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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함 더하기 사이코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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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5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357쪽 | 128*188*30mm
ISBN13 9791191853346
ISBN10 1191853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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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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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떨어진 하얀 이면지 위로 남자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시야로 단단하고 강인한 느낌의 구두코가 들어섰다. 휘가 흩어진 이면지를 발로 툭 찼다.
“이게… 유이 씨가 할 일이에요?”
“가는 길에 부탁을 받아서….”
“이면지 버려 주는 일이?”
남자가 혼내는 것처럼 들렸다. 남자의 말투가 그전과는 너무 다르게 차가워서 유이는 혼란스러웠다.
“자기 일도 아닌데 왜 나서는 거예요?”
당황하여 할 말을 찾지 못한 유이는 다음 나온 남자의 말에 몸이 석고상처럼 굳었다.
“왜 그렇게 순진하게 살아요, 기분 나쁘게.”
유이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대로 멈췄다. 눈물이 차올랐다. 곧 남자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 pp.79~80

‘내가 왜 여기 있는 걸까?’
마주 앉은 소파에 루오휘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허 비서의 호출에 유이는 다시 옆집 남자, 아니 루오휘 사장님의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상황이다. 설마 계약을 파기하고 나가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제발 그것만은 아니길!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았는데 이 엄동설한에 잘 곳도 없다. 사장님에게 실수한 게 뭐였는지 곰곰이 따져보았다. 역시 엘리베이터에서 너무 잘난 척을 했던 걸까. 그런데 루오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이유이 씨가 마음에 듭니다.”
--- p.105

“네가 그런 거야? 네가 그런 거냐고!”
엄마는 휘의 양팔에 손톱자국이 박히도록 세게 쥐고 소리를 질러 댔다. 흥분한 엄마와는 달리 휘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야, 엄마.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난 아기한테 손도 대지 않았어.”
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아기가 날 따라 했을 뿐, 손을 대지는 않았으니까.
“엄마한테 거짓말하면 안 돼.”
“난 거짓말한 적 없어.”
왠지 모르게 휘는 엄마의 눈을 피하고 말았다. 그때 엄마의 눈빛은, 절박하게 애원하는 것이었다. 휘는 그 모습이 정말 참기가 힘들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래 이럴 때는 수민이 말대로 웃어야지. 휘는 입꼬리를 올렸다. 엄마를 안심시키려고 환하게 웃었다. 옆에서는 연우의 비명소리 비슷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참 시끄럽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휘의 웃는 얼굴을 본 엄마의 표정은 하얗게 질렸다. 엄마는 휘의 어깨를 잡았던 손을 놓아 버렸다. 휘가 다가가면 엄마는 뒷걸음쳤다. 무서운 괴물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었다. 휘는 입꼬리를 풀었다. 뭔가 잘못됐다. 그런데 뭐가 잘못된 거지? 그 일이 있고 난 뒤, 휘는 버려졌다.
--- pp.148~149

“내가 느끼는 감정은 유이가 느끼는 그것과 다를 겁니다. 사이코패스… 들어 본 적 있어요?”
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적 인격 장애. 흔한 말로 사이코패스.
“나는 11살 때 사이코패스 판정을 받았어요. 나는 사람이 죽는 걸 봐도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감정이 없는 사람이에요. 사람의 감정을 느끼는 데 어려움이 있어요. 태어나서 한 번도 불쌍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유이 씨가 처음이에요. 내가 남을 측은하게 여긴 건. 이상한 기분이었어요. 나로서는… 그렇게밖에 표현이 안 됩니다. 유이 씨가 부당한 일을 당하고 유이 씨가 아프면 나도 아팠어요. 미안해요. 나는 그걸 기분이 나쁘다는 말로밖에 표현이 안 됐어요.”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렸다. 유이는 남자의 고백이 안타까우면서도 그를 전부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불쌍함을 느낀 건 유이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유이가 아프면 그도 아프다고 말한다.
--- pp.168~169

서준우는 아직도 허 비서에게 가격당한 배를 움켜쥐었다. 정말 있는 힘껏 때린 모양이었다. 계획을 앞당겨야겠다. 박 경감뿐 아니라 허 비서도 문제였다.
난 빨리 보고 싶어. 사랑하는 사람의 일그러지는 얼굴을.
그래, 휘. 난 네 고통이 좋아. 네가 아파할수록 떠오르는 확신이 있어. 네가 고통스러울수록 내가 널 정말 사랑한다는 걸 알게 돼.
휘, 내가 깨운 악마는 잘 있니? 넌 아니라고 하지만 한 번 깨운 악마는 다시 잠들지 못해.
아직 모르겠다고? 기다려. 내가 확인시켜 줄게.
--- pp.271~272

휘는 이제야 모든 게 선명해졌다. 서준우의 목표는 유이가 아니라 본인이었고, 나를 자극하기 위해 유이를 끊임없이 이용했다는 걸. 휘는 헛웃음이 나와 허허 웃어 버렸다.
“그래, 어쩐지 이상했어. 네가 유이를 바라보는 눈길은 호기심을 넘어 먹잇감을 바라보는 눈이었거든.”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네가 유이를 바라보는 눈길도 나와 마찬가지였어. 휘, 내가 하나 가르쳐 줄까? 네가 왜 유이에게만 감정을 느끼는지 알아? 사랑? 아니야.”
서준우는 칼끝을 휘의 눈동자 가까이 가져갔다.
“그건 처음 놓친 사냥감에 대한 아쉬움이야. 유이의 하얀 목덜미를 보며 꺾어 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너만 보는 곳에 가둬 놓고 정신도 몸도 피폐해질 때까지 말라비틀어지게 하고 싶은 적이 없었어?”
서준우의 말에 휘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야, 넘어가면 안 돼. 이런 새끼 혓바닥에 놀아나면 안 돼.
--- pp.311~312

유이와 만난 시간은 내 인생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어요. 유이를 만날 때마다 가슴 떨리지 않은 적이 없었고, 순간순간 축복이 아닌 시간이 없었어요. 제가 유이를 통해 얼마나 놀라운 경험을 했는지 아나요? 나는 당신을 만나고 숨 쉬는 순간마다 새로운 기분을 느꼈어요. 내가 온전히 한 인간을 이해한다는 신비로움을 유이를 통해 알게 되었어요. 당신이 눈물을 흘리면 가슴이 아렸고, 부당한 일을 당하면 내가 더 화가 났어요. 당신이 힘들고 슬퍼지면 내가 더 아팠어요. 어머니에게 버려진 이후로 줄곧 외면했던 감정을 유이를 통해 마주할 수 있었지요.
--- pp.325~326

사랑이란 나를 승인하고, 상대를 승인하며, 상대방의 눈동자 속에 있는 나를 승인하는 것. - 헤겔
익숙한 글씨체. 그 글씨들을 손으로 훑었다. 유이는 그 글씨 바로 밑에 ‘순례길 마지막까지 무사히 마치길’이라고 썼다. 짐을 풀자마자 말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피로 물든 양말을 벗어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깜빡 잠이 들었다.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에 눈을 떴다. 유이의 발은 깨끗이 씻겨 있었고 반창고까지 꼼꼼하게 감겨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휘가 있었다.
“휘!”
“응.”
왜 그런지 휘가 옆에 있을 거라고 당연히 생각했다. 휘가 이 방에 있는 게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유이는 그대로 일어나 휘의 목을 감싸 안았다. 휘를 껴안고 느꼈다. 다른 건 필요 없다. 휘만 내 옆에 있어 주면 된다. 섭섭함도 괴로움도 휘를 품에 안기니 사르르 사라졌다. 바라는 건 하나였다. 휘와 함께 있는 것. 그것뿐이었다.
---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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