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동안 종종 내가 ‘지도’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진에 관한 생각들 혹은 개별의 사진 작업들이 지나온 길을 보여주는 지도일 것이다. 지나온 길을 볼 수 있으면 그 길이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뻗어갈지 예측하는 것도 가능하다. 혹은 그저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아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일이다. (…) 이 책은 사진 전체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개별 작가나 작품에 관해서도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의 장에서 한 권의 책을 주로 다루면서도, 그 책을 전체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또 다른 책이나 생각들과의 연결을 그려보고자 했다. 여기서 내가 이은 연결은 기본적으로 각 책과 저자의 생각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으며 어떤 함의를 지니는지 설명한다는 점에서 그들을 (어려운 것에서 사용해볼 만한 것으로) ‘구제’한다.
---「들어가며: 약도를 그려 당신에게 건네주기」중에서
보는 방식은 단지 대상을 바라보는 문제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본다는 것은 무언가를 판단하는 것이고, 판단은 행동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사진은 사람들의 보는 방식을 반영할 뿐 아니라, 보는 이에게 영향을 준다. 우리가 어떤 사진을 좋아하고, 반복해서 보고 따라 하는 동안 우리는 그 사진의 보는 방식에 물들게 된다. 자신에게 익숙한 사진을 더 쉽게 이해하고 선호하며, 심지어 익숙한 사진이 더 옳다고 판단하기까지 한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의 반성」중에서
왜 사진에서는 표절 시비가 드물까? 오히려 이 질문이 중요할 듯하다. 사진이 모두 독창적이고 창조적이라 그럴까? 나는 오히려 그 반대이기 때문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것이 아님을 모두가 알기에 표절 시비가 없는 것은 아닐까? 보통 카메라 앞의 대상을 자동으로 복사해 내는 것을 사진 매체의 기본이자 장점이라 여긴다. 여기서 사진의 복사해 내는 능력은 창조적인 일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진은 모두 독창적이지 않다고 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 사진을 만드는 과정에 사진가만의 독특한 생각과 의도가 충분히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에서 독창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솔섬 사진 표절 소동」중에서
우리는 핸드폰으로 친구들이 공유해 준 사진을 보고, 그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거나 코멘트를 달아 다시 공유한다. 여기에 플루서의 질문을 이어볼 수 있다. 그렇게 자신이 뭔가 했다는 생각이 오히려 관심을 끝내도록 유도하는 것 아닐까? 제의적인 동작이 뭔가를 했다는 착각과 자기만족을 일으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은 오히려 덜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세상을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닐까?
---「상상은 구체적이어야 한다」중에서
제한되고, 움직이지 못하는, 하나의 눈! 그 조건의 현대적 버전이 바로 카메라이다. 카메라는 한 눈으로 들여다보며 촬영한다. 그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카메라가 고정시킨 시점의 위치에서만 볼 수 있다. 사진은 프레임으로 우리의 시야를 가두고, 사진의 화질과 크기 또한 보기를 제한한다. 우리는 그 제한에 너무나 익숙해져 사진의 제약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카메라가 원근법을 기계적으로 구현하는 장치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단지 일점투시를 재현한다는 뜻이 아닐 수 있다. 시각의 제한 역시 재현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트릭아트에 사진이 필요한 이유이다. 눈치채지 못할 제한을 줌으로써 트릭아트가 그럴듯하게 보인다. 일종의 허위를 보여주는 체계라는 점에서 원근법 자체를 하나의 코드 혹은 이데올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원근법이라는 코드」중에서
누군가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이거 뭔지 알아?”라고 물으면, 사진 안에 담긴 대상의 이름을 말할 뿐 ‘○○의 사진’이라고 답하지는 않을 것이다. 매체들은 대부분 눈에 잘 띄지 않는데, 특히 사진은 사진이라는 그릇 자체가 인식되지 않도록 투명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종이 위에 인쇄되었든, 핸드폰의 액정화면에 떠 있든 사람들은 사진 속의 대상에만 집중하게 된다. 그렇게 사진이 투명해질수록 사진이라는 매체에 관해 생각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매체 자체가 코드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체에 관해 생각하기」중에서
우리는 변증법적 이미지로서의 사진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변증법적 이미지가 그 안에 어떤 모순과 운동, 과정을 담고 있는 것이라면, 변증법적 이미지로서의 사진은 곧 작가의 끊임없는 질문에서 만들어진(만들어지고 있는) 이미지일 것이다. 변증법적 이미지는 단일한 것, 억압적인 것, 굳어지는 것에 반동하기를 멈추지 않는 작가의 태도를 요구하는 듯하다.
---「변증법적 이미지로서의 사진」중에서
사진기자로 일할 때, 사진부장으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질책은 “채승우 씨는 왜 이런 사진 없나?”였다. 그날의 신문이 나오고 나서 다른 신문사의 신문과 비교하면서 남들의 사진이 더 좋다고, 왜 그런 사진을 못 찍었느냐고 질책하는 말이다. 이러한 질책은 어떤 사건 사고의 현장에서 사진기자가 모든 것을 볼 수 있다고 가정해야만 할 수 있다. 그래야만 모든 것을 설명하는, 가장 자극적인 (잘못 이해된 의미로서) ‘결정적 순간’을 찍지 못한 것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사진기자가 초월적 관찰자여야 한다는 요구인 셈이다. (…)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 개인은 초월적인 관찰자가 될 수 없다. 전쟁터이든 사고 현장이든 그 안에 속한 사람이 어떻게 전부를 볼 수 있나? 그 장소 전체를 볼 수도, 그 시간 전부를 볼 수도 없다. 이 기대치와 실제의 차이에서 문제가 생긴다.
---「초월적 관찰자의 문제」중에서
나는 우리 주변에서 사진을 설명하는 말들이 종종 불분명한 것이 불만스럽다. 지표에 대한 말들도 포함된다. 이를테면, ‘사진은 도상이기도 하고, 지표이기도 하며, 상징이기도 하다’는 말은 어떤가? 그 말을 이해할 수는 있다. 사진은 대상과 닮았으니 도상 기호기도 하고, 사회적이고 관습적인 의미를 전달하니 상징이기도 하고, 빛이 닿아서 만들어진 것이니 지표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진이 도상, 상징, 지표 모두라고 말하는 것은 지표성에 대한 통찰이 주는 장점을 놓치게 된다. 적어도 롤랑 바르트와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지표 논의에 참여하려면 사진은 지표 기호라고 분명히 정의하고 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 사진은 닮음을 보여주거나 코드를 통해 결정된 이미지에서 벗어나 보는 이가 뭔가 ‘행위’할 수 있는 지표-이미지로 나타난다.
---「사진의 지표 담론」중에서
디디-위베르만의 말은 ‘사진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해온 우리의 작업이 끝날 수 없는 것임을 시사하는 듯하다. 우리가 살펴본 여러 연구자들이 말했듯이 새로움은, 저항은, 답은 끊임없이 묻는 과정 안에서만 발견될 것이다. 장 뤽 고다르는 ‘관객으로 하여금 보게 만드는 것’이 몽타주라고 말했다. 스스로 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하며, 그렇게 바라보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몽타주, 끝없는 질문으로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