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하면 네가 기녀가 아니면 양반집 규수라도 된단 말이더냐?”
그렇게 말하는 사내의 눈은 이미 젖어 속살이 훤히 드러난 소진의 저고리 위로 떨어졌다. 소진은 멋쩍은 듯 슬그머니 자신의 가슴팍을 팔로 가렸다.
“아, 이것은…….”
“그렇다면 참으로 불경스러운 규수가 아닌가.”
그의 말대로 양반집 규수라고 하기에는 차림새가 단정하지는 못했다. 사내의 뜨거운 눈길이 소진의 눈, 코, 입을 눅진하게 훑기 시작했다.
--- pp.22~23
“어쩐지 낭자와 함께 그런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그렇습니까?”
“아, 그러려면 먼저 이 마음이 통하여야 하는가.”
방심하고 있던 소진의 뺨에 헌의 달콤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헌은 그렇게 말하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소진의 심장이 콩, 콩, 콩 작게 뛰는 것 같았다.
“하면 이 마음이 통하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 pp.46~47
“세자빈으로 제격인 규수입니다.”
그날의 내 은밀한 기억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이니.
헌은 그 말을 삼키며 간택이 열리고 있는 쪽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그곳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깊어지고 있었다.
--- p.145
갑작스럽게 다가온 그를 피하려고 그녀가 슬금 비켜났지만, 이번에는 헌이 다른 손이 다른 쪽 팔걸이를 짚었다.
그의 품 아래에서 옴짝달싹 못 하게 된 소진은 자신의 얼굴을 뚫을 기세로 빤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어찌 이러시는지…….”
그러자 곧, 헌의 젖은 입술이 반듯하게 벌어졌다.
“애태우는 거, 맞는데.”
“예?”
“낭자가 내 애를 태우고 있는 거, 맞습니다만.”
--- pp.203~204
“힘을 빼고 그리고 싶은 대로 손을 움직여보시지요. 어차피 이미 종이 위에 붓이 내려앉은 상태입니다.”
그의 말대로 이미 그녀의 붓은 종이 위에 떨어진 채였다.
아이가 첫걸음마를 떼듯 소진은 떨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심호흡을 하며 손을 움직였다. 힘을 뺀 채, 손을 움직이자 헌이 그녀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주었다. 대신 그 붓이 흔들리지 않게 그녀의 손을 꼭 움켜쥔 채로.
--- p.282
“저하……?”
그녀의 부름에도 헌은 움직일 수 없었다.
‘내 몸이…… 어찌 이러는 것이지.’
소진이 움직일 때마다 가슴 위로 부서지는 머리카락이 자꾸만 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의 뺨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도 같았다. 소진은 점점 얼굴이 상기되는 헌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 그의 이마에 제 손바닥을 조심스럽게 갖다 댔다. 동시에 헌의 심장이 또 한 번 바닥 아래로 추락하는 듯했다.
--- p.371
“좋아졌다고 했던 것도.”
“…….”
“그것도 거짓입니까?”
그렇게 되묻는 소진의 목소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때, 아무런 말도 없이 그녀만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던 헌이 소진의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아니. 그건 인정 못 해.”
갑작스러운 그 말에 소진이 굳어버렸다.
“다른 건 다, 인정하겠습니다. 애초에 낭자에게 용모화를 주었던 것도 활을 가르쳐 주겠다고 한 것도, 여기까지 오려고 한 것도 모두 낭자의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헌은 그 말을 이어가면서도 소진에게서 조금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지금까지보다 더 절절하게, 그리고 진실하게 소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졌다는 말, 내게 낭자가 필요하다는 말은 진심입니다.”
--- pp.426~427
2권
두 사람은 밀착한 채로 손을 포개고 있었다. 소진은 자신의 등 뒤에 닿은 탄탄하고도 뜨거운 헌의 가슴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저…… 저하…….”
그녀가 더듬더듬 입술을 달싹이자, 그제야 헌이 황급히 감싸고 있던 소진의 손을 놓았다.
“아.”
그러곤 황급히 그녀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기 위해 발을 떼려는 순간.
촉.
예고 없이 빙그르르 돌아서던 소진의 입술이 그만 헌의 입술에 닿고 말았다!
--- p.63
“내 것인 것 같은데 내 것이 아니고, 하지만 내 것이었으면 하는…… 그런 마음.”
“예……?”
“난 그것이 연모라고 생각합니다.”
헌의 말에 소진이 잠자코 그를 돌아보았다.
--- p.91
“내가 깔아 놓은 꽃길을, 낭자가 그 꽃신을 신고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헌의 목소리에 소진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정자 뒤쪽에 숨어 있던 헌이 뒷짐을 진 채, 환하게 웃으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낭자의 곁에는 평생 내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소진의 동그란 콧잔등이 빨갛게 물들어갔다. 엷은 미소를 머금은 헌이 그녀의 앞에 다다르자, 그는 무릎을 굽혀 손수 소진의 발에 그 꽃신을 신겨 주었다.
“저하…….”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두 발에 꽃신을 신긴 그가 고개를 젖혀, 소진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 p.150
그가 지그시 눈매를 반으로 접으며 그녀를 향해 볼을 쑥 내밀었다.
톡, 톡.
뺨에 입술이라도 맞추어달라는 듯, 검지로 자신의 볼을 가볍게 두드려 보이는 헌. 소진은 자신의 양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비전 앞이라 위험합니다……!”
위험하다는 그녀의 말에 헌이 한 손을 번쩍 들어 소진을 제 품 속에 가두었다. 내관복의 풍성하게 늘어진 소맷자락 속에 그녀를 감추며 슬쩍 허리를 구부리니 완벽하게 가림막이 생겼다.
“이러면 되는 것이지.”
소진은 그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까치발을 들어 촉, 그의 뺨에 제 입술을 가볍게 맞추었다.
--- pp.206~207
“늦어서 미안하구나, 소진아.”
“저하……?”
“한 명도 살려 보내지 말아라! 모두 잡아 내 앞에 무릎을 꿇려라!”
그렇게 소리치는 헌의 목울대에 굵은 핏대가 섰다. 소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몸에 등을 기댄 채 바들바들 떨었고, 그는 능숙하게 말을 몰며 무사들을 한 손으로 제압하고 있었다.
“저하…….”
“잠시면 된다.”
그 말과 동시에 헌이 소진의 눈을 한 손으로 살며시 가렸다.
--- p.328
“소진아.”
“예, 저하…….”
“이 겨울이 끝나면 함께 살자꾸나.”
그의 말에 소진이 얼떨떨한 얼굴을 해 보였다.
“아무리 거친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해도, 내 이 손은 절대 놓지 않을 것이니. 꽃 피는 봄이 오면 이 맞잡은 손에 같은 가락지를 나눠 끼고, 같은 집에서 같은 꽃을 바라보며 함께 살고 싶구나. 그때까지 잡은 내 손, 놓지 않을 수 있느냐?”
그의 물음이 그녀의 귓가를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금세 소진의 커다란 눈에 뜨거운 눈물이 뿌옇게 차올랐다.
--- pp.333~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