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기에 들어서 ‘민국’이념의 명실상부한 실현이 절실해짐에 따라 ‘민국’이라는 말은 대중의 일상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민국’은 이제 일부 능동적 백성과 위정자의 술어를 넘어 대한제국기에 창간된 여러 일간신문에서도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어휘가 된다. ‘민국’은 가령 『독립신문』에서 1896년 4월 이래 3년 8개월 동안 총 63회 사용되고, 1898년 3월 이래 1년 2개월간 발간된 한국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에서는 34회 사용되고, 『황성신문』에서는 1898년 9월 이래 12년간 총 395회, 『대한매일신보』에서는 1904년 7월 이래 6년간 240회가 사용되었다. (…) 그밖에 박영효의 「건백서」(12회), 황현의 『매천야록』(4회), 이기의 『해학유서』(3회), 김윤식의 『음청사』(20회), 정교의 『대한계년사』(10회), 동학농민혁명자료총서 및 『동학란기록』(도합 42회), 박주대의 『나암수록羅巖隨錄』(13회), 송근수의 『용호한록龍湖閒錄』(38회), 이승희의 『한계유고韓溪遺稿』(43회) 등 고종시대 각종 서책에서 사용된 ‘민국’의 용례는 일일이 추적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대한제국기에 ‘민국’은 관민공용어官民共用語로 정착한 것이다. 독립협회의 1898년 11월 관민공동회 결의문에서 2회 사용된 ‘민국’은 이를 직접 입증한다.
이와 같이 역적들과 동학교도,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회원들, 그리고 언론과 신문독자, 일반 잡지와 협회보, 심지어 양민과 도적들까지 이렇게 ‘민국’이라는 단어를 주고받을 정도이니 조선 후기에 ‘민국’이라는 말이 얼마나 대중화되었는지를 짐작할 만하다. 이로써 조선 초반 ‘사대부의 나라’, 즉 ‘양반국가’였던 ‘조선왕국(군국)’은 임금을 표준삼아 또는 임금을 보호막삼아 자유평등한 참정을 추구하는 ‘백성의 나라’인 ‘조선민국’, 즉 ‘적극적’ 민본주의에 따라 국민이 ‘자치·자안’하는 ‘조선 국민국가’로 발전하는 중에 있었다. 따라서 혹자가 1919년 임시정부 대한민국을 “한국사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민국”으로 여긴다면, 이는 심히 그릇된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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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중국을 통해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 이후 ‘제너럴셔먼호가 미국깃발을 달았음에도 공격했다’고 조선정부를 추궁했다. 이런 분란은 결국 1871년 신미양요로 터지고 말았다. 이때부터 조선정부와 고종은 국기문제에 직면했고, 국가창제를 고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876년 2월 27일(양력) 일본과 강화도수호조약을 맺을 때 일본 측은 일장기를 내걸었으나 조선 측 전권대신 신헌은 국기를 내걸지 못했다. 이때 일본 측은 자기들도 전함기와 천황기 외에 국기가 따로 없으면서 조선도 국기를 제작해 내걸어야 한다고 거드름을 피우며 권고했었다. 이때도 조선과 고종은 국기창제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따라서 비록 4괘 태극기가 조미수호조약 조인식 직전 미국전함 스와타라 호 함상에서 처음 제작되었을지라도 4괘 태극기 아이디어는 필경 조미수호조약 조인식보다 훨씬 이른 때에 국왕 주도로 ‘창안’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4괘 태극기 아이디어’는 1876년 2월(조일수교)과 1882년 5월(조미수교) 사이에 청국 관리들 몰래 극비리 창안되었을 것이다. 1882년 5월 22일 조인식 직전 비밀장소 스와타라 함상에서 이 기旣창안된 아이디어가 다시 극비리에 실현된 것이다. 이렇게 창제된 4괘 태극기는 1882년 5월 22일 조미수교 조인식장에서 현장에 참석한 조선관리들과 미국관리들 외에 아무도 모르게 극비를 유지한 가운데 조용히 처음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국기는 국왕 고종의 구체적 명령에 따라 1882년 9월 25일 메이지마루 선상에서 “신제新製”되어 고베의 서촌여관西村旅館 망루에 게양됨으로써 처음으로 만국에 공개되었다. 이런 사실들이 여러 사료와 정황증거들을 통해 명증되었으므로 하루 빨리 ‘박영효 창제설’이 학계와 시중에서 말소되고, ‘고종주도 창제론’이 멀리 널리 확산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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