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보다 더욱 많은, 그야말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영광스러운 순간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모든 규제와 이성적인 절제를 버리고, 마치 백치처럼 활짝 웃으며 극단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는 종종 환상 속의 패션을 실현하기 위해 잔인한 행위도 마다하지 않는 결과로 나타났다.
18세기 남자들이 쓰던 가발 페리위그, 접시만한 크기의 주름 칼라, 코드피스, 로인클로스, 플랫폼 슈즈, 파니에, 레그 오브 머튼 소매, 고래 뼈로 만든 코르셋, 쥐 털로 만든 인조 눈썹…… 이 책은 패션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와 가장 처참한 실수들을 기록한 것이다.--- p.14 「시작하며」
계층이나 격식을 따지지 않는 미니스커트의 특성은 당대의 시대정신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당시 전통적인 가치관은 도전을 받았고, 젊은 여성들은 전통적으로 주어졌던 가정주부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탈피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미니스커트는 새로운 권리를 찾는 것처럼 보이는 혁명인 동시에 입는 사람의 약점을 보여 주고 착취하는 옷이기도 했다. 젊은 여성들은 미니스커트를 예쁘게 입기 위해 사춘기 이전의 여자아이 같은 몸매를 유지해야 했다.--- pp.41-43 「길고 짧음에 대하여」
패셔너블한 젊은 남성들은 신발에 걸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발을 높이 들고 보폭을 넓게 해야 했는데, 이렇게 걷는 모습이 세련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갑옷에 딸린 쇠 구두인 사바통도 앞코가 길게 만들어졌는데, 덕분에 이 신발을 신은 사람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말에 타고 내릴 수가 없었을 뿐 아니라, 전혀 걷지 못하기도 했다.--- p.68 「뾰족한 앞코」
겉모습이 주는 이미지가 중요한 때,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거나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알리는 방법은 좋은 옷을 차려입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최고로 인정받는 모든 왕과 여왕, 연설가, 선동가, 깡패 및 스타들이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었던 교훈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다음과 같다. 크고, 빛나고, 어마어마하게 비싸고, 무참할 정도로 실용성이 없는 것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옷을 순금으로 만들어서 나라가 파산에 이른 데다 너무 무거워서 하인 몇 명의 도움 없이는 소파에 앉지도 못한다면, 잘하고 있는 것이다.--- p.76 「상식을 벗어난 옷들」
패셔너블하고 예뻐지기 위해, 외모를 조금 더 가꾸는 대가로 목숨을 바쳐야 했던 사람들은 비극적일 정도로 많다. 이마에서부터 가슴골까지 백랍이 주성분인 혼합물을 발랐다가 죽음에 이른 사람은 수천, 혹은 수백만 명에 이를 것이다. 이 화장법은 로마 시대부터 18세기까지 거의 변하지 않고 유지되었고, 베이징의 황제궁에서부터 북유럽 왕실에까지 널리 퍼져 있었다. 일본에서는 이 때문에 무사 계급의 아름다운 부인들이 병에 걸리고 낙태를 했다. 가장 비극적인 일은 산모가 가슴에 납 가루를 바른 채 아이들에게 젖을 먹여 아이들도 납 중독에 걸렸다는 것이다.--- p.162 「페인트와 패치, 그리고 완벽한 미소」
16세기 프랑스의 여왕이었던 카트린느 드 메디치는 무엇이든 지배하고자 하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엄격한 법률을 만들어 나라를 다스렸으며, 국민들의 차림새 하나하나를 지시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여성들은 허리 둘레를 33센티미터(약13인치)로 만들어야 했다. 이 불가능한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 그녀는 어깨부터 엉덩이까지 감싸는 철로 된 코르셋을 만들었다. 이 코르셋으로 매일 조금씩 몸을 조이면, 아마도 원하는 몸매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갈비뼈도 몇 개 부러졌을 것이다.--- p.175 「잘록한 허리와 고래 뼈로 만든 코르셋」
역사 속의 트렌드세터들은 모두 여성이 눈썹을 다듬고 잔털을 제거하면 더 깔끔해 보인다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가끔 이 트렌드가 지나치게 극단적일 때도 있었다.
중세 시대 유럽의 여성들은 높은 이마와 잔털 없는 얼굴을 아름답다고 생각하여 털을 뽑거나 고양이 똥과 식초를 섞은 것을 발라 제모를 했다. 눈썹은 제거하고 화장품으로 아주 옅게 그리기도 했으며, 극단적인 패셔니스타들은 속눈썹까지 뽑았다. 얼굴 가장자리와 목 주위의 짧은 머리카락들 역시 제거하여, 정교한 헤드드레스 아래로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도록 했다. 반대로 고대 로마에서는 두꺼운 눈썹을 매우 아름답게 여겨, 양쪽 눈썹이 코 위에서 만나는 일자형 눈썹(monobrow)이 유행했다.--- p.224 「얼굴에 난 털」
20세기 말 유스 컬처에서 부활한 보디 피어싱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문화이다. 이집트의 귀족 남성들은 귀를 뚫어 마개 모양 장식을 꽂았으나, 파라오만이 배꼽에 피어싱을 할 수 있었다. 이집트인들은 금과 에나멜로 무겁고 정교하게 제작한 귀걸이로 부를 과시했으며, 이것이 자신들을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해 준다고 생각했다.
고대 로마 군대의 백인대장들은 유두에 피어싱을 하여 힘과 남성미를 과시했다. 중앙아메리카에서는 마야인들과 아즈텍인들이 종교적인 의식의 하나로 혀에 피어싱을 했으며, 이 과정에서 나는 피가 신에게 가까이 갈 수 있게 해 준다고 믿었다.--- p.234 「피어싱」
약 천 년 동안 중국에서는 여자아이가 다섯 살 정도가 되면 그 때부터 끔찍한 전족의 시련을 겪어야 했다. 전족을 해 주는 것은 보통 여자아이의 친모였는데, 나중에 부유한 남편을 만날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해서였다. 어린 희생양 앞에 칼과 긴 끈, 바늘과 실이 든 상자와 함께 놓이는 것은 한 켤레의 작디작은 신발로, 대략 7센티미터 정도의 크기였다.
처음 발을 감고 나서 한 달간 소녀들은 걸을 때마다 울어야 했을 것이다. ‘두 발에 눈물이 한 섬’, 전족을 했던 소녀들은 이 오래된 중국 속담에 담긴 고통스러운 진실을 알고 있었다.--- p.240 「보디 바인딩」
시체에서 뽑은 사람의 치아가 가장 수요가 높았고, 전쟁터는 이러한 치아를 얻을 수 있는 좋은 장소였다. 전투가 끝나고 나면 시체 더미를 뒤지는 사람들이 나타나 펜치로 시체에서 이를 뽑았다. 이 치아를 갖다 팔면 큰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1815년 워털루 전투가 끝나고, 런던의 부유한 엘리트들은 ‘워털루의 이’라고 불리던 치아에 열광했다. 이는 당시 최고의 ‘머스트 해브’ 액세서리였다.
--- p.246 「진주처럼 하얀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