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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퍼돌
김지은 | 파란 | 2022년 10월 1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10.0 리뷰 1건 | 판매지수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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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10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137쪽 | 214g | 128*208*20mm
ISBN13 9791191897340
ISBN10 1191897346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처음을 영원히 기억하는 병을 줄게

나의 조각을 주우며 당신은 말했다

사 차선이 두 개면 많이 위험할까요
횡단을 기다리며 느리게 감기는 눈

그림자의 흔들림에 혈관은 좁아 들고
비가 오기 전의 냄새가 났다

나는 먼지를 읽을 수 있고
너의 굴곡과 닮은 나의 손금 위에서

잃어버린다
언젠가 완성되거나 흩어져 버릴

알약을 씹으면 경쾌한 소리가 나지만
머릿속은 무겁습니다

아무도 진단하지 못했던 너와 나의 상태에
유일한 진실은
서로가 서로의 증상이었다는 것
그럼에도

어디가 불편하냐고 물으신다면

처음이, 계속 오고 있다고
---「퍼즐」중에서

묻는 순간 선명해지는 대답이거나
입 밖에서 휘발되는 무게이기를 그러니

당신이 사랑했던 것은 이제 여기 없다

얼룩말은 거짓말
하면서 웃지라는 말과
파란색의 사슴, 도도새의 운명 같은 것들

가독성 없는 편지와
소나기가 지나간 숲의 길
삼 일쯤 앓고 난 뒤에 피우는
첫 담배의 향

고양이의 앞발, 새벽의 밀크티로는 부족했던

멸망의 기록은 어른의 몫으로 남겨 두고
나는 악몽에 젖어 깨어나는 밤
이마를 쓸어 주는 차가운 손이 될 것이다

후회하는 건 아닌데 후회 같은 기분으로

안녕,

오늘은 변명이 어울리는 날씨야
당신이 사랑했던
---「코튼 캔디」중에서

주머니는 흔들리기 좋지
깊고 까만 구멍이구나
함부로 집어넣을 수 있는 깊이로구나

당신은 통조림과 생수로
까망의 무게가 늘어난다고 자신한다
나는 칠월의 자두면 충분하다고 변명한다

조금 더 끈적거리는 상상을 해 볼까

이웃집 여자가 지게차에 깔려 죽었어
머리통이 박살 났다는데

시속 사십 킬로로 부서진
그런 아홉 시를 손꼽아 기다리는 동안
저녁은 식었고 아무도 전화하지 않았다

여전히 우리는 주머니를 보고 있고
무엇을 넣을지 고르는 중이다

어떤 소식이 사람들에게 발음될까
말라붙은 혀를 펼치면 뉴스가 후드득 떨어진다

성장을 그만둔 과일은 낙하하고 으깨진다
살점들 흥건하고 붉게 끈적거린다

몇 그루의 나무를 잊어야 저렇게 거대해질까

자두로 가득한 주머니는 울룩불룩 자라난다
발로 걷어차고 싶다는 충동이
주머니 밖의 세계를 흔들고
이야기를 지어내기 시작한다

기다려야지 가장 밑에 있는 자두부터 썩어 들어갈 수 있게
자두 하나 자두 둘 발끝이 짓이긴 자두가 흘리는
코가 얼얼하게 달고 단 냄새

당신 혹시 무언가 삼키지 않았어?

붉은 주머니 안으로 우리가 집어던진 것
그래. 오직 침뿐인 거니?
---「페이퍼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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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을 읽으며 나는 우리가 헤쳐 나가야 했던 가시덤불을 떠올린다. 온갖 덫과 방해를 넘어 여기까지 온 자랑스러운 발걸음들을. 녹지 않는 자두맛 캔디를 입안에서 굴리며 책 속을 걷다 보면 이렇게 다정한 슬픔이라니, 기꺼이 품을 내주는 문장이라니. 말라 가는 소녀들과 그들을 다스리려는 모략과 기형을 전시하는 폭력이 범람하는 시대에, 아픈 이들을 홀로 두지 않겠다는 결연한 연대의 마음을 읽는다. 이 시집이 가진 사랑스러움은 연약한 종이 인형에 조심스럽게 색색의 옷을 갈아입히는 마음에서 스며 나오고, “언젠가의 진심을 찾아내 오래, 쓰다듬어 주기를” 바라는 기도에서 흘러넘친다(「공중정원」).

김지은의 시들은 가장 첨예한 현재의 지점들을 가리키면서도 공감과 “최대한의 위로”를 놓지 않는다(「타로」). 이 시집은 ‘있었다’와 ‘잊었다’ 사이에서 꽃잎처럼 아문 상처를 들여다보고, 정의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고도 서로의 따듯한 바람 소리를 듣는 시간을 선사한다. 슬픔과 아름다움이 문득 구분되지 않을 때까지. 사랑했던 자리에서 무성한 마음들이 범람하는 지금, 우리는 이제야 만나게 되었다. “처음이, 계속 오고 있다고” 속삭이는 이 시인을(「퍼즐」).
- 이혜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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