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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일의 밤 백 편의 시

: 일상을 충만하게 채우는 시의 언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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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4월 14일
쪽수, 무게, 크기 292쪽 | 310g | 125*195*20mm
ISBN13 9788958079545
ISBN10 8958079541

카드 뉴스로 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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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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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의 영원한

최승자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
내가 가진 이것 말고 다른 것. 내가 있는 여기 말고, 다른 곳. 그리고 괴로움과 외로움과 그리움. 이것을 청춘의 힘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분명히 청춘을 지나왔는데, 내 청춘은 왜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지? 이번 생에서 청춘의 목록들을 지울 수 있을까? 이곳을 벗어나 다른 곳을 꿈꾸고, 내게 있는 것들 말고 또 다른 세계가 담긴 것들이 있으리라 믿는 것, 그래서 찾아드는 세 ‘움’의 마음들은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아마도 청춘은 마음이기 때문이겠지!
--- pp.12~13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너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 성큼성큼 골목 밖으로 사라졌지. 나는 너를 붙잡고 싶었지만, 커다란 덫에 걸린 것처럼 발을 뗄 수가 없었어. 온몸이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가 없었어. 누구의 잘못인지도 이제 기억나지 않아. 다만 그때 우리가 서로의 시간을 슬픔으로만 물들이고 있었던 것, 그것만 남아있어. 어느 계절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그 순간 우리, 각자의 마음에 폭설이 몰아치고 있지 않았을까. 나는 덫에 걸린 채로 너를 기다리고 싶었어. 영원히 오지 않을 너를.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 그 기다림은 정말이었을까.
--- pp.28~29

거울
이상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 -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
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
가끔은 생각한다. 이상 시인은 내 몫의 시까지 다 써내느라 병에 걸렸던 것은 아닐까. 한 세기 이후의 후배 시인들 목소리까지 다 담아내느라 고통받았던 것은 아닐까. 이상하고 알 수 없는 신비로움에 사로잡혀 삶이 중단된 것은 아닐까. 저 거울 속의 나, 또 다른 나와 마주 보는 마음. “잘은 모르지만 외로된 사업에 골몰”하는 것이 시인의 운명일 것이다. 결국엔 혼자라는 인식, 그 끝없는 고독 속에 던져진 현대인의 운명일 것이다.
--- pp.72~73

칼로 사과를 먹다
황인숙

사과 껍질의 붉은 끈이
구불구불 길어진다.
사과즙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흘러내린다.
향긋한 사과 내음이 기어든다.
나는 깎은 사과를 접시 위에서 조각낸 다음
무심히 칼끝으로
한 조각 찍어 올려 입에 넣는다.
“그러지 마.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대.”
언니는 말했었다.
세상에는
칼로 무엇을 먹이는 사람 또한 있겠지.
(그 또한 가슴이 아프겠지)
칼로 사과를 먹으면서
언니의 말이 떠오르고
내가 칼로 무엇을 먹인 사람들이 떠오르고
아아, 그때 나,
왜 그랬을까……

나는 계속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
과일을 깎고 나서 무심코 과도로 찍어 먹기도 한다. 종종 있는 일. 무심하게 칼의 날카로움인지도 모르고 누군가의 마음을 다치게 한 적이 있다. 종종 있는 일. 인간은 무심해서, 칼이 될 때가 있다.
--- pp.9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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