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도 울었다. 여운형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나는 아버지의 울음을 처음으로 보았다. 소식을 전한 읍내 아저씨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가 갈재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소리 죽인 채 울었는데, 그것은 거의 통곡에 가까웠다. 남동생과 나는 김구와 이승만은 알아도 여운형은 잘 몰랐다. 아버지는 문상 가겠다며 행장을 차렸다. 아버지는 떠나면서도 말을 잇지 못했다. 으쩐다냐, 이 나라를!
---「갈재에 오르다」중에서
그 새끼덜이 그날 전투에 참가헌 우리 중대원들 열일곱 명 죽었다구 워디다 적어 놨더라구유. 중대 편제가 열일곱 명이유? 이게 말이 되는 소리유? 대명천지 말이 되는 소리냐구유?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화의 파편들이 내 얼굴 여기저기에 튀었다. 많으나 즉으나 죽은 사람 숫자 가지구 장난치진 말았으야지. 지켜 주지는 뭇허구 살려내지는 뭇헐망정. 그 사람덜 워디루 가냔 말여? 그렇게 증발돼, 죽은 자덜 속에두 들어가지 뭇혔으니…. 내가 그려서 약 안 먹으믄 잠이 안 와유. 내가 그려서 맨정신으루는 살어 있을 수가 읎슈.
---「그가 아직 살아 있는 이유」중에서
‘아아, 너무도 한심하구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용감하게 일어선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독재자가 오히려 민주주의를 수호했다고 떵떵거리면서 잘 먹고 잘살다가 고이 자연사하도록 놔두는 나라에 과연 정의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문득, 그의 잠재의식 깊은 곳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탄환 하나가 심장을 향해 빠르게 날아와 박혔다. 온갖 회한과 죄책감과 굴욕과 부채 의식으로 장전되어 있다가 마침내 발사된, 별똥별처럼 짧고 환하게 섬광을 발하는 어둠의 탄환이었다.
---「어둠의 탄환」중에서
한국에서 겪은 국가보안법으로 상처가 여직 아물지 않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송 교수가 이내 덧붙였다.
- 음…, 《미완의 귀향과 그 이후》에서 ‘아직 귀향하지 못했다’고 한 그 표현은 경계인으로서의 삶이, 학자적 양심이 짓밟혀 버린 2003, 4년 한국에서의 격랑에 여전히 휩쓸려 있다는 증표라고 볼 수 있지. 이시우 작가에게 편지를 보낸 해였는데, 끝내,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법적 국민으로 소속되어 있는 국가로 귀환하게 된 경계인으로서의 고뇌. 그리고 ‘대한민국 헌법 준수’, ‘독일 국적 포기’라는 전향 의사를 내보임으로 해서 입은 내 안의 상처를 아직 까지 여과시키지 못하고 또한 그런 나를 질타하는 회한 혹은 격한 감정 분출… 의 결과라 할 수 있겠지. … 한반도 남쪽과 북쪽에서 동시에 배척된 이방인이 됐다는 걸 절감하곤 해, 지금.
---「송두율을 만나다」중에서
일층 노파가 경찰과 나타나지 않았다면 폭력은 끝도 없이 이어졌을 것이다. 경찰이 우수이와 등산복을 입은 여자와 여자의 남편을 경찰차에 태우고 비 오는 거리를 달렸다. 그들이 떠난 아파트 계단에는 빈 생수병이 굴렀다. 노파가 허리를 굽혀 생수병을 주워 모았다. 내키지 않았지만, 노파를 도와 빈 병을 함께 주웠다. 양팔 가득 빈 통을 안고 망설였다. 복도에 두기엔 너무 많았다. 어두운 밤에 누군가 페트병을 밟고 계단을 구르기라도 한다면 크게 다칠 것 같았다. 우선 집에 두었다가 비가 그치면 내다버리자고 생각했다. 비닐봉지를 찾아 빈 병을 담았다. 넘치는 페트병을 주방 벽을 따라 나란히 세웠다.
---「페트병」중에서
대평이 보고 듣고 이해한 한도 내에서 호야 이모라는 인물은 시들지 않는 해바라기 같은 사람이었다. 햇빛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한결같이 향광성이라 이처럼 응축되고 그늘을 품은 눅눅한 상태의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신체적 장애를 지니고도 못 하는 일이 없을 정도로 다재다능하고 활동적이었으며, 성품이 부지런하고 명랑하여 주변에 늘 도움과 편안함을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분, 성별,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여, 비록 그 특이한 외양이 시속(時俗)의 편견을 더러 불러일으키긴 했지만 아무도 낮잡아 보지 않았다. 천주교 신자지만 불자들이 좋아하는 ‘보살’처럼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요다의 지팡이」중에서
어머니의 조문객을 받는 마지막 밤에 나는 먼 나라에 있었다. 오늘 처음 만난 두 사람, 어머니 얼굴도 모르는 이국의 여인들이 나와 같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곳이 지상을 벗어난 곳 같았다. 누군가 나를 연극 무대 위에 올려놓은 건가? 꿈이었으면! 소용돌이치는 취기 밑에서 올라오는 현실감을 외면하고 싶었다. 그때마다 술잔을 비웠다. 노부인이 빈 잔을 채워 주었다.
---「환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