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책을 처음 샀을 때 꼭 머리말부터 읽고 시작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다.
이 머리말은 그냥 안 쓸 수 없어서 형식상 쓴 글이 아니기에 할 말이 좀 많다. 이 책의 몸통을 읽어 나갈 독자 여러분이 이미 이 책을 써 버린 필자와 호흡을 맞추기 위하여 시작 전에 꼭 읽었으면 하는 글이다.
마케팅은 인기가 많은 주제이며 또한 사람들이 재미있으면서도 쉽다고 생각하는 주제이다. 다음의 현상을 보면 알 수 있다.
기업에서 사람을 뽑을 때에도 마케팅 부서에 지원 경쟁이 치열하다. 일반적으로 재미없거나 몸 고생한다고들 여기는 부서에서 우수한 성과를 올려서 인정받은 이들은 그 상으로 마케팅 부서로 영전(榮轉)한다. 마케팅 전공자가 R&D 센터나 생산부에서 일하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수많은 종류의 전공 출신들이 마케팅 부서에서 일하고 있다. 경영학과 학생은 물리학과 과목에서 단 한 시간도 앉아 있기 어렵지만, 어떠한 전공의 학생이라도 관심만 있으면 마케팅 과목을 수강하고 또 시험도 잘 볼 수 있다. 그래서 마케팅 과목 강의실은 경영학과 학생뿐만 아니라 다양한 타과 학생들로도 채워져 있다. 어떤 회사에 다니냐고 물어보면 마케팅 회사 에 다닌다고 답하는
사람들이 꽤 된다(그런데 과연 무슨 비즈니스를 하는 회사일까 궁금하다).
사흘 만에 끝내는 마케팅 공부 니, 이 책만 읽으면 당신도 마케팅 전략의 귀재니, 요즘 뜨는 ○○○마케팅 모르면 당신은 원시인 이니 하는 도서가 계속 쏟아져 나온다. 게다가, 내용 전반에 흐르는 맥락이 마케팅이 아님에도 책 제목에 그냥 마케팅 을 포함시키는 경우도 상당하다. 이 또한 마케팅은 인기 많고 쉬운 주제라는 생각에 마케팅 도서 의 저자들도 그 저변이 넓은 탓이리라. 필자도 예전에는 마케팅이 재미있고 쉬운 주제라고 생각했다. 덧붙여, 그것이 공부의 주제이건 업무의 주제이건 간에, 마케팅의 성격은 명쾌하고 발랄하고 깍쟁이처럼 자기 경계가 명확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케팅에는 몇 가지 법칙이 있어서 마케팅의 고수 는 그 법칙을 잘 기억했다가 적용 하여 불멸의 히트 상품을 개발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못 잊을 사건이어서 라기보다는)상당히 오랜 기간에 걸쳐서 천천히, 그리고 눅진하게 가졌던 연속선상의 경험이 마케팅에 대한 필자의 생각과 느낌을 바꾸었다.
미국에서 가졌던 MBA 과정 중 마치 우등생 교실 같은 갑갑함 속에서 첫 학기를 보낸 후에야 만날 수 있었던 일련의 마케팅 과목들은 나는 누구이며 여기는 또 어디인가 의 세계로 필자를 날려 보내버리기에 충분히 모호하고 뭉뚱그려진 모습으로 다가왔다(물론 영어 탓도 있었으리라).
그런데 졸업 후에 재개된 가끔씩만 영어를 쓰는 직장 생활에서도 마케팅은 옛날에 막연히 그렸던 샴푸의 요정 같은 향기로운 모습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게다가 MBA 과정 중에 필자가 외경감(畏敬感)을 갖고 받들었던 각종 컨텐츠(책, 유인물, 프로젝트 심사평)를 현업에 대입시키려고 해도 뭐 하나 제대로 들러붙는 게 없었다.
이렇게 당황스러운 현상은 계속되었지만 버리기 힘든 미련, 즉 마케팅 교과서의 여기저기에는 모든 비즈니스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법칙이 들어 있고,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솔깃한 제목의 마케팅 단행본에는 그 저자들이 새로 발명한 마케팅의 법칙이 들어 있을 것 같다는 미련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신문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케팅 구루(Guru, 우리말로는 도사 정도가 적당하겠다)가 뭔 말을 했다는 기사가 실릴 때 마다 마케팅의 새로운 법칙으로서 주목하였다. 그걸 모르고 있으면 밖에서 체면을 잃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하였다.
그러나 여러 산업에서 이직을 통해 그런 향기롭고 멋지고 강력한 마케팅이 오히려 어색해 보이는 업의 본질과 기업문화를 계속하여 경험하면서, 필자는 마케팅을 무슨 법칙이나 묘수(妙手)로 바라보는 자세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마케팅은 명쾌한 맛도, 발랄한 맛도, 자기 경계가 명확한 맛도 없으며, 더구나 쉽지도 않은데, 이런 점을 받아들이면 마케팅은 다시 재미있어 질 수 있다는 생각의 전환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마케팅에 관한 진정한 실력은 지식 더하기가 아니고 사고력 기르기에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갖고 필자는 마케팅 컨설팅 창업을 하였고 컨설턴트로서, 코치로서, 강사로서 나만의 컨텐츠를 만들어 나갔다. 그리고 필자가 제시하는 마케팅 의사결정을 위한 접근법은 언뜻 보아 도무지 마케팅이랄 게 있을 것 같지 않은 업종과 비즈니스 환경에 있는 비즈니스맨에게 조차도 유효하게 다가가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미 마케팅 도서는 수없이 많다. 그래서 필자가 아니라도 다른 사람이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그런 마케팅 책이 아니라, 진실로 이 책이 필요할 독자 여러분과 함께 호흡할 수 있으며 또 독자 여러분에게 남는 게 있는 마케팅책이 되었으면 한다. 이 책은 학문으로서 마케팅 연구가가 아닌, 비즈니스로서 마케팅 사고가(Marketing?oriented Thinker)를 위한 책이기 때문이다(필자는 학문으로서 마케팅을 모른다. 목표가 학문으로서 마케팅 연구라면 필자는 책을 쓸 것이 아니라 다른 분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이런 의도를 반영하는 중에 마케팅 도서의 전형성에서 탈피하여 다소 거친 모습도 갖게 되었다. 비평, 강조, 소회(所懷), 힐난(詰難)과 필자 현업 경험담 등이 불쑥불쑥 때로는 다소 거친 문체로 등장하는 반면에, 전공 서적이나 논문에 등장하는 게 어울릴 것 같은 숫자표와 계산식이 거의 안 보이는 것이 그 예이다.
이 책은 광고대행사나 조사회사나 컨설팅사 같은 마케팅 전문가 집단의 종사자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만, 고객사에게 제출하는 보고서에 전문가적 난이도를 더하는 데에는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 없다. 대신, 고객사 비즈니스 입장에서 마케팅을 생각하는 데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국민 할매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가수 겸 작곡가 김태원은 다른 이의 노래를 들을 일을 일부러 피한다고 한다. 남의 노래를 듣게 되면 그 일부분 이라도 뇌리에 남게 되고 의도를 안 해도 자기 노래의 일부분으로 재활용되어 결과적으로 의도하지 않은 표절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안다고 한다. 표절이 불법이며 부도덕한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남의 노래의 작은 부분이라도 자기 노래에 섞여 들어가는 것 자체가 싫은 고집쟁이의 속내가 들어 있다.
필자는 이 책을 쓸 때 김태원 같은 결벽증을 갖고 작업하지는 않았다. 원고를 구성하기 전에 머리를 깨우기 위해서 이런 저런 책을 읽었고, 원고를 구성하는 도중에 소재를 얻기 위하여 이런 저런 책을 읽었다. 이 중에는 사서 본 책도 있고 도서관에서 본 책도 있고 인터넷 서점을 통해서 목차만 구경한 책도 있다. 이 책을 준비하면서 다시 펴 보게 된 책 중에서 인상적인 책 네 권을 떠올린다면,「한국 브랜드의 진화 및 발전?(김재일 저, 서울대학교 출판부 출판),「마케팅원리?(박찬수 저, 법문사 출판),「마케팅 천재가 된 맥스?(제프콕스 / 하워드스티븐스 원저 Selling The Wheel의 번역서, 국내 위즈덤하우스 출판),그리고 ?마케팅 불변의 법칙?(알리스 / 잭트라우트 원저 번역서, 국내 비즈니스맵출판)이다.
어떤 분이 자신이 쓴 두꺼운 책을 자랑하면서 (이분이 일컫는바)시중의 마케팅 잡서(雜書)와는 달리 신뢰성을 높이기 위하여 해외 원서들을 참고하여 만들었으며, 어떤 책의 몇 페이지를 참고하였는지에 관하여 일일이 주석을 달아 놓았음을 강조한 것이 생각난다.
아쉽게도 이 책 〈그리고 마불법C를 보라〉는 참고문헌 소개 공간을 따로 마련하여 특정한 책이나 논문들을 주르르 리스팅 하기가 참으로 애매했다. 이 책은 풍부한 자료로부터의 충실한 인용과 편집을 통한 재창조로 만들어지지 않은 탓이다. 그 대신에 필자가 학교를 다니고 직장 생활을 하고 컨설팅 사업을 하면서 읽었던 수많은 책과 논문과 기사와 교재를 통하여, 그리고 강의와 컨설팅과 현업을 통하여 가르치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면서 쌓은 지식, 그래서 노트북 바로 옆에 두고 보면서 옮길 수 있도록 준비된 형태가 아닌 지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한 것이 이 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많은 지식의 원전(原典)을 이제 와서 일일이 잡아낼 도리가 없는 관계로 참고문헌 코너를 따로 꾸밀 수가 없었다.
단, 알 리스와 잭 트라우트 공저인 마케팅 불변의 법칙 은 별도의 단원을 마련하여 해설한 만큼 확실히 잡아낼 수 있는 참고 문헌이다. 이 외에 이 책과 관련하여 참고 또는 인용을 굳이 논하자면, 그저 책 중간 중간에 독자 여러분의 집중력을 깨울 목적으로 신문기사, 광고, 홈페이지, 사전의 일부를 삽입하였고, 또한 다른 사람의 말이나 책으로부터 필자가 학습한 바가 필자의 지식이 되어 이 책 중에서 어떤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찾을 수 있는 한, 알 수 있는 한 그 출전(出典)을 그때그때 밝히려고 하였다.
따라서 본문 안에 이미 그 출처, 원전, 원작자가 드러나 있다. 집필에 관한 동기가 이토록 벌겋게 쌓여 있고 설령 필자가 책을 잘 쓸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출판을 통해서 필자의 컨텐츠를 도서로 만들 비즈니스 주체가 없었더라면, 이 책이 지금 이러한 내용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현실적이고 개인적인 적용성 측면에서 혹시 어떻게 조금이라도 독자에게 남는 게 있을 마케팅 실용서를 쓸 것 같은 저자를 발견할때까지 시간을 투자하며 몸소 수많은 마케팅 교육을 들은(정확히 말하면 tasting의 의미이다) 끝에, 저자의 다소 언더그라운드 풍의 컨텐츠에 주목하게 된 분이 없었더라면 출판 비즈니스를 잘 모르는 필자가 이 책을 낸 시기는 좀 더 나중이었을 것이다. 출판 제의서부터 마지막 탈고까지 많은 도움을 주신 영화조세통람의 김현영 본부장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필자가 무엇을 하든 늘 힘이 되어주는 가족들에게 감사한다.
한 수 윤
---「시작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