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일의 메카인 인턴 시절 잡일 중에 제일 별로인 것은 사실 ‘인턴 일이 아닌 일’일 것이다. (…) 이런 일들이 싫은 이유는 귀찮거나 힘들어서가 아니라 의사가 지녀야 할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 (…) 솔직히 의사들은 위에 언급한 일들을 ‘잡일’이라는 고상한 단어로 칭하지는 않고 ‘똥잡’이라고 부른다(인턴똥잡, 1년차똥잡, 논문똥잡 등등). 얼마나 하기 싫은 일이면 일이 똥까지 됐을까.
--- 「잡일」 중에서
결국 부탁하고, 부탁을 들어주는 이유의 중심에는 환자가 있다. 환자가 좀 더 정확한 진단이 내려졌으면, 좀 더 빨리 치료를 받았으면, 좀 덜 괴로워했으면, 환자가 덜 부작용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병원의 많은 의사가 오늘도 서로 부탁하고, 부탁받는다. 아마 가족이 아닌 사람이 나를 위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게 되는 일은, 병원이 아니고서는 거의 드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병원의 근간은 사랑이 맞는 것 같다.
--- 「부탁」 중에서
삶에서 부딪히게 되는 수많은 크고 작은 벽에서 우리는 좌절한다.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하고, 모른 척 옆길로 가고 싶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많은 벽이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거라는 믿음이 있다면, 좀 타고 넘어설 용기가 생기는 것 같다. 나도 누군가가 마주치는 벽 앞에서, 한숨 크게 들이쉬고 주먹을 다잡게 할 용기를 주는 한 사람이 되면 좋겠다.
--- 「벽」 중에서
수련 과정은 단순히 전공 분야에 대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의사로서 품위를 배우는 과정이라고도 한다. 환자에게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정확하면서도 신뢰감을 주는지, 동료 의사를 어떻게 대하는 것이 예의 있고 매끄러운지, 사회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에게 의사가 어떠한 모습으로 보여야 할지 등등을 배우는 과정일 것이다. 비단 의사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직업인이 각자가 가지고 있는 귀한 모습을 더욱 빛나게 하려면 오늘도, 지금도 다듬어지고 있을 것이다. 반짝반짝 변화하는 우리가 모여 있는 한,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
--- 「변화」 중에서
우리는 교수님을 ‘유느님’이라고 불렀다. 나도 교수님의 그런 모습이 좋아서, 학생 선생님들, 인턴, 레지던트 선생님들, 간호사님들에게 존대하게 되었다. 하지만 교수님의 인자함은 보이는 것보다도 많은 경험과 실력이 뒷받침되어 더욱 빛났을 것이다. (…) 멋진 롤모델이 있다는 것은 삶을 여러모로 편리하게 해준다. 선택의 순간에서 ‘그분이라면 이렇게 할 것 같다’라는 적용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삶에서 두 번 다시 마주치기 싫은 사람도 많이 만나게 되지만, 닮고 싶은 사람의 모습을 조금씩 나에게 저장해 나가며 성장하는 것, 그것이 인생의 묘미가 아닐까?
--- 「아! 유느님」 중에서
훌륭한 무용수가 춤을 추는 것을 바라보면 한없이 가볍고 부드러워 보이지만, 사실은 엄격하고 철저한 수많은 연습이 뒷받침된다. 스스로 움츠러들고 자신이 없을 때, 전공의로서 마지막 날을 떠올린다. 그날 느꼈던 후련함과 허무함, 매끄럽게 일이 진행되던 리듬감을 기억한다. 숙련되어간다는 것은 참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또한 아름답기도 하다.
--- 「마지막 당직」 중에서
“선생님. 정말 최선을 다하신 거죠? 다른 방법은 없는 거죠?”
“네. 저희 아버지였어도 똑같이 했을 것입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임형균 환자는 아내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아내를 만난 직후 하늘나라로 갔다.
좋은 의사는 많은 경험과 지식으로 최선의 판단을 하는 의사일 것이다. 하지만 본인 말고는 아무도 건널 수 없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보고픈 사람이 올 때까지 함께 기다려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또한 의사뿐인 기에 시간을 되돌려도 나는 여전히 미숙한 의사일 것이다.
---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중에서
“어… 뛴다.”
나도 모르게 말을 내뱉은 순간, 심폐소생술을 하던 인턴들도, 약물을 주입하던 간호사도, 맥박을 재고 있던 내과 전공의도, 지켜보던 옆자리 환자까지 모두 동작을 멈췄다. 환자의 심장은 다시 뛰고, 우리의 시간은 순간 멈췄다. 나의 첫 ROSC였다. 사실 1년 차 때에는 심음을 들어도 긴가민가하고 이게 병적 신음인지 정상 심음인지 구분이 잘 안 된다. 하지만 그때 들었던 크고 잡음 없는 정상 심음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누구라도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면 평생 내과 의사로 사는 것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심장이 뛴다는 것.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너무나 특별한 일이기도 하다
--- 「첫 ROSC」 중에서
무리한 줄 알면서 부탁을 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그것을 한 단어로 줄이면 ‘간절함’ 일 것이다. 치료가 잘 되었으면 하는 간절함, 부작용이 적었으면 하는 간절함, 더 건강하고 싶은 간절함…. 내가 가연 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것도 그 간절함이 전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환자의 간절함을 못 본 체하는 의사가 되지 않게 해달라고, 오늘도 기도한다.
--- 「간절함에 대하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