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은 527년 불교를 공인하였는데 공인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것을 만회하려는 듯 짧은 시간 안에 사찰을 건립해 나갔으며, 이와 함께 불교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불국토사상(佛國土思想)을 통해 강조하였다. 따라서 신라의 불탑관 역시 불국토사상과 함께 전개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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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탑공덕경(造塔功德經)』은 영융원년(永隆元年, 680년) 천축법사 지바하라(地婆訶羅, 613~687)와 서명사(西明寺)의 원측(圓測) 등 5명에 의해 한역되었다. 신라 출신의 원측은 이 경의 번역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서문을 쓰기도 했다. 원측은 613년 출생해서 3세 때 출가하고 15세 되던 진흥왕 48년(626년) 입당 후 불수기사(佛授記寺)에서 84세로 입적한다. 청소년기에 해당하는 잠시를 제외하곤 평생 중국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원측이 주석했던 서명사에는 원측의 제자인 승장(勝莊)과 도증(道證) 외에도 신라 출신의 승려가 많았던 까닭에 원측이 번역하고 서문까지 쓴 『조탑공덕경』이 번역 직후 신라로 전해져 유포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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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사에서 출현한 영태2년명(永泰二年銘) 납석제호는 불탑이 아닌 석조비로자나불과 ??무구정경??을 함께 봉안한 사례인데 표면에 새겨진 명문을 통하여 무구정광다라니를 봉안했음을 알 수 있다. 내용을 보면, 돌아가신 두온애랑(豆溫哀郞)과 불상을 조성한 법승(法勝)과 법연(法緣) 두 승려, 그리고 이 불상에 예를 표한 사람, 뿐만 아니라 듣거나 그림자를 지나간 사람 등 모든 이들이 나쁜 업이 없어져 스스로 비로자나불임을 깨닫길 바라고 있다. 즉, 망자를 추복하고 있지만, 망자의 극락왕생보다는 정각을 염원하고 있는데, 이는 발원자가 승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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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분황사 석탑은 불탑 원류에 대한 인식과 동경으로 벽돌모양으로 가공한 모전석재를 불탑재로 선택했던 것으로 생각되며, 당시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성행했던 불사리신앙을 강조하기 위해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묘탑이라는 근본에 충실한 조형으로 생각된다. 이는 분황사 석탑이 모전석탑으로서 전축형 축조방식을 보이지만, 전체 조 형은 목조건축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어 목조건축에 근본을 두고 있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즉, 분황사 석탑의 건립은 선덕왕 집권 초반 흔들리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더욱 강력한 신앙적 명분이 필요했던 신라 왕실의 새로운 불탑에 대한 의지가 반영된 조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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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양식과 전형양식에서 벗어난 양식의 석탑을 모두 이형석탑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으며, 주로 기단부에 변형이 가해진 석탑을 예로 들고 있다. 이후 다른 논문에서 특수양식 석탑은 ‘전형양식에서 벗어나는 특이한 양식을 갖춘 석탑’을 말하며, 석탑 표면의 불교상 조각은 장엄으로 보아야 하지만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은 예외로 하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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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상부로는 십자형 부재를 사용하여 2단을 포개놓아 두공형(枓?形)을 보인다. 마치 목조건물의 살미첨차처럼 상부의 옥개를 받고 있어 전체적으로 상부 옥개에서 하부 기둥 사이를 2단의 교두형 살미첨차가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목조와 같은 짜임 구조는 아니다. 이러한 교두형 살미첨차로 인해 전체적으로 옥개받침을 곡선형으로 보이게 하는데 백제석탑인 정림사지 오층석탑에서 보이는 의장 처리와 동일한 방식이라는 견해가 있다. 방형 옥개석은 가운데 넓은 판석을 놓고 그 외곽으로 4매의 판석을 돌려 결합되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체적으로 평박한 처마선을 유지하다 끝단에서 반전하는 형태 역시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옥개석과 매우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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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사지 삼층석탑은 이중기단의 일반형석탑 양식으로 상하층기단의 탱주 수는 상층 1주, 하층 2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전형 양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상층기단의 구성에서 3가지 결구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서쪽 면은 가운데 탱주를 별석으로 감입하였고, 북쪽 면은 2매의 석재로 면석 이음 부분에 탱주를 반쪽씩 새겨 1주를 이루게 하였는데, 두 방식 모두 신라 전형석탑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른 두 면은 면석에 탱주를 모각하는 방식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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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자기단 석탑은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과 주리사지 사사자석탑을 볼 수 있다.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의 건립시기는 기존에는 다보탑과 같이 8세기 중엽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사자상이 배치된 상층기단부를 제외하면 일반형석탑과 동일한 양식 변화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8세기 중엽의 다른 석조물과 양식을 비교한 결과 오히려 9세기 석조물의 양식 흐름을 보이고 있어 9세기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주리사지 사사자석탑 사자상의 크기는 화엄사 석탑 사자상보다 작아졌으며, 조각 수법이나 자세 등이 형식적으로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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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리리 오층석탑을 만드는 장인은 미륵사지 석탑과 같이 목탑양식을 거의 그대로 재현한 석탑은 이미 구조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주칸의 변화를 통해 규모를 축소시키는 등 미륵사지 석탑과 동일한 양식은 지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규모에 변화를 주었지만 별석을 사용하는 가구식 결 구방식은 여전히 상부의 하중을 분산시키는 구조체를 조성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안정적인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분황사 석탑의 옥개석과 같은 계단형에 착안하여 옥개석 형태의 변화를 시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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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괴체석기단 전축모방형 석탑의 입지조건을 보면, 남산리 동 삼층석탑은 남산 아래의 평지에 위치하고 있고, 서악리 삼층석탑은 선도산 능선 말단의 골짜기 안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용장계 지곡 삼층석탑은 해발 380m 정도의 남산 정상부와 가까운 골짜기 안에 위치하고 있다. 살펴본 바와 같이 이들의 입지는 평지에서 점차 산지쪽으로 올라가는 현상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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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석탑에서 문둔테를 표현한 것은 오야리 삼층석탑이 유일하며, 이와 같은 건축 의장은 감실 입구의 문지도리 구멍을 내부에 두는 것과 외부에 두는 것의 차이에서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오야리 삼층석탑은 문지방석 위에 방형 1단의 신방석 자리가 표현되어 있고 그 위로 문지도리 구멍이 뚫려 있다. 따라서 오야리 삼층석탑의 문둔테는 자연석기단을 적용하면서 필연적으로 석탑의 규모가 작아지자 감실 공간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문짝을 외부에서 여닫을 수 있게끔 만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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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일반형석탑의 다양화에 백제석탑 양식이 변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는 점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물론 당시 신라석탑 양식이 주도적인 조형의지였을 것으로 생각되나 분명 부수적인 조형의지로 백제양식이 공존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통일신라 석탑 변화 유형 중 백제석탑의 양식 요소로 보이는 특징이 다수 관찰되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신라석탑 중 최초로 가구식기단을 갖춘 탑리리 오층석탑은 기단부 면석, 우주, 탱주를 모두 별석으로 결구하는 방식으로 미륵사지 석탑의 가구식기단 방식으로 시원양식 성립부터 백제석탑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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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자기단 석탑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전체적으로 보면 소수에 불과하지만 시대마다 건립되고 있어 나름의 양식 계보를 형성하며 꾸준히 건립되었다. 이들은 후대로 내려올수록 이중기단에서 단층기단으로 간략화되고, 장엄조식 또한 간소화, 생략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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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축형 석탑은 분황사 석탑을 시작으로 경주에서 발생하여 영양, 안동 등 주로 경북 북부지역에 건립되었는데, 고려시대 이후에는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인다. 영양 현이동 석탑은 인근의 산해리 오층석탑의 영향으로 건립된 것으로 생각되며, 제천의 2기의 석탑은 경북 북부에 집중 건립된 전축형 석탑이 죽령을 넘어 충청지역 까지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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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석탑에서 발생한 다양한 변화 현상은 신라 불탑관의 변화와 그로 인한 발원계층의 다양화, 신라인의 새로운 것에 대한 끊임없는 노력과 예술적 역량 발휘, 전통의 계승과 변화 의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통일신라의 축적된 문화적 역량이 발휘된 결과물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신라 석탑의 변화 현상은 한국 석탑 발달과정에서 다양한 양식의 석탑이 창안될 수 있는 근간을 마련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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