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들에 저마다 다른 빛깔의 이름들을 걸어놓듯이 샆으로 남은 내 삶에도 분명 그런 이름들이 있을 것이다. 이제 곧 나는 서른 살이 될 터였다. 마치 열아홉이나 스물아홉처럼 서른이란 나이는 그렇듯 아무렇지 않게 찾아오리라는 것을 나는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었다. 저 나무들의 수많은 이파리 사이로 차츰 푸르게 번져들고 있는 세상의 빛이 보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창가에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잊고 있었다는 듯 주방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지금은 다시 식빵을 만들어야 할 시간이었으므로.
--- p.174-175
지명도 알 수 없는 먼 곳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나를 쳐다보았던 그 눈길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는 마치 나를 고종사촌의 아이거나 아니면 촌수를 헤아릴 수 없도록 먼 친척 아이라도 되는 것처럼 응시했다. 세상에 완벽한 무표정이 있다면 바로 그때 나를 쳐다보던 아버지의 표정이 그럴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딱히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 어깨 뒤켠이나 이마 한가운데쯤, 아버지느 짧게 나를 응시하곤 하였다. 대단히 짧은 시간 동안이긴 했지만 시간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집중된 시선이었다. 지금도 나는 간혹 아버지가 내게 그런 눈길을 보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 p. 86
지금도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에 퍽 익숙한 편이다. 그것은 내게로, 여기로 돌아오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일수록 더욱 그렇다. 기다리는 사람이 돌아올 만한 위치에 가만히 서서 나는 어제까지의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하염없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는 한다. 내 기다림의 신호는 강을 건너고 산을 넘을 것이다. 혹은 날아가는 새를 따라갈지도 모르고 스치듯 지나가는 바람에 새겨질지도 모른다. 간혹 신호를 받아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ㄱ들이 있다. 아니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치 내 소중한 눈동자를 가져가버린 사람을 기다리듯 그 기약 없이 까마득한 기다림을 멈추지 않는다. 지금도 나는 내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 p.135
목욕 바구니를 다 챙기고 나서 나는 마지막으로 발을 헹구다가 잊고 있었다는 듯, 그 옛날 이집트의 여인들처럼 두다리를 벌리고 서서 오줌을 누었다.
--- p.17
내가 알고 있는 이모가 아니었다. 두 손으로 찻잔을 깜싸쥐며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새벽 세시의 어두운 거실에서 만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나는 종업원에게 찬물 한 잔을 청했다. 너를 낳은 건 나다. 종업원이 물컵을 내려놓고 돌아서자 기다렸다는 듯 이모가 지나가는 어투로 그런 말을 했다. 무심한 어조였다. 그건 마치 네 손톱이 너무 길었구나, 하는 소리와 별로 다를 게 없이 들렸다. 나는 똑바로 고개를 들어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 있는 이모를 맞바라보았다. 역시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무서운 여자다. 나는 떨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조금씩 떨고 있는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 p.155-156
그래, 식빵 이야기를 하고 있던 중이었지. 기본 반죽에 쑥 분말 가루나 옥수수 분말, 조림밤, 우유, 건포도 등 여러 가지 재료를 넣어 응용할 수도 있어. 모든 빵의 기본이 된다고 해서 만들기가 까다롭지 않다는 것은 아니야. 기본이라고 해서 간단한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을지 몰라. 어쩔 수 없이, 나는 이제 곧 서른 살이 될 거야……
--- p.8