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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근현대사

: 사건, 공간,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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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3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506쪽 | 744g | 152*225*25mm
ISBN13 9788962573664
ISBN10 8962573660

카드 뉴스로 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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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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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단체 중심으로 전개된 어린이 운동의 주요 내용은 전통 사회의 폐습을 없애는 것이었다. 그것은 3·1운동 이후 진주 지역 사회에 형성된 사회운동계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전통 사회의 유습을 극복하려는 사회적 분위기는 여성에게도 적용되었다. (…) 1905년 11월 진주에 이주한 호주의 의료선교사 커를 일행은 우선 진료소를 개설하고 학교를 열었다. 그들은 남자 학교와 여자 학교를 같이 세웠다. 교회에서는 여성의 사회 활동을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권장했다. 학교와 교회는 여성 교육과 활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러한 활동은 여성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는 데 이바지했다.
---p.27

인권은 개개인이 누리며 적용되지만, 또한 사회적 보장이 요구된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형평사 활동가들은 공동체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사원들에게 끊임없이 단결과 연대를 요구했다. 이렇듯 이 형평사는 창립 초기부터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백정 공동체 전체의 권익을 위한 활동을 벌였다. 백정 사회도 빈부 격차가 있고, 배움의 정도가 달랐다. 그렇지만, 형평사는 백정 공동체를 강조했고, 백정 모두의 권익을 위한 활동을 벌여 나갔다. 특히, 형평사 내의 사회적 약자를 위하여 활동했다. 배우지 못한 사원들을 위하여 교육과 계몽 활동을 펼쳤고, 일자리가 불안정하고 부당하게 대우받는 사원들을 위하여 공동 사업을 구상했다. 때로는 곤란에 놓인 사원들을 위하여 동맹 파업을 벌였다. 차별받고 공격당하는 사원들을 위하여 연대 투쟁을 벌였고, 불합리한 차별 관습에 연대하여 대항했다. 더 나아가 사원의 상부상조와 친 목, 경제적 권익 증진을 위한 산업별 조합을 결성했다. 이처럼 형평사의 활동 방향과 내용은 공동체 운동의 성격을 끊임없이 견지했다.
---p.53

가까스로 조국에 돌아온 피폭자들은 잠시 부산에 머물다가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하지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지독한 가난과 차별이었다. 일본에서 온갖 고생 끝에 모아둔 재산은 원폭으로 일순간 잿더미로 변해 사라져 버렸다. 자연재해와 식량난을 견디지 못해 일본으로 갔다가 원폭을 맞고 돌아온 고향은 달라진 게 없었다. 혹독한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일부 피폭자나 농민들은 고향을 등지고 다시 일본으로 밀항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p.72

피폭자가 받은 충격과 상처는 병리학적 트라우마(정신적 외상 충격) 외에도 그 시대의 정치적·사회적 환경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합천 지역 1세 피폭자들은 자연재해에 내몰린 약자였고 ‘화려한 황국신민’이 아닌 강제 노동과 전쟁에 나가 싸워야 하는 충성스러운 ‘총후국민(銃後國民)’이 되어야 했다. 이 두 굴레는 원폭과 결부되어 견고한 트라우마가 되었다. 합천 지역 피폭자가 지닌 트라우마의 역사성과 삶을 통한 트라우마의 재생산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p.77

전시 총동원 체제에 집중된 여성의 ‘끌려감 이야기’의 정점에 “일본군‘위안부’ 제도”가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일본 본국과 식민지, 관동군 지배지, 위임통치 지역, 점령지 등에서 일본 정부의 행정력 이 작동하는 가운데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하고 관리했다. 군의 허가 와 감독 속에서 여성들이 업자에게 이끌려 국경을 넘고 ‘위안부’ 생활을 했다. 일본군과 정보는 위안소 이용을 통해 병사의 군기와 성병을 관리하고,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 군국주의 아래 여성의 성은 군수품처럼 취급되었고, 위안소에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다.
---p.105

더욱이 이들이 성노예로서 감내해야 했던 원시적 피해는 귀환 후에도 가부장적 사회 문화 속에서 일생에 걸쳐 생애사적 피해로 재생산되었다. 일본인과 조선인 반장의 강요에 의해 정신대로 끌려간 양산 출신 김복동은 전쟁이 끝난 후 싱가포르에 있는 제10육군병원에서 기적처럼 형부를 만나 돌아오지만, 여덟 살 위인 남편의 반복되는 ‘외도’를 견디다 끝내 이혼했다.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는 말에 속아 중국 다롄으로 끌려갔던 통영 출신 김복득은 7년의 고초를 겪고 귀국하지만 15살 많은 남편의 첩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폭력에 시달렸다. 진주 출신 임정자 역시 뒤늦게 결혼했으나 남편으로부터 구타를 감내하며 평생을 지냈다. 이들의 생애사는 가부장적 한국 사회에서 전시 성노예 피해자의 재희생자화(re-vitimization)가 진행되는 메커니즘과 루트를 드러내 보여 준다.
---p.106

조개 캐러 가다 강제 납치되어 끌려간 남해 출신 박숙이는 ‘정을 나눈 남자’가 있었지만 갖가지 애를 써도 아기가 생기지 않았다. 결국 박숙이는 버려진 아이 3명(아들 1명, 딸 2명)을 입양해 홀로 키웠고, 아이들이 장성하고 나서야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임을 신고했다. 고국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임신한 사실을 알고 물에 빠져 죽으려 했으나 차마 죽지 못했던 진주 출신 강덕경은 부산의 고아원에 아이를 맡기고 주말마다 보러 갔지만, 아이가 4살 되던 해 폐렴으로 사망한 이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혼자 살았다
---p.113

피해자들은 군경 토벌대에 쫓겨 산으로 피신한 20~30대 청년들과 야산대나 빨치산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학살된 평범한 민간인들이 대부분이다. 군과 경찰에선 그들을 ‘통비분자’라고 지칭했다. 적으로 간주된 사람들은 거제의 사례처럼 토벌대가 옆 마을에서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잡아서 고문하거나 죽인다는 소문을 듣고 산으로 피신한 것이다.
---p.165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표적인 가해자는 군과 경찰이다. 경남뿐 아니라 4.3사건과 여순사건, 한국전쟁 이전에도 가해 집단은 모두 군 아니면 경찰이었다. 경남의 민간인 학살 사건에 개입한 군은 육해군 특무대(CIC)와 군단이나 사단 예하의 정보참모부(G-2)였다.
---p.167

이 같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이 사건은 1,400명을 웃도는 민간인 희생자를 낳은 국가범죄 내지 국가폭력이자, 인도에 반하는 죄임과 동시에 전쟁범죄에 해당한다. 바로 이러한 법적 성격에서 사건의 해결을 위한 지침을 찾자면 가해자인 국가는 ① 철저한 진상 규명에 기초하여, ② 책임자를 처벌하고, ③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④ 국가 배상을 해 주어야 하며, ⑤ 재발 방지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이 사건은 재판을 통해 일부 진실이 규명되고 관련자가 처벌되었지만 예상했던 재판의 유죄 판결이 집행되지 않음으로써 책임자에 대한 사실상의 형사 처벌도, 총체적인 진실 규명도, 세월 동안 피해자에 대한 합당한 구제와 국가배상도, 따라서 실질적인 명예 회복도 이루어지지 않은 미완의 사건으로 남았다
---p.181

거듭 말했듯 거창의 학살과 산청·함양 지역의 학살은 제11사단 9연대의 작전명령 제5호에 근거한 연대 합동 작전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동일 작전명 근거하여 부대가 이동하고, 인명을 살상하고, 재산을 파괴했다. 따라서 거창 사건과 산청·함양 사건은 전체로서 하나의 단일하고 동일한 사건으로 처리되어야 옳다.
---p.182

이에 따라 군사쿠데타 세력은 거창군 신원면 대원리 ‘거창양민학살 사건’ 희생자 합동묘 및 위령비를 파헤치고 훼손했다. 그리고 6월 15일 군사 정권은 거창의 합동묘에 대한 개장 명령을 내렸는데, 경남도지사였던 최갑종은 거창의 피학살자 합동묘소(박산합동묘역)가 묘소설치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거창경찰서 신원지서장 이중화에게 인부들을 동원하여 묘역에 묻혀 있던 유해를 파헤치도록 했다. 그리고 파낸 유해를 흙과 함께 유족 수에 맞게 분배해 유족들이 가져가도록 강요할 것을 종용했다. 유족들은 이 같은 조치에 극렬히 반대했으며, 결국 봉분만을 제거한 후 위령비에 새겨진 추모글을 정으로 쪼아 글자를 알아볼 수 없게 한 뒤 파괴하여 땅속에 묻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합동묘역 훼손을 거부하는 유족에게 총칼을 들이대며 위협하기도 했다.
---p.191

마산수출자유지역에 입주한 기업체들에게는 상당한 특혜가 주어졌는데, 정부가 조성한 표준공장은 평당 약 15달러, 자가 공장은 평당 2.4달러의 최저 임대료만 지불하면 되었고, 용수나 전력도 최저 가격으로 공급되었다. 입주 기업체의 수입 물품에 대해 관세, 물품세가 면세되었고, 법인세, 영업세 등의 각종 세금도 5년간 면제되었다. 마산수출자유지역관리청에서 안정적으로 저임금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제공해 주었고, 노동조합을 원천 봉쇄했다.
---p.225

창원기계공업기지는 ‘산업도시’의 일환으로 건설되었다. 자연스레 시가지가 발달하고 있었던 마산시와 인접해 있으면서도 창원기계공업기지 노동자들의 주거를 만들어야 했던 이유는 중화학공업의 특성상, 그리고 대기업의 현지 토착화를 위해 숙련 남성 노동자들의 지역 이탈을 방지해야 했고, 숙련공의 기술 재생산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창원은 비슷한 시기에 마산 수출자유지역에 인접해서 건설되었지만, 수출자유지역이 ‘산업화의 섬’으로 산업도시 발달로 이어지지 못했던 반면, 최초의 계획도시, 최초의 산업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p.231

3·15부정선거의 원흉이 이기붕과 최인규라면, 경남 특히 마산과 창원에서 엄청난 부정 선거를 자행한 장본인은 자유당 경남도당 위원장 이용범이었다. 마산 오동동에 있던 그의 자택을 ‘오동동 경무대’라 부를 정도로 그는 엄청난 세도를 부렸다.
---p.296

대구 2·28의거와 대전 3·8의거는 학생들이 독재에 맞서 벌인 최초의 반정부 시위였다. 이후 한국의 학생들은 30여 년 동안 불의와 부정, 독재에 맞서 시위 등을 통해 발언하기 시작했다. 전국 주요 도시에서 학생 시위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가는 가운데 마산은 겉으로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하지만 은밀하게 학교마다 ‘데모’를 모의하고 있었다.
---p.299

개표장인 시청 방면으로 시위 군중이 구름처럼 몰려갔다. 시청 근처에 다다르자 경찰은 시청 앞에 이중삼중의 방어막을 치고 소방차를 세워 놓고 강력한 헤드라이트를 시위 군중을 향해 비추고 있었다. 시위대가 돌을 던지자 경찰이 길바닥으로 위협 사격을 했다. 시위대가 “공포 다!”, “나가자!” 외치며 돌진하자 최루탄이 펑펑 터졌다.
---p.302

비 오듯 쏟아지는 총탄에 길거리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혼비백산한 군중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3·15의거 최초의 희생자가 거리에 나뒹굴었다. 총상을 입은 사상자가 거리에 쓰러졌다. 그 긴박한 순간에도 부상자를 등에 업고 병원으로 나르는 용감한 청년들도 있었다. 한편 소방차 앞에서 시청을 경비하던 경찰 병력은 시위대의 중심부를 향해 강력한 성능의 최루탄을 무차별 발사했다. 그 순간 남선전기 마산지점 앞에서 3·15의거의 상징, 김주열이 얼굴에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p.303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운 계엄군이 각 대학교와 관공서에 일제히 배치되었다. 하지만 부산의 학생과 시민들은 계엄령이 내렸는데도 계엄군에 맞서 시위를 벌였다. 저녁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서 또다시 부산의 도심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가을비가 내리는 가운데 부산의 도심에는 계엄군과 경찰기동대가 탱크와 장갑차를 포진시키고 삼엄한 경계망을 펴고 있었다. 저녁 7시 20분경 부영극장 주변에 운집한 학생과 시민들은 계엄군에게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시위대는 경찰과 공수여단 병력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다시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이처럼 부산 시민들은 박정희 정권의 계엄령에 굴하지 않고 대담하고 용맹한 투쟁을 펼쳤다.
---p.335

그때까지 한 번도 시위 경험이 없던 학생들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망설이고만 있었다. 그 순간 한 학생이 불쑥 일어섰다. “우리는 한국대학생연맹에도 가입돼 있지 않고 많은 사람으로부터 경남대는 돼지 새끼만 모여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여기 있는 자들은 모두 탈을 쓴 돼지다. 아무리 우리의 자유와 진리에 대한 이상이 높고 거룩하다고 해도 현실과 격리된 이상은 가치가 없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솔직히 얘기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를 대역사의 증인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의를 인식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 멍청히 앉아만 있지를 말고 우리의 이상을 과감히 외쳐라.” 연설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학생들은 함성을 지르며 스크럼을 짜고 “으쌰! 으쌰!” 외치면서 교문을 향해 움직였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최초의 경남대 학생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p.338

한국 사회에서 노동운동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다지 곱지 않다. 오랜 반공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노동운동을 불온한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여전히 남아 있는가 하면, 대기업 노동자들의 합법적인 파업과 투쟁을 집단이기주의로 바라보는 시각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철밥통’이나 ‘귀족 노동자’의 이미지와 전혀 무관한 저임금 비정규노동자들의 요구와 투쟁에 대해 쉽게 우호적인 여론이 조성되는 것도 아니다.
---p.364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발전 과정에서 지역 노동운동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지역’은 노동자들이 기업별 노조의 벽을 넘어 계급적 연대를 실천하는 일차적 단위였고, 국가권력과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공간이었다. 또한 지역은 민주노조운동의 주요한 활동 기반으로 노동자들의 계급적 정체성이 형성되고 재생산되는 단위였으며, 노동자 정치운동의 측면에서는 계급 정치의 기초를 다지고 확장하기 위한 출발점이었다
---p.365

먼저 창원 공단의 삼성라디에타에서 노동자 40여 명이 1984년 5월 노조를 결성했으나 회사 쪽의 회유와 협박에 못 이긴 노조 간부와 조합원들이 탈퇴하는 바람에 노조가 해산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수십 명의 노동자들이 ‘자진퇴사’라는 이름으로 사직을 강요받고 회사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삼성라디에타 노동자들은 그 후에도 끈질기게 노조 결성을 준비하여 이듬해인 1985년 4월 노조 결성에 성공했다. 창원공단의 손꼽히는 대기업인 한국중공업에서도 1983년부터 노조 설립을 준비하는 모임이 시작되었고, 이들 중 4명이 1985년 5월, ‘악질 반장’의 갑질을 바로잡기 위한 연판장을 돌리다가 해고되었다. 하지만 남은 이들은 김창근을 중심으로 6월 24일 기습적으로 노동조합을 설립했다.
---p.372

1987년 7월 5일, 현대엔진에서 노조가 결성되었다. 노동자 대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터진 것이다. 현대엔진에서 지펴진 노동자 대투쟁의 불꽃은 삽시간에 울산 전역을 휩쓸었다. 7월 15일 현대미포조선, 21일 현대중공업, 24일 현대자동차에서 노조가 결성되어 설립 신고를 둘러싸고 노동자들과 회사가 충돌했다. 울산에서 불붙은 노동자 대투쟁의 불길은 7월 말에 부산과 창원으로 옮겨붙었고, 8월에는 마산을 거쳐 대우조선으로 건너갔으며, 이후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공단이 밀접한 영남권과 서울·인천·경기 등 수도권은 물론, 전라, 충청, 강원, 제주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모든 지역에서 빠짐없이 파업이 전개되었다.
노동자 대투쟁은 말 그대로 “10년을 하루에 뛰어넘은” 비약적인 투쟁이었다. 노동부에 따르면 이해 6월 29일부터 10월 31일까지 발생한 노사분쟁 총 건수는 3,311건이었고, 그 가운데 쟁의 행위를 수반한 분쟁은 97.7%에 해당하는 3,235건이었으며, 쟁의 행위에 참가한 총 인원 수는 122만 5,830명이었다. 이는 10인 이상을 고용한 기업체에서 일하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36.8%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p.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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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역사를 통해 지식을 과시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나라 고대사나 중세사에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이도 많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을 뿐 아니라 지금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지역의 역사, 그중에서도 근현대사에 관심을 두는 이는 드물다. 그런 역사를 기록한 책이 귀한 탓이기도 하다. 그 귀한 기록이 이 책에 담겼다. 기억은 잊히지만 기록은 역사가 된다.
- 김주완 (전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
지역은 거듭 다시 발견되고 만들어지는 삶의 장소이다. 지역(민)의 눈으로 역사를 쓰는 것은 지역의 삶이 갖는 의미를 새로 발견하는 일이자, 21세기 한국의 위급한 지역 소멸 문제를 풀기 위한 근원적 자기 성찰이다. 『경남 근현대사-사건·공간·운동』은 지방 차별을 당연시해온 관성적 인식에 도전한다. 경남을 새로운 역사 장소로서 일깨워 주는 이 노작(勞作)을 통해 우리는 지역의 현재에 개입하고 변화를 도모하기 위한 인식과 힘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실천을 쌓아가는 과정 자체가 지역을 혁신하는 귀중한 시도라는 점에서, 이 책은 경남은 물론이고 새롭게 지역사를 모색하는 모두에게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 허영란 (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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