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그가 내게 “이야깃거리가 많은 나라에서 태어난 당신이 부럽다”고 말했고, 나는 그에게 “당신의 자유가 부럽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난다. 바로 이러한 대화는 일본에서 오에 겐자부로와 만났을 때에도 비슷하게 나눴던 대화였다. 우리네 같은 이른바 제3세계적 조건의 사회에서는 ‘이야깃거리’란 무수한 억압과 고통의 산물이기가 십상이고, 저러한 말이 내심으로는 ‘빈정거림’으로 들리기 쉬운 때문이다. 내가 그들에게 ‘자유’가 부럽다고 한 것은 정치적 의미도 포함되어 있지만 이를테면 창작의 전제조건으로서의 그 자유를 말하고 싶었던 셈이다. 우리 작가들에게 짊어지워진 무수한 책임에 대한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라고나 할까. 그렇지만 나로서는 여행지의 현실을 비켜 지나가는 그의 ‘자유’가 ‘순진무구’하다고 빈정거릴 수는 없었다.
--- [황석영,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 『황금 물고기』] 중에서
“혹시 책을 안 읽는 사람은 자기 생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려는 건 아니겠죠?”
“정확하게 그 말을 하려는 겁니다. 자신의 삶을 사랑한다면, 그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다 알아내려고 애쓸 겁니다. 책뿐만 아니에요. 음악도 듣고, 그림도 보고, 춤도 추고, 외국에도 갈 거예요. 가능한 한 모든 걸 맛볼 겁니다.”
--- [김연수, 「결국에는 모두 자신에게 돌아가는 이야기」, 『황금 물고기』] 중에서
상찬이 백 마디인들 무슨 소용이랴. 책은 읽어야 맛인 것을. 읽자. 읽으면 알게 될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왜 셰익스피어인지. 고유명사였던 그의 이름이 어떻게 보통명사가 되고 대명사가 되었는지.
--- [김미월, 「참 찬란한 신세계」, 『템페스트』] 중에서
고전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농담이라고는 씨도 안 먹히게 생긴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죠, 덩치는 어찌나 큰지 함부로 덤벼들었다가 혼쭐날 것 같죠, 딱 심술맞고 꼬장꼬장하고 냄새나는 노인네 같습니다. 고전을 읽는다는 건 그런 노인네와 한방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 그러니 맛도 안 보고 등을 돌리지요. 꼰대하고는 안 놀아. (…) 그런데 이 꼬장꼬장한 노인네, 조금만 친해지면 꽤 재밌어집니다. 귀여운 구석도 있고요.
--- [천운영, 「키 작은 할아버지 괴테와 연애하게 된 사연」, 『파우스트』] 중에서
두 가지 임무를 가지고 탄생한 소설이다, 『여명』은.
그 하나는 작고 보잘것없는 이 세상 인간에게 사랑이라는 요술에 취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함과 동시에 원숙한 사랑의 힘을 수혈해주는 것이고, 또하나는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팔팔한 자극을 촉진하는 것.
--- [이병률, 「사랑은 ‘언어’라는 도구 없이는 불가능하다」, 『여명』] 중에서
이 세계에는 대체가 불가능한 경험을 향유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그것을 ‘겪으’려는 이들이, 비록 소수라 할지라도 분명히 존재한다. 만약 어떤 소설이 그런 유일무이한 경험을 줄 수만 있다면, 그 작품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경험을 찾는 독자들께 이 책을 권한다.
--- [김영하, 「고통의 독서, 보상은 어디에?」, 『염소의 축제』] 중에서
하, 고전들은 왜 이렇게 하나같이 뒷부분까지 읽어야 흥미롭고, 다시 한번 읽었을 때 더 큰 감동을 주며, 나이가 들어 읽으면 공포와 전율이 일게 하는 것인지?
--- [류보선, 「여성의 힘 혹은 고전의 힘」, 『더버빌가의 테스』] 중에서
그런 책들이 있다. 책장을 열기 전 표지와 저자의 이름을 번갈아 쳐다보고 눈대중으로 두께를 가늠해보며 마라톤 출발선상에 선 선수처럼 긴장과 흥분, 기대와 각오로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게 되는 그런 소설 말이다. 또 그런 작가들이 있다. 마지막 페이지를 다 읽고 책장을 덮었을 때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그저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어떤 높이(깊이가 아니다)에 절망해 망연자실, 또 한숨을 내쉬게 되는 그런 작가 말이다.
--- [천명관, 「루슈디, 전체에 대한 사라진 열정」, 『한밤의 아이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