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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이 국어가 되기까지

: 대화로 읽는 국어 만들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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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4월 19일
쪽수, 무게, 크기 384쪽 | 152*224*30mm
ISBN13 9791156122470
ISBN10 1156122473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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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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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회복을 위한 활동은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었던 우리말을 되살리는 일이었다. 우리말 되살리기는 우리말 교육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국어 회복을 위한 국어학계의 활동은 우리말 교육의 기반을 닦는 데로 모아졌다. 맞춤법과 표준어 등 일제의 조선어 정책 안에서 우리말의 활로를 모색하며 이루었던 성과들을 독립 국가의 어문 규범으로 재정립했고,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었던 우리말 사전 편찬 사업을 재개했다.
--- p.6

국어의 미래를 계획하는 활동은 해방 후 등장한 신세대 국어학자들의 주도로 국어 연구 및 정책의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우리말 문법 연구가 양적·질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규범문법의 틀로서 〈학교문법통일안〉(1963)을 제정했고, 합리적 국어 정책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정책의 근거가 될 국어 사용 현황에 대한 조사 방안을 구체화했다. 그리고 대학 교육에서 국어학과 국어 교육의 전공 영역을 확정하면서, 국어학 연구와 교육 그리고 국어 정책을 이끌 후속세대를 키워냈다. 해방 직후 대학에 입학한 신세대 국어학자들은 국어국문학과에서 국어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세대라는 점에서 이전 세대와 구별되었다.
--- p.7

국어학자 김민수는 신세대 국어학자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1946년에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로 근무하면서 국어학자 이희승을 도와 국어국문학과의 설립과 관련한 행정 업무를 수행했고, 곧이어 대학에 입학해 국어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했다. 1950년대에는 학풍의 혁신을 주창하며 국어국문학회와 국어학회의 창립을 주도했고, 국어국문학회를 대표하여 문교부 심의위원으로 활동하며 〈학교문법통일안〉(1963)을 제정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 p.9

저자들은 2007년 김민수 선생(1926~2018)을 모시고 해방 이후 국어 정립을 위한 학술적·정책적 활동 양상과 관련한 증언을 들었다. 이것이 국사편찬위원회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선생과의 첫 번째 대화이다. …… 두 번째 대화는 안타깝게도 고인이 되신 선생과의 ‘대화’였다. 선생의 말씀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상황에서, 고인이 남긴 증언의 의미를 설명하기도 하고 객관적 자료를 근거로 증언의 오류를 지적하기도 했다. …… 이 책은 이렇게 이루어진 두 번째 대화의 결실이다.
--- pp.11~2

한일병합 이후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식민지 언어 정책의 목표는 ‘국어 상용화’, 즉 ‘일본어를 일상적인 공용어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의 행정력은 학교 현장에서는 조선어 교육을 축소하고 일본어 교육을 강화하는 데, 사회적으로는 일본어 사용 범위를 넓히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 p.18

이 같은 상황에 조선어 학계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조선어 학계의 대응은 두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첫째, 2개 언어 병용 정책의 상황을 활용하여 한글 강습 활동과 같은 대중 사업을 진행했다. 둘째, 철자법 및 표준어 제정, 조선어사전 편찬 등 조선어 규범화 사업에 매진했다.
--- p.19

조선어 학계는 식민지 정책의 기조에 맞춰 조선어 연구를 심화하고 조선어의 보급을 확대했다. 그러나 일본어 상용화 정책을 추진하는 조선총독부와 조선어 문화를 유지하면서 발전을 모색하는 조선어 학계는 대립적일 수밖에 없었다. 대립은 일본이 전시체제를 강화하면서 노골화했다. 결국 조선총독부는 1938년 조선어를 필수가 아닌 수의 과목으로 하는 ‘3차 교육령’을 공포했고, 이후 조선총독부의 언어 정책은 강제적인 국어 상용 정책으로 전환되었다. 물론 한글 강습과 같은 대중 사업은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 p.21

열여덟 살 소년이었던 내게 가장 큰 고민은 살아남는 것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일제가 1941년에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그 전쟁을 성전, 즉 성스러운 전쟁이라고 부르면서 젊은이들을 죽음의 길로 이끄는 징용, 징병제를 실시했기 때문입니다. …… 일제는 1943년 10월에 식민지 조선에도 전쟁터에 학생을 투입하기 위한 학병제를 실시했습니다. 12월에는 징병 연령을 1년 낮추고 이른바 총동원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궁리 끝에 학교 교원이 되기로 결심하고 을지로 남쪽에 있는 조선총독부 중앙도서관(지금 소공동 롯데백화점이 있는 곳)에 매일같이 나가 ‘국민학교’ 교사, 당시는 훈도訓導라고 하는 교사 검정 시험을 독학으로 준비했습니다. …… 1944년 8월에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시행한 국민학교 교원 시험 제2종 시험을 봤습니다. 시험에서는 묘하게도 미술 과목만 합격하고 낙방했습니다. 그래서 한 단계 아래인 제3종 시험에 응시했는데 참 다행스럽게도 합격했습니다.
--- p.25

교원 자격을 획득하는 계획이 성공했으니까 그때 그 기쁨이야 어떻게 필설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으로 가는 길을 면하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자격 시험에 합격한 합격증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죽음의 길로 끌려가지 않는 건 아니었어요. 얼른 총독부의 발령을 받아서 취업해야 징용이나 징병을 유예받을 수 있었습니다. …… 1945년 6월 12일에 경기도 학무과에서 서울 마포공립국민학교 훈도로 발령한다는 통지서가 왔습니다. “야, 이제는 살았구나” 하고 그 통지서를 가지고 마포국민학교를 찾아갔습니다.
--- pp.34~5

일본제국의 식민지 정책이라는 게 애초부터 완전동화를 계획한 것으로 보여요.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우리 조선 민족을 그냥 육체만 남기고 완전히 소멸시켜버리자’라는 정책인 거지요. 오늘날 평가한다면 천인天人, 하늘과 사람이 함께 공노할 흉계이지요.
--- pp.38~9

식민지 언어 정책은 아까 언급했던 내선일체, 즉 식민지이지만 동등하다는 정책을 표방하면서 우리를 완전동화시켜 예속시키자는 민족어 말살 정책이라고 봐야 옳을 겁니다.
--- pp.42~3

선생님께서는 공업학교를 나오고 수학이나 영어, 특히 수학에 관심을 많이 갖고 계셨고, 과학기술자로서 발명하는 상상을 많이 하신 것 같은데, 그런 선생님께서 국어학을 연구하게 된 동기가 무척 궁금합니다. …… 오직 공과를 지향하겠다는 그 큰 뜻은 그대로 유지되지 못하고 시대적 환경의 영향으로 일대 방향 전환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계기가 있었지만 첫째 계기는 일제하 1943년 초겨울 어느 날 밤 제게 우리말의 소중함을 일깨운 친형 김윤수金胤洙의 외침이었습니다. 두 번째 계기는 1945년 해방된 우리 세상에 갓 출옥한 조선어학회 간사장이었던 이극로 박사의 모국어 수호를 강조한 읍소, 눈물을 흘리면서 하시던 호소였습니다. 세 번째 계기는 1946년 가을 춘천사범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면서 지식이 부족함을 알고 국어를 전공할 것을 절실히 느껴 다짐한 각오였습니다.
--- p.48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김윤수라는 국어학자를 새로 알게 되었습니다. 조선어문학을 공부할 수 있는 대학이 경성제대 하나뿐이었던 현실에서도, 식민지 젊은이들이 독학으로 우리말을 공부하면서 스스로 연구 주제를 정해 정진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그런 분들이 있었기에 해방 직후 우리말 교육을 할 수가 있었고, 대학에 국어국문학과를 설립할 수 있었고, 많은 인력이 필요한 국어사전 편찬 사업을 무리 없이 진행할 수 있었을 겁니다.
--- p.54

1945년 해방이 되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던 조선어학회 간부들이 드디어 출옥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어학회 간사장이던 고루 이극로 선생이 8월 17일에 석방되어 서울에 오셔서 20일 서울 숙명고등여학교 운동장에서 강연회가 열렸습니다. 참 묘하게도 이걸 어떻게 알게 돼서 제가 거기에 참석했습니다. 강연회에 모인 사람은 청장년 겨우 16~17명 정도였는데 거기서 고루 선생은 눈물을 흘리면서 모국어의 소중함을 호소했습니다. 참석자들은 그 자리에서 눈시울이 붉어지는 등 감격의 도가니가 되었습니다. 나도 눈물을 머금고 영원한 민족어 수호를 다짐했습니다. 그때 제 각오는 우리말을 배우고 연구하겠다는 맹세, 그것이었습니다.
--- p.56

조선어학회 국어강습회도 결국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중심으로 그걸 가르치는 방식이었습니다. 《통일안》을 강사가 음성에 관한 부분, 또 띄어쓰기에 관한 부분, 한자음 표기에 관한 부분 이런 식으로 세분해서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강의가 끝나면 받아쓰기를 해서 틀린 것을 고치게 하는 식이었습니다. 당시 국어 강사로 파견돼서도 그 방법을 그대로 모방해서 강습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조선어학회가 주장하는 《통일안》을 보급하는 행위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 p.62

조선어학회는 1921년에 조선어연구회라는 명칭으로 창립됐습니다. 그 후 1931년 1월에 이 학회가 개편되면서 고루 이극로 선생이 직접 조선어학회를 주도해서 여러 가지 사업이 시작됩니다. 조선어학회의 활동으로 이루어진 결실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말 표기의 통일입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1933년 10월에 학회 안으로 제정된 것이지요. 1941년 1월에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제정한 것도 우리말 표기 통일의 한 요소였습니다. 둘째는 언어의 통일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정査定한 조선어, 《조선어 표준말 모음》이죠. 1936년 10월에 발표됐죠. 셋째는 언어 규범의 종합입니다. 이것은 《조선어 대사전》을 1942년 10월에 편찬한 것을 가리킵니다. 이 세 가지로 민족어 확립은 일단 역사적으로 완결되었다고 평가해야 되겠습니다.
--- p.67

조선어학회 사건에 대해 듣고 조선어학회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조선어학회의 간행물이나 업적들을 살펴보게 되신 거군요. 그러면서 한글 풀어쓰기도 알게 되었고요.
--- p.74

해방 직후 조선어학회가 중심이 된 국어 정책은 크게 ‘한자 폐지, 한글 전용화’와 ‘일제 잔재를 일소하는 국어 정화’의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 p.82

‘조선어학회는 해방이 되자, 재건되어 당시 긴급한 국어 회복에 지대한 중책을 다했다’, 이렇게 평가해야 할 것 같아요. 당시 실정을 보면, 국민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각급 학교의 학생들은 한글은 물론 우리말도 거의 자유롭게 구사하지 못했던 그런 시기였기 때문에, 학회가 서둘러 전개한 국어강습회, 또 검정 시험을 통한 국어 강사 양성은 시기적으로 봐서 아주 시급한 과업이었어요. 이런 사업은 보통 기관에서는 해내기가 어려운 것인데 이것을 조선어학회에서 조기에 완수했던 거지요. 그런 점에서 ‘학회가 참 훌륭한 일을 했고, 불행 중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 p.89

규범 정책을 보면, 1930년대에 논쟁이 치열했던 한글파의 조선어학회 ‘어원 표기 맞춤법’과 정음파 혹은 박승빈파라고도 하는 조선어학연구회의 ‘표음주의 표기법’ 사이의 논의는 조선어학회의 위력에 의해 없던 일처럼 되었어요. 검토의 여지도 없이 당당해진 조선어학회의 안으로 결정되었던 거예요. 오늘날 맞춤법이 어려운데, 이것을 좀 쉽게 가공할 기회를 잃어버린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 아쉬운 일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 pp.103~4

실제 정책으로는 ‘한자 폐지, 한글 전용화’와 ‘일제 잔재 일소, 이른바 우리말 도로 찾기’, 이 두 가지가 뚜렷이 나타났어요. 그런데 한글 전용은 조선어학회가 공식적으로 천명한 사실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요. 조선어학회가 한글 전용을 천명했다는 게 증명이 안 되니까, 한글 전용 정책은 아마도 당시 편수국장이던 외솔(최현배)의 소신을 정책에 반영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추정이 돼요.
--- p.108

당시 미군정청이나 문교부에서는 정책적으로는 한글 전용을 실시는 했지만 조선어학회 내부에서도 사실은 공식적으로 한글 전용을 천명한 적도 없고 일반인들도 병용이나 이런 것들을 더 선호했으니까 정책과 현실이 괴리된 상태에서 어문 생활이 이루어졌다는 거죠?
--- p.111

한글 전용에 이어 두 번째 내세운 정책은 일제의 잔재, 이른바 일본말 남은 거를 없애는 거였습니다. …… 1948년 6월에 문교부에서 《우리말 도로 찾기》라는 책자를 냈어요. 이른바 일제 잔재를 청소한다는 목표로 문교부 편수국에서 편찬한 책인데요. 이 《우리말 도로 찾기》는 최초의 우리말 정화, 깨끗하게 하는 것, 순화안으로서 대표되는 것이고, 또 당시로서는 상당히 긴급하고 필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 p.113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해방과 동시에 석방된 조선어학회 중진들의 존재감, 그리고 일제의 탄압을 받았던 조선어학회 활동에 대한 기억은 조선어학회 주도의 국어 정책이 국수주의로 흐르는 데 기폭제가 됐어요. 대중은 이 학회의 운동에 전폭적인 존경과 공감을 표했고 활동에 대해서도 찬동하는 경향이 뚜렷했습니다.
--- p.127

결과적으로 해방 직후 조선어학회의 많은 언어 정책적 노력들은 그 절실함과 진지함, 관심과 환대 속에서도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전개되지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 해방 직후 조선어학회 활동의 의의, 장점과 문제점, 한계 부분을 나눠 함께 살펴보았다는 점에서 이 대담의 국어학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p.135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기점으로 국어 정책이 체계화되고 대학에서 국어학이 독자적인 학문 영역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정부에서는 국어 정책을 세우고, 민간에서는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한글 강습과 사전 편찬에 나서고, 대학에서는 국어국문학과를 개설하여 우리말과 글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교수했던 것이다.
--- p.139

조선어학회의 위상은 건국 후에도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학회는 남북 분열의 양상으로 전개되었어요. …… 학회 회원의 일부가 월북해서 거기서 국어 운동을 따로 펼치고, 남쪽에서는 또 남은 사람들이 학회 이름을 바꿔가면서 국어 운동을 했기 때문에 분열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결국 학회는 이사장 중심의 종신제를 만들었고 그 직책은 세습되었어요. 필요한 국어 정책의 보완을 위한 구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학회의 양상이 바뀐 것이지요. 그래서 한글 전용에 치우친 학회의 하나로 위상이 점점 바뀌어가지 않았나 생각해요.
--- pp.149~151

해방 후 국어국문학 제1세대는 사실상 교수급이었고, 그즈음에 대학에 입학한 2세대에게는 은사들이기도 했지요. 이 교수들을 국어국문학 1세대로 규정해야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1세대 앞에는 꼭 ‘해방 후’라는 말을 붙여야 정확합니다. 저는 해방 직후에 대학에 입학했으니까, 정확히는 해방 후 2세대입니다. …… 그런데 1세대와 2세대 사이에서 연도나 나이를 아주 분명하게 금 긋기는 어려워요. 서로 들락날락하는 점이 있으니까요. 그렇게 총괄해서 보면 대체로 설명하기가 좀 편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요. 그렇다면 해방 후에 국어국문학과는 1세대와 2세대가 함께 이루어 나갔다고 볼 수가 있어요.
--- pp.168~170

제1세대의 자격자는 경성제국대학 ‘조선어급조선문학과’ 출신들로 일제하에서 문학사호로 학사호를 받은 사람들이죠. 약 20명 정도였습니다.
--- p.176

경성제국대학은 경성대학으로 개교하면서 가장 일찍 대학으로서 교수진을 짜고 개강을 하게 됩니다. 경성제대 졸업생 중에서 제1회 졸업생 조윤제 교수는 국문학, 제2회 졸업생인 이희승 교수는 국어학을 전공했어요. 두 분을 주축으로 하고 국어학에서는 이숭녕, 방종현 두 교수가 함께했지요.
--- p.199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가 개설된 후 합동 연구실에 모여 연구 활동을 하기 위해 조선어문학연구회를 조직했어요. 재학생과 졸업생을 합친 하나의 연구 공동체였습니다. …… 이 조선어문학연구회라는 명칭으로 각 대학의 국어국문학전공자들이 같이 모여서 공동의 광장을 마련합니다. 7개 대학 50여 명의 학생으로 구성된 이 조직은 나중에 2세대 최초의 학문 공동체로 1952년에 창립된 국어국문학회의 모체라고 볼 수 있어요.
--- pp.205~6

1945년 광복 이후에 이어지던 국어 재건의 학문적 분위기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전환의 계기를 맞게 된다. …… 전쟁 중에 교육계와 학계는 많은 타격을 입었다. 자료가 유실되고 많은 학생과 학자들이 사망했으며 북한으로 납북되거나 월북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대혼란의 시기에도 대학은 피란지에서 다시 운영되었으며 학회의 창립과 학회지의 발간 등 학술 활동은 계속 이어졌다.
--- pp.220~21

전쟁 이전의 조선어문학연구회에서 이어진 국어국문학회는 해방 이후 등장한 학문 2세대가 스스로 구축한 학문 공동체였다. 이들의 학문적 태도는 1세대의 민족적 어문 연구 분위기와 구별되었다. …… 1세대와 달리 대학이 설립되고 높은 학구열로 국어학을 배우기 시작한 2세대는 역량을 축적하자 기존의 민족주의적 연구 관점과 거리를 두고 새로운 과학적인 방법론의 도입을 추구했다. 이러한 학문적 경향을 공유할 수 있는 학술지와 학회를 갖게 된 2세대는 대학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 점차 학계를 주도할 수 있었다. 이후 한글 간소화 파동 등 국어 정책의 실패에 대응하면서 국어학계의 정책적 영향력을 강화했고, 이와 더불어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태도에 입각한 연구가 잇따라 나오면서 학문 재건의 바탕을 형성했다.
--- p.222

부산에서 창립된 국어국문학회는 해방 후 제2세대가 만든 독자적인 최초의 학회입니다. 피란지였지만 직장과 거처가 마련되어 임시라도 좌정하게 된 것은 다행이었습니다. 맨손으로 수업하고 강의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이왕 밟아온 전공을 어떻게 진전시킬 것이냐 하는 일념을 저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1952년 9월 제2학기가 시작되자 급하다고 느낀 것은 전공에 관한 어떤 구상을 발표하고 논의할 방법이 없는 문제였습니다. 이런 생각은 만나는 사람마다 거의 같아서 발표 기관으로 동인지, 《국어국문학》을 창간하기로 하고 우선 모여보기로 했습니다. …… 그리고 드디어 11월 3일에 동인지 제1호가 인쇄되어 나왔습니다.
--- pp.242~47

1950년대부터 국어 연구, 국어 교육, 국어 정책의 중심은 대학으로 이동했다. …… 이 시기에 사회적으로 가장 주목을 받은 의견 충돌은 이른바 ‘한글 간소화 파동’이다. 이 한글 간소화 파동은 근대 초부터 지속되었던 형태주의 표기와 표음주의 표기 간 충돌의 연장선으로 볼 수도 있지만, 조선어학회 한글 맞춤법에 익숙한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 간의 문화적 차이에 따른 충돌의 성격도 있었다.
--- pp.266~68

한글 간소화 파동 이후 당시의 젊은 국어학자 사이에는 국어 정책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를 수용하고 이를 객관적 조사와 연구를 통해 검토하는 공적 기관을 설립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커졌다. 이에 따라 어문 정책 연구를 전담하는 공적 연구 기관, 즉 국어연구소의 설립을 추진하기에 이르렀지만, 1950년대의 상황에서 이러한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문 정책 연구를 전담하는 공적 연구 기관인 국어연구소는 1984년에 이르러서야 설립되었고, 그 국어연구소가 현재의 국립국어원이 되었다.
--- p.269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한글날 기념식 담화부터 철자법을 바꾸라고 요청했습니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나 기자회견을 보면 당시 맞춤법에 대해 ‘불편하다’와 ‘어렵다’, ‘보기 좋지 않다’는 표현이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그리고 1953년 4월 27일에 당시 백두진 국무총리가 훈령 제8호로 “우리 한글은 철자법이 복잡 불편하니, 교과서, 타이프라이터에 대하여는 준비상 관계로 다소 지연되더라도, 정부용 문서에 관하여는 즉시 간이한 구 철자법을 사용하도록 함이 가하다”고 했고, 이후 1953년 5월 9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가 한글 간소화 반대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 p.280

한글 맞춤법을 둘러싼 이 투쟁은 일제의 조선어학회 사건 조작으로 투옥된 조선어학회의 중진들이 해방 후 출옥해 나오면서, 맞춤법 문제는 한글파의 판정승으로 끝났습니다. 즉 정음파는 쑥 들어가고, 한글파가 판정으로 이겼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해방과 함께 아무 저항도 없이 국어 규범으로 굳어졌는데, 이번에 대통령의 권력에 의한 도전을 다시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 p.286

한글 간소화 파동 와중에 급속히 활동이 활발해진 것은 해당 학계였습니다. 국어국문학회는 선두에 서서 반대 성명을 냈고, 각 대학 해당 교수들이 단합하여 교수단 명의로 반대했으며, 한글학회도 나서서 반대했습니다.
--- pp.286~87

6·25사변으로 중단된 한글학회 《큰사전》 전 6권의 완간은 일제하 민족 운동의 한 징표이기 때문에 거족적 기대 속에 소생하기 시작해서 드디어 결실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큰사전》 완간 10년은 짧지도 않고 우리 민족 수난사처럼 험로를 걸어왔습니다. ‘사전 여섯 권 간행하는 데 10년이 걸렸다’ 그러면 ‘참으로 기구한 생애였다’라고 해야 하겠지요. 1942년 10월 일본 경찰의 원고 압수뿐만 아니라 해방 후 사전 편찬을 재개한 후에도 고난이 연속되었습니다. 이 사전 제1권이 출판되자 문화계의 환영은 대단했습니다.
--- pp.297~98

《큰사전》 완간의 가치는 최초로 규범 국어사전이 공표된 점에 있다고 봐야 정확한 판단일 것입니다. 국어 규범의 기준으로서, 국어 세부의 개개 규범이 확정된 것입니다.
--- p.312

일본과 우리말 학계와의 첫 접촉은 1962년 10월, 임의단체인 국어국문학회 대표이사 명의의 초청장이 용케 인정돼서 덴리대 조선학과 교수가 내한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방일해 많은 학자들을 만나게 되었고요. 단순한 접촉이지만, 유학생 교환, 평가 높은 한일사전 완성으로 전개하는 등 교류의 결실을 맺어갔었지요.
--- p.317

〈학교문법통일안〉의 내용은 명사식을 주축으로 한 252개 문법 용어와 명사, 대명사, 수사, 동사, 형용사, 관형사, 부사, 감탄사, 조사 9품사만을 강제하는 것이었어요. 부실하기 짝이 없는 통일 학교문법이었던 거지요.
--- p.324

국어사전을 편찬하고 규범문법의 틀인 〈학교문법통일안〉을 수립함으로써 국어 정립이라는 근대적 과제는 완결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대화는 국어 정립이라는 근대적 과제를 완결하기까지, 즉 국어사전이 완성되고 통일적인 규범문법 서술의 틀이 마련된 1960년대 중반까지 국어 정책과 국어학 분야에서 이루어진 활동을 되짚어본 것입니다.
그 이후 국어 정책은 국어 사용의 현황을 조사하고 관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고, 국어학은 국어의 정립이라는 근대적 과제에서 벗어나 언어 분석 이론을 바탕으로 국어 현상을 설명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 p.327

지금 국어 정책에 관련되는 문제도 그렇고, 맞춤법 문제와 표준어 문제는 남북 통일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이데올로기나 느낌이나 감상을 떠나 장기적으로 검토해서 계획을 세워야 됩니다. 가령 맞춤법은 반드시 합리적으로, 사용하기 쉽게 조정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또 표준어는 북측과 관련해서 역시 서로가 무리가 없는 수정이 필요합니다.
--- p.333

국어학자 김민수 선생과의 대화는 ‘해방 이후 국어 정립을 위한 학술적·정책적 활동’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제자들이 묻고 스승이 답했던 2007년 여름의 대화는 2022년 여름에 이르러 근현대 국어학사와 국어 정책사가 되었다.
--- p.343

1926년에 출생한 선생은 엄혹했던 일제강점기에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을 구독하던 친형 김윤수의 영향을 받으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공과대 진학을 꿈꾸었던 19세 청년은 1945년 해방 직후 열린 조선어학회 간사장 이극로의 강연에 감명을 받고 우리말 연구에 일생을 걸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1945년 조선어학회 국어강습원 파견 강사 선발 시험에 응해 합격한 후 한글 보급 운동에 참여하였다.
--- p.346

우리말 글과 관련한 많은 것들이 선생이 이룬 학문적 성과와 실천에 기대어 시작되었고 존속되고 있다. 우리말 공동체가 지속되는 한, 남북 언어 통합을 위한 연구와 실천은 지속되어야 하고, 재외동포와 세계인을 위한 우리말 보급은 더 확대되어야 하고, 우리말 사전은 더 풍부하고 정교해져야 하고, 우리말의 원리와 작용은 더 정확히 규명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선생의 삶을 기억해야 할 이유다.
--- p.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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