았고, 그 좋았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의미가 강합니다. 바로 그런, 시절에 아련한 그리움이 이 곡에 잘 녹아 있습니다. 과연 그리그가 그리워한 좋았던 시절은 어떤 시절이었을까요? 순수하고, 마냥 즐겁게 웃던 그때, 되레 행복이 무언지도 모르던 시절이었을 듯합니다. 순수가 퇴색해가는 요즘, 누구나 맑고 순수했던 시절이 그리우니까요.
---「래알캔디: 그리그, 〈서정 소곡집〉 중 6번 ‘향수’」중에서
베토벤이 ‘Sehnsucht(그리움)’ 시리즈를 시작한 게 언제인지는 불명확합니다. 하지만, 그가 제4곡을 작곡한 게 1808년이니, 네 곡 모두 베토벤이 서른 살 전후에 쓴 것으로 보입니다. 1808년 당시 괴테는 〈파우스트〉를 펴냈는데요. 그래서 혹시 베토벤이 괴테의 〈파우스트〉출간에 발맞춰 다시금 괴테의 시로 네 번째 곡을 쓴 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에게서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한 베토벤은 연애도 결국 헤어짐으로 막을 내렸으니, 그의 삶은 결국 ‘Sehnsucht’로 가득했네요.
---「래알캔디: 베토벤, 가곡집 〈그리움〉」중에서
안단테(Andante)로 느리게 호흡하며 들어가는 피아노, 심장이 끊어질 듯 쌀쌀맞은 스타카토. 냉정히 흐르는 피아노의 반복되는 스타카토 위로 흐르는 선율은 마치 슈베르트의 뜨거운 눈물과도 같습니다. 울지만 소리 내 울지 못하는 그의 절망이 고스란히 느껴져요. 너무나 비참하고 어둡지만, 마냥 어둡지만은 않은, 화사한 아름다움에 차분함까지 깃들어 있는 2악장에서 가슴이 저리는 진한 고독함을 느껴보세요. 저는 차디찬 그의 무덤에 화사한 봄꽃을 놓아주고 싶습니다.
---「래알캔디: 슈베르트, 피아노 트리오 2번 2악장 안단테 콘 모토」중에서
음악은 시간 예술이기에, 우리가 음악을 즐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을 내야 합니다. 여타 예술은 감상하고 즐기는 데 시간 제약을 덜 받지만, 음악은 우리에게 시간을 희생하지 않고는 온전히 즐길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외칩니다. 바쁜 현대 사회에서 길이가 꽤 긴 클래식 음악을 즐길 만큼의 시간을 내어준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죠. 그렇다면 혹시 이런 상상을 해보셨나요?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 24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서, 만약 나의 하루를 2배 또는 3배로 늘릴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마블사의 캐릭터 중 ‘퀵실버’라는 캐릭터는 시간을 ‘일시 정지’할 수 있는 초능력을 가졌습니다. 다른 모든 시공간은 정지시킨 채, 자신은 멈춰있는 시공간에서 사람들 사이사이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죠. 한마디로 말해서 시간을 늘여 쓰는 초능력이었는데요. 이렇듯 필요에 따라 시간을 늘여 쓴다는 건 공상과학소설이나 마블 영화에나 나올법한 이 야기지만, 음악에서도 가능한 일입니다. 음표와 쉼표가 시간을 두 배로, 또는 세 배로 늘여 쓰도록 해 주니까요. 단, 작곡가의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 조건이 있습니다.
---「래알밴드: 클래식 Idiom 사용설명서 내 마음의 페르마타」중에서
교회에서 다성음악은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는 방식 중 하나, 즉 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여겨졌습니다. 음악을 듣는 동안 바흐가 원했던 것인지 모르지만 그 가족들의 음악을 들으면서, 신의 은총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무언가 나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기분 탓일가요? 바흐의 가족에도, 그들의 음악에도 더 호기심이 생깁니다. 그들의 음악을 듣다 보면 풀리지 않는 인생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을 수도 있을까요? 우선 정돈된 음률들을 계속 듣다보니 19세기 이후의 음악을 듣던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정화가 마음속에서 일어납니다.
---「악흥의 한때: 다닐 트리포노프 〈Daniil Trifonov Bach: The Art Of Life〉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