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무게와 질량이 각기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염분이 한창 진할 때가 있고, 또 그것이 맑아질 때가 있는 것이다. 정돈하지 못한 감정을 응축하여 쏟아 낸 나의 눈물은 바닷물처럼 짰고, 몇 번을 걸러 낸 엄마의 눈물은 담수처럼 맑았을 테다.
--- p.22
영화는 처절했다. 영상미 때문인가? 양조위의 연기 탓인가? 이제 다시 볼 수 없는 장국영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사랑이란 원래 처절한 얼굴을 숨기고 오는 것일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G와 나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하나둘씩 사람들이 극장을 빠져나갈 때도 서로를 마주 볼 수 없어서, 상영관의 조명이 환하게 켜질 때까지 앞만 보며 버텼다. 한참을 침묵하던 G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사는 것이 저렇게 힘든 것일까 두렵다고 말했다. 나는 G의 씁쓸한 시선을 외면하며 장국영이 연기를 잘해서, 양조위의 눈빛이 탁월해서, 왕가위가 천재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대답했다. 저런 사랑도, 삶도, 사실은 모조리 과장된 것이라고. 이건 그저 영화니까.
G가 되물었다.
어쩌면 그것이 진짜 비극인 것이 아닌가, 라고.
그가 옳았다. 우리들의 사랑이 영화처럼 치열하지 못했던 것은 그와 헤어지고 난 후 우리에게 남은 단 하나의 비극이었다.
--- p.34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것들을 쓰고 싶다. 그 애가 모두가 기억해야만 하는 것들을 쓰고 싶어 했던 것처럼. 발바닥 밑에 붙은 하찮은 것들, 광원의 반대편에 선 것들, 로자를 품은 그 애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 p.47
언제 멈출지 모를 고물차에 의지하며 까닭 없이 지중해에 집착했던 것은 모험심이 아닌 오기였을 것이다. 진땀을 흘리며 달렸던 마쓰다와 우리들에게, 그날의 바다는 그저 온화하기만 한 에메랄드빛 희망은 아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쨌든 길 위에 있는 한, 우리는 불안을 뒷자리에 태우고 달려야 했다.
--- p.76
실제로 존재했거나, 존재하고 있으나 절대 내 것이 될 수 없는 무언가는 무서운 판타지가 된다. 여행객들에게도 파리지앵들에게도 파리의 낭만은 형체가 분명하지 않다. 사르트르가 즐겨 찾았다는 전설의 카페 드 플로르는 분명 거기 있으나 더는 그때 그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파리를 그토록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일까?
--- p.86
이것은 희극인가? 비극인가?” 내가 물었다.
“인생이 희극도 됐다가 비극도 됐다가 하는 거지 뭐.” 세르지오가 대답했다.
그런데 세르지오의 말에 의하면 희극을 연기할 때는 비극처럼 진지하고 처절하게, 비극을 연기할 때는 희극처럼 가볍게 해야 한다더라. 우리는 술 한 잔에 얼마나 가벼워졌던가? 얼마나 많이 웃었던가?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비극을 연기하고 있는 것인가?
--- p.103
나는 여전히 서러운 어떤 것을 쓰고 싶지 않으나 사라진 보라색 스웨터가 자꾸만 눈에 밟혀 글자가 되어 가고 있다. 아무도 읽어 주지 않을까 봐 겁이 나지만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고 사라지는 것들에 마음이 쓰인다.
--- p.116
차가 포도밭 너머 저편까지 달리는 동안, 언젠가 갱년기라는 게 찾아오면 그때 가야 할 곳을 남겨 둬야겠다고 다짐했다. 한 번도 가지 않은 미지의 도시를 품고 갱년기를 맞이하고 싶다. 아니, 지금은 먼 갱년기에 대한 걱정보다 어떤 와인을 마셔야 할지에 집중하는 편이 낫겠다. 여행답게 미지의 맛을 품은 와인은 어떨까? 단 값이 비싸서는 안 된다. 여기서 삶과 소설은 각자의 방향을 찾아 간다. 열매를 내주고 시들어 가는 이 부르고뉴 포도밭에서 얇은 지갑을 한탄하며, 낯선 땅에게 길을 묻는다.
--- p.185
그 애의 청아한 음색이 창틈으로 조금씩 새어 나가는 온기처럼 빠져나간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목소리도, 공기도 잡을 수 없다는 것이. 새어 나가는 어떤 것들을 가만히 두고 봐야 한다는 것은. 그것은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우리 곁을 빠져나간다. 인간은 언제까지 이렇게 무기력해야 하는 것인지! 자꾸만 뒤로 물러나는 이 시간을 손바닥에 힘을 빼고 지켜본다.
--- p.196
정말 내 삶은 괜찮아질 것인가. 여름 내내, 해변의 도시에서 파스타를 씹고 또 씹으며 수십 번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싱거운 그 요리는 참 다양한 맛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씹을수록 괜찮다고 생각했다. 꽤 괜찮은 맛이었다. 다만, 두 번 다시 찾을 수 없는 맛인 줄 모르고 너무 빨리 삼켜 버린 것이 이제 와 조금 후회된다.
--- p.207
처음부터 초라한 삶을 예상했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제는 무력한 두 다리를 받아들이기 위해 진흙을 감고 걷는다. 돌아봐야 원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걸음을 뗀다. 내게 지금 중요한 것은 얼마만큼 나아간 것이 아니라, 걷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이다.
--- p.221
극작가, 와즈다 무아와드는 내가 이야기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이야기를 알아보기 전에, 이야기가 먼저 나를 알아보는 것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을 잘 맞이하는 것뿐이라고. 어쩌면 내게도 그런 이야기가 온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느껴지는 이 작은 온기가 누군가에게 받은 촛불인 것만 같다. 이야기 안에 담긴 달과 흙과 별처럼 고유한 사람들을, 그들의 삶을 나의 조급함과 무심함, 무지와 어리숙함으로 꺼트리고 싶지 않다. 사라지는 것들과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들을, 누군가의 과거와 미래를 여기, 지금의 이야기로 환원하여 불을 붙이고 싶다.
--- p.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