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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3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256쪽 | 268g | 130*200*20mm
ISBN13 9791167522719
ISBN10 1167522710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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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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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섞여 흐느끼는 소리도 들려왔다. 가만히 누워 잘못 들었나, 귀를 기울였다. 옆을 더듬었다. 아내가 없다. 비어있는 아내의 자리를 보다가 또다시 들려오는 흐느낌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욕실 안으로 들어서기가 망설여졌다. 조심스레 손잡이를 돌렸다. 문이 열렸고,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아내는 욕조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욕조 안으로 쓰러질 듯 아내는 위태롭게 보였다.
---p.7

짧게 친 백발에 뾰족한 두상의 남자. 백발의 남자는 미래파 안에서 ‘하얀 늑대’로 불렸다. 미래파 신자들 사이에서 돌고 있는 신종 환각제도 ‘하얀 늑대’로 불렸다. 그 약을 퍼뜨린 백발의 남자에게서 그 별칭이 생겨난 것이다. 백발의 남자가 아내의 학교 앞에 나타났다고 했다. 아내와 얘기를 나누던 백발의 남자. 그는 하얀 늑대가 아니었을까. 취재 중 하얀 늑대로 추정되는 남자에게서 협박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 편안하게 살려면 미래파에 대한 취재를 그만두라고. 나는 오기가 생겼다. 제보자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p.22

“왜 또 온 거죠?” 여자의 날카로운 음성이 내 뒤에서 쏟아졌다. “아내 때문에요.” 여자가 의심스럽게 나를 보았다. “아내가 여기 갈산에 왔거든요.” “좋아요. 어디 얘기나 들어보죠.” 여자가 교실 한곳을 가리켰다. 나와 여자는 빈 교실로 들어왔다. “미래학교는 문을 닫은 걸로 아는데, 여긴 왜 있는 겁니까?” 내 질문에 그녀가 단호하게 답했다. “다시 열 거예요.”
---p.45

“아내한테 분명 무슨 일이 생겼다니까요.” “예, 예.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네요. 당신 표정만 봐도. 평소에 형씨가 와이프를 어떻게 대했는지도 알 것도 같고. 뭐랄까, 와이프에 대한 죄책감? 와이프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죄책감이 이런 황당한 상상을 하게 만들었겠죠. 나도 와이프하고 이혼하고 나니까, 별별 생각 다 나더라꼬. 분명 선생님 와이프한테 무슨 일이 생겼을 거야. 근데, 선생님.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본인에 대해서.” 딱하다는 그의 시선을 나는 피했다.
---p.60

나는 주위를 살폈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불길한 기분이 솟구쳤다. 속이 울렁거려 헛구역질이 나왔다. 아까 창문 밖에서 어른거렸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 자가 들어와 박천정을 죽였다. 꼼짝없이 누명을 뒤집어쓰게 생겼다. 나는 박천정 옆에 놓인 과도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챙겨 나왔다. 내 차에 있던 칼이니 내가 의심받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p.99

다른 남자가 주희를 안마의자에 강제로 눕혔다. 주희가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작적으로 사지를 배배 꼬았다. 땅딸막한 남자가 주사기를 손에 들었다. 주희의 팔 안쪽에 바늘을 찔러 넣었다. 그때였다. 무음이던 소리가 불쑥 살아났다. 주희의 입에서는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웅얼웅얼 흘러나왔다. 그 웅얼거리던 목소리가 점차 하나의 목소리로 모였다.
---p.131

갑자기 검은 고양이가 도로로 뛰어들었다. 노란 동공이 반짝였다. 나는 고양이를 피하려다 바로 앞에 붙어있던 오토바이와 추돌했다. 부딪힌 오토바이가 중심을 잃었다. 내 차가 중앙선을 넘었다. 둥근 헤드라이트가 맞은편 차선에서 튀어나왔다. 불빛이 내 시야를 삼켰다. 입이 벌어졌다. 서지은이 벨트를 잡았다. 나는 핸들을 옆으로 꺾었다. 불빛이 사선으로 비켰다. 덤프트럭이 중앙선을 넘었다. 흙무더기가 트럭에서 쏟아져 내렸다.
---p.157

한국 마케팅 연구소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갔다. 메인 페이지에 한스 홀바인의‘대사들’그림이 크게 떠 있었다. 대사들 밑에 그려진 길쭉하고 허연 상. 가장자리에서 보면 해골이 드러난다는 그림. 따지고 보면 죽음은 도처에 있다. 인간이 아무리 죽음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친다고 해도. 찬란한 문명의 벽을 둘러 세워도 죽음은 인간 바로 뒤에 있다는 확실한 진실을.
---p.191

사람의 뇌가 든 투명 유리병이 그곳에 있었다. 뇌에는 전극 다발이 꽂혀 있었다. 그 옆에는 대형 모니터가 세워져 있었다. 추상화에서나 봄직한 선의 패턴들이 거미줄처럼 어지럽게 그려지고 있었다. 나는 병 속에 든 뇌를 가만히 응시했다. 누군가의 인기척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고개를 돌렸다.
---p.220

기억이라는 게 원래 불완전하니까. 선배는 심리적으로도 취약했어. 선배는 지호 일로 언니와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고 모든 책임을 언니한테 돌리려 했지. 물론 언니를 증오했을 테고. 박천정은 선배의 그 감정에 불을 붙였어. 그날도 선배는 박천정과 함께 있는 언니의 모습을 환상 속에서 봤을 거야. 그날 밤, 선배는 언니와 심하게 다퉜어.” 나는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듯했다.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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