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이는 9살에 교방에 입학했는데, 앞으로 7~8년 동안 가무를 익혀야 했다. 교방에서 숙식을 하며 행수기녀로부터 생활에 대한 모든 것을 익혀 나갔다. 최순이를 지도하는 기녀는 30세가 넘은 ‘행수기생’이었다. 행수기생은 어린 동기로부터 시작하여 진주 교방의 춤과 노래를 모두 익힌 실력 있는 관기였다. 동기들의 숙소는 한방에서 2~3명씩 배정되었다.
--- p.31 「조선의 종합 예술 교육 기관, 교방」중에서
진주에서 단 한 명만 뽑는 선상기 시험에 최순이는 동기보다 우수한 성적을 받고 발탁되었다. 드디어 선상기로 진주를 떠나 한양으로 가는 날이다. 그녀의 나이는 고작 열세 살이었다. 교방의 동기들은 부러움 반 걱정 반의 얼굴로 최순이를 마중했다. 무엇보다 최순이의 어머니는 흐르는 눈물을 꾹꾹 참아가며 의연하게 딸을 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우려와 다르게 최순이는 다짐하고 있었다.
--- p.56 「최순이 궁으로 들어가다」중에서
궁궐 안의 각 처소는 나인들과 궁녀들이 거처하는 곳이 정해져 있었고, 지방에서 올라온 선상기들을 모두 수용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궁 밖의 장악원과 가까운 곳에 최순이의 임시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흔히들 지방에서 올라온 선상기들을 위한 사가(私家)를 궁중에서 제공해 준 것이다. 그녀 나이 열세 살에 홀로 살집을 궁 밖에 얻은 셈이다. 일종의 하숙집이었던 셈이다. 선상기가 임시로 묵는 집에서는 5~6명의 기녀들이 잠을 잘 수 있는 방과 간단한 식사도 준비해 주어야만 했다. 따라서 몇 개월 분의 땔감과 쌀 등의 식품을 궁에서 받아 생활했다. 이 사가에서는 선상기들에게 숙식을 제공하였으며, 잡일을 도와줄 사람도 제공받았다. 최순이는 장악원 근처 민가에서 장악원으로 출퇴근했다. 직장인이나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오전에 나가 연습을 마치면 오후 5시가 되어야 숙소로 돌아오는 생활이 이어졌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최순이는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새로운 춤과 노래를 익히는 데에만 집중했다.
--- p.58 「최순이 궁으로 들어가다」중에서
장악원의 선상기에 대한 배려는 그 당시 여성에 대한 대우를 생각하면 파격적이었다. 1504년 장악원 제조 이계동, 임숭재는 지방의 기녀가 서울에 상경했을 때 처우 개선에 대해 왕에게 청했다. 그 내용은 밖의 사가에 임시거처를 마련한 기녀를 위해 집주인은 잡일을 도울 수 있는 인력을 보충해 달라는 것이었다. 선상기는 가무를 익히기 위해 장악원으로 출근했다. 온종일 가무를 익히는 데 시간을 보내므로 의녀에 준하는 급료도 받았다. 기녀의 의복은 정해진 숫자가 있는데, 만일 비가 와 길이 진흙탕이 되면 의복이 상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불편함을 위해 선상기들은 말을 타고 다닐 수 있도록 했다.15 이는 지방에서 올라온 선상기들에게 가무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한 처사이다.
--- p.65 「순이 궁으로 들어가다」중에서
드디어 1902년 11월 8일, 덕수궁의 관명전에서 진연이 열리기 두 달 전부터 선생님들은 피나는 연습을 시켰다. 선생님께서는 정전(正殿)에서의 개개인의 위치 확인, 등·퇴장 방법 등을 예습시켰으며, 악사들에게도 연주 위치와 더불어 진행 사항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아침부터 일어나 머리 손질과 얼굴 단장은 끝낸 상태이다. 의상을 갈아입는 시간이 꽤 소요되었다. 남치마 위에 붉은색의 덧치마인 홍초상을 겹쳐 입었다. 그리고 겉에는 노란색 몽두리를 입고 가슴에는 붉은 전대를 맸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머리 위에 쓴 가채의 무게가 목을 짓눌렀지만 무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 p.86 「고종의 앞에 선 최순이」중에서
대한제국 궁중에 소속된 관기들이 서서히 사회로 빠져나갔다. 궁중에 소속된 남자 무동들은 외부와 관계를 끊고 대궐 밖에서는 일체 연희 활동을 하지 못한 데 반하여, 여령은 궁내에서의 행사를 치른 후에는 자유로이 생활할 수 있었고 외부에서의 가무 활동도 허용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 영역은 제한된 것으로 일부 특수계층을 위해서만 춤추고 노래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궁중의 여령은 궁중에 예속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민간사회의 활동이 일부 허용되었다.
--- p.98 「최순이, 궁에 남기로 하다」중에서
그러나 최순이는 요리점에 가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 최순이는 오로지 왕을 축원하고 나라의 태평성대를 바라는 마음으로 모든 정성을 다하여 춤추는 것이 자신의 소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리점의 방중 공간은 여유롭게 춤을 출 수 있는 공간도 아니었다. 음악도, 공간도, 왕도 없는 공간에서 춤 추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모든 의식을 생략하고 한상차림으로 내어놓은 교자상 옆에서 춤을 추는 자신을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요릿집에서 춤 춘다는 것은 당시 최순이의 생각으로는 모든 정신과 육체가 일체가 되어 추는 예술적 행위가 아니었다.
--- p.100 「최순이, 궁에 남기로 하다」중에서
천민이라는 신분의 허울만 사라졌을 뿐 인습적으로 남아 있는 더 혹독한 사회적 냉대와 차별은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이었다. 관아에 노역하고 있을 때는 기본적인 생계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나라에서 더 이상 관기를 양성하지 않는다고 한다. 기생들은 모의당에 모여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끝도 없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별 뾰족한 수는 없었다.
--- p.116 「교방의 해체, 낙향」중에서
진주에 돌아온 최순이는 동기 기생들이 요리점에 나가 경제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중에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 기생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최순이는 왕 앞에서 춤을 추던 선상기로서의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왕과 나라가 사라졌지만 그것을 대신할 만한 ‘가치’와 ‘정체성’을 찾는 것이 필요했다. 바로 후학들에게 춤과 노래를 가르치는 ‘교육’을 선택했다. 자신이 교방과 궁중에서 배웠던 격식을 갖춘 조선의 가무를 제대로 가르치고 싶었다.
--- p.139 「예기조합, 스승의 길로」중에서
기생들은 경제활동에 거침이 없었으며 자주적이며 진취적이었다. 최순이는 권번에서 학생 기생들을 가르치는 스승으로서 기생들이 더 나은 처우를 받을 수 있도록 앞장섰다. 그녀는 학생 기생들이 권번에서 학습할 때 내는 수업료를 삭감시켜 달라고 요청했으며, 비 오는 날 출근하지 않도록 하는 것 등 매우 구체적이고도 상식적인 권리를 주장했다. 때는 1900년대 초반이다. 다른 여성들은 노동은커녕 집안일을 하며,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시기다. 그러나 그녀들은 노동자로서 경제활동을 하며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신여성이었다.
--- p.146 「나의 권리를 주장한 근대 신여성의 탄생, 권번 기생」중에서
기생들은 구체적인 세 가지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맹파업까지 하기에 이른다. 이에 경영자 측은 기생 일동을 불러 놓고 협상을 한다. 경영자 측은 기생들의 요구 조건 중 비 오는 날에 한하여 출석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것은 들어주나 나머지 요구 조건인 권번의 수지 예산을 일반기생에게 보고하여 줄 것과 학생 기생들의 월사금을 감하여 줄 것에 대한 요구는 들어주지 않았다.
--- p.150 「나의 권리를 주장한 근대 신여성의 탄생, 권번 기생」중에서
최순이는 ‘예술가의 길’을 택했다. 그중에서도 ‘검무’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이 춤만은 꼭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느낄 수 있는 문화로 후대에 전승시키고자 했다. 한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한 ‘신념’을 남들에게도 알리고 공감을 일으킨다는 것은 더더구나 험난한 길이었다. ‘춤’은 ‘기생들이나 추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최순이가 궁중에서 추던 춤은 오로지 왕을 위한 춤이었다. 권번의 제자들은 왕을 위한 춤을 출 수 없었다. 일반대중들이 누구나가 즐기고 공감하는 춤으로 전환하여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왕을 위한 춤이 아닌 일반 사람들을 위한 춤으로 인식을 바꾸는 데 노력하기로 했다.
--- p.168 「기생, 예인의 길로」중에서
광복 이전부터 전쟁과 경제공황으로 권번이나 요리점에 사람들의 출입이 줄어들고 있었다. 가무를 제대로 하는 기생들이 자취를 감추게 되자 자격을 갖추지 않은 여성을 고용하여 술집에서는 영업을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여성을 ‘접대부’, ‘작부’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언론과 대중은 술집의 접대부가 곧 기생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등식을 만들었다.
--- p.179 「구시대의 유물이 된 기생」중에서
1958년 당시 신문 기사에 자신의 이야기를 실은 김봉랑은 참 용기있는 기생이다. 모두들 자신은 기생 출신이 아니라고 하는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춤과 노래, 악기를 권번을 통해 학습했기에 함흥, 전주 등에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진주에 다시 내려와 요정을 차려 운영했다. 가야금을 연주하고 단가를 부를 수 있는 것은 과거 권번 출신 기생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김봉랑이 운영한 요정이 진주 마지막 기생이 운영한 요정이 아닐까?
--- p.187 「구시대의 유물이 된 기생」중에서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여 온 나라에 공습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최순이가 살던 진주도 예외는 없었다. 폭격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으로 인한 공포와 생에 대한 의지가 교차되고 있었다. (...) 설상가상으로 권번 자리마저 없어지고 말았다. 일제강점기 견습 기생만 백여 명을 유지했던 진주 권번은 전쟁으로 불에 타서 폐허가 되었다. 당시 권번뿐만 아니라 진주성과 진주 시가지 대부분이 폭격을 맞았다. 권번에 적을 두었던 기생들은 광복 이후 진주시 옥봉동에 몰려들어 주거지를 이루었다. 생계가 막막한 기생들은 옥봉동에 거주하며 개인적으로 강습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권번이 사라졌는데도, 여전히 일반인들은 기생이 가르치고 있는 개인 교습소를 ‘권번’이라고 불렀다. 진주는 그만큼 권번의 기생이 차지했던 비중이 컸다.
--- p.194 「대중의 곁으로 나아간 궁중예술」중에서
사람들은 최순이에게 ‘기생’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최순이는 임금님 앞에서 춤을 추었던 화려하고 찬란했던 경험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몇 번의 경험은 마치 묘약과도 같아서 사람들의 냉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술의 길’을 향해 꿋꿋하게 걸어갈 수 있게 했다. 사랑의 묘약처럼 자신의 영혼이 점점 빠져들어 그 속에서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일상의 시간에서 비일상의 시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춤의 시간이었다. 최순이는 일반 대중들도 다 함께 느낄 수 있는 그런 춤을 전달하고 싶었다.
--- p.198 「대중의 곁으로 나아간 궁중예술」중에서
내 제자들에게 궁에서 춤을 출 때 경험했던 그 악사들의 반주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최순이는 한달음에 시청으로 달려갔다. “내 제자들이 개천예술제에서 검무 공연을 하기 전에 국립국악원 악단의 연주에 연습을 맞추어 볼 수 있는 자리를 부탁드립니다.” 누구에게도 머리 숙여 부탁해 본 적이 없던 최순이는 머리가 땅에 닿도록 청을 했다. 제자들에게 궁중 악사의 반주 없이 춤을 가르친 것이 항상 마음에 걸리던 최순이였다. “이것은 진짜 검무 공연이 아니다.” 최순이는 생각하고 또 생각해왔다. 최순이는 궁중에서의 춤을 그대로 전승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 p.203 「국립국악원 단원과의 운명적 만남」중에서
최순이의 유품이었던 한복 몇 벌과 생활용품들은 누구 하나 챙길 여력이 없던 시절이었다. 공연을 할 때 곱게 단장을 하고 찍은 사진 몇 장이 작은 서랍장 안에 있었지만 아무도 챙긴 사람이 없어 후세에 최순이 얼굴을 증명해줄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렇게 최순이는 진주검무를 위한 최초의 씨앗이 되고 갔다.
--- p.231 「진주검무의 씨앗이 되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