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전부터 시조가 ‘서정의 파워’와 ‘운율의 룰’이란 자질에 함의한다고 여겨왔다. ‘서정’과 ‘운율’이란, 내용과 형식에 의해 구분하는 또 다른 이름이겠다. 둘은 분리되지만 통합되는 일은 더 많다. 시와 시조에서 ‘내용’인 ‘파워’와 ‘형식’인 ‘룰’을 통합해 보던 때, 교재와는 다르게 가르치던 국어 교사 시절을 생각한다. 난 ‘내용↔형식’의 교류에 터하여 학생의 수용을 바랐다. 한 텍스트를 두고, 상호 ‘수용↔반응’하는‘ 학습자 중심’ 수업은 형식과 내용을 함께 수용함으로써 통합적 정서를 기를 수 있다는 나름의 생각 때문이었다. 같은 이유로 시조와 독자, 비평과 독자도 이 같은 각 정서의 교호작용의 상에 놓인다.
‘서정’과 ‘운율’은 바늘과 실의 관계처럼 등가적(等價的)이다. 이에 반해 ‘파워’와 ‘룰’은 불평등과 평등, 또는 방임과 규율처럼 상등적(相藤的)이다. 시조평론은 시조와 독자의 소통에 완미를 바라며 ‘시인의 정서’가 ‘화자의 서정’, 그리고‘ 독자의 감정’에 작용함에 있어 등가냐 상등이냐 무관이냐 하는 그런 나사의 모양과 크기에 맞게 깎아가는 일이다.
나는 이러한 여러 나사들로 제작·조립된 기계를 설비하고 지상(誌上)에서 수확한 낱알들을 씹기 좋도록 까끌한 부분들을 도정(搗精)해나가기를 번복해왔다. 내 평설에 의해 정미(精米)된 작품이 독자의 밥솥에 안쳐져 찰진 밥으로 상에 올려질 것인가, 그 긴장의 순간이 좋다. 그게 제3의 글로 드러나고 사람들이 호응해올 때 비평의 보람을 느낀다. 내 곡괭이 끝에 채굴되고 인용된 시조가 눈부신 광택으로 수렴되는 때는 미친 듯 힘이 솟아나 한 사나흘 굶어도 배고프지 않다.
해서, 오늘도 노트북 마당 앞에 부려진 그 암반 같은 작품들을 펜의 망치로 잘게 부수어 살피기를 반복한다. 이 고질은 잠을 반납하는 것은 물론, 패혈증 같은 병을 각오하게도 한다. 밤새 깊이 읽기에 신이 나 온갖 시집을 다 꺼내 읽거나 막장도 무서워 않는 광부처럼 기억의 단층을 뚫어 나간다. 그게 고통이라지만 내가 좋아서 하냥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쩜 이덕무가 말한 ‘간서치(看書痴)’로 유폐되어 스스로가 블랙홀로 흘러 들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책머리에」중에서
작가·시인으로부터 생산되는 문학작품이란 비평을 전제로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비평은 문학작품을 전제로 하며, 심지어 그것을 먹이로 하여 생존하는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심하게 말한다면 문학비평은 작품의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문학작품은 비평가의 해석과 비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비평은 다만 비평자의 몫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품은 비평으로부터 독립적 관계에 놓인다. 비평이 간섭을 하건, 하지 않건 작품은 하나의 ‘격(格)’을 갖추고 지상(紙上)에 존재하는 이유에서이다. 이에 반해, 비평은 작품에 대해 지극히 의존적이다. 작품이 아니고선 ‘비평’이란 장르를 부지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비평을 위한 비평도 있지만, 그것도 작품 비평이 이루어진 이후에 그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지, 비평의 조건이 독단으로 성립하는 건 아니다. 한 작품이 비평에게 객체화되고 텍스트로서의 희생을 용인했을 때 비평은 바야흐로 논증을 진행할 수 있다.
--- pp.15~16
비유하여 설정컨대 ‘황금물고기’는 억압받고 가난한 시인이다. 시인으로 그런 의미를 되새긴다면, 농경 시대를 억세게 산 우리들의 어머니, 그들의 울음과 한의 노래가 그랬고, 일제 식민지 시대를 모질게 살아온 조상들의 삼킨 분노가 그랬다. 항쟁에 앞장선 극복자들이 겪은 암울한 민주주의의 피, 그리고 나라의 생태를 파괴한 대통령들 앞에서 촛불을 들던 시민이 그랬다. 이제, 우리의 상처투성이 ‘황금물고기’는 강과 바다에 이르러 평화의 공존 시대를 운위한다. 그와 더불어 우리는 나라[國家]다운, 문단(文壇)다운 시(詩)다운, 시조(時調)다운 치유의 물을 마시게 될 것인가. 천년을 구릿빛으로 견뎌 노래하는 황금물고기, 그래, 누가 뭐래도 희망은 힘차다! 라고 말한다.
--- p.166
요즘 문학작품의 주류는, 시조를 비롯한 다수 장르에서 이른바 생태적 특성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그게 한 흐름으로 인식된 건 2000년대 초반부터이다. 이번 신진시인들에게도 빈도가 전체의 70%를 넘는 소재가 바로 이 생태주의이다. 이 추세로 보아 생태성 추구는 아마도 21세기 말까지 지속될 전망이다.
예컨대, 김태경의 「소금쟁이」는 원래 생태 유지를 위한 기원의 대목들로 가득하다. 즉 “머뭇대고 멈칫거리다 앞다리가 짧아졌어요/바다에 닿고 싶다고 중얼거려 봤었지만 심장은 차갑게 식어 물 위를 떠다녔죠”라든가 “수면에 비친 모습은 벗지 못할 형벌이었죠” 등과 같은 표현이 그렇다는 생각이다. 이는 단순히 소금쟁이의 겉모습만을 그리고 있지 않다. 소금쟁이가 원 태생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그 회귀성에 중점을 두고 있는 이유에서다. 더불어 애착의 대상으로서의 생태를 넘어 원생회귀(原生回歸)로에의 귀환함을 점묘한 이 생태시학은 존재가 지닌 또다른 본질의 모습일 수도 있다.
--- p.3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